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자랑하느냐? [ 시 52:1 ~ 2, 고후 1:16 ~ 17 ]
본문
옛 유대인의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려면 그분께 너의 계획을 말하라.” 하나님은 진지한 분으로서 잘 웃지 않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웃기는 방법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인생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알려드리세요. 그러면 웃으십니다. 계획을 짜지 않는 것은 실패할 계획을 짜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계획을 짜는 것은 하나님이 웃을 계획을 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은 연필로 쓰고, 비전은 잉크로 써라’고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란 절대로 확실한 것이 못됩니다.
‘예정’이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예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전재’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하실 수 있고, 모든 곳에 계시기에 예정이 가능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하시는 데 예정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정하지 못합니다.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은 나 몰라요”라고 찬양합니다. 인간의 계획이란 그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더욱이 악한 계획을 꾸민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하잖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웃으실 일입니다.
성경은 “강포한 자여”라고 합니다. ‘강포한’이란 말은 히브리어 ‘기보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용맹 있는’ 혹은 ‘능력 있는’ 등의 뜻입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서는 ‘무력이나 완력(腕力)을 남용하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강포한 자로 표현되고 있는 도엑이란 사람은 사울의 목자장으로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권력을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키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권력은 얻는 것보다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권력을 구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데 사용한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권력이나 자리나 힘은 남을 섬기는데 사용해야지, 지배하고 군림하고 말살하는데 쓰면 자신도 그 힘 때문에 망합니다.
그레고리 보이드의 ‘십자가와 칼’이란 책에서 그는 위에서 지배하는 힘과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계속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지배하는 힘은 칼입니다. 아래에서 섬기는 힘은 십자가입니다. 결국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섬기는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잠언 14:22에는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악을 도모하면 잘 못 가는 것입니다. 선을 도모하면 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끝없이 악을 계획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이 소리를 듣기를 바랍니다.
첫째, 악한 계획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지 못함입니다.
시편 52:1에는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도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면 악한 계획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악한 계획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라는 말씀의 ‘악한 계획’이란 히브리어로 ‘라아’란 말입니다. 이 말은 ‘죄악’의 뜻입니다. 도엑이란 사람은 교활한 혀를 놀려 제사장들을 다윗의 협조자로 참소하여 제사장들을 죽인 것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자랑하는고’라는 말은 자신의 악한 행위를 마치 영웅적인 행위인양 떠벌리고 다닌 것을 뜻합니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다윗과 관련한 참소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보고 잠잠했던 사울의 다른 신하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범죄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자랑하다 덜미가 잡히는 어리석은 범인이 있습니다. 일전 어느 신문에는 엉뚱한 살인범에 대한 기사가 났습니다. 두 사람이 전과를 서로 자랑하다 시비가 붙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과는 많은데 감옥에 간 횟수는 적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전과는 적은데 감옥에 간 횟수는 많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전과를 자랑하다 결국 시비가 되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찔러 죽였습니다. 전과가 많은 이걸 자랑이라고 서로 시비하였다니 얼마나 엉뚱합니까? 결국 살인자라는 또 다른 전과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살인뿐만 아니라 자살 교사 혐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살하게 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게 꼬드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악을 도모하고, 악을 계획하는 인간의 간악한 모습니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라고 기자는 말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할 만큼 혀의 역할이 중차대합니다.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날카로운 삭도’는 도엑의 혀가 끼칠 극심한 악영향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혀가 날카로운 칼같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앞에서 악한 계획을 도모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는데 어떻게 악을 계획할 수 있습니까? 우리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영어로는 “A soft answer turns away the wrath”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멀리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는데 악을 꾀하는 것은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격입니다. 하나님의 인자 앞에서 악한 일을 계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계획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뛰어봤자 벼룩이입니다. 부처님 손바닥에 손오공입니다. 그런데 감히 인간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알지 못하고 악을 도모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에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졸부가 있었습니다. 돈이 많은 이 부자는 많은 추수를 하여 창고가 모자랐습니다. 그는 창고를 늘려 짓고 창고마다 곡식을 가득 채우고 스스로 자랑합니다.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자랑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레미야 9:23에는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할만하지 못한 것은 자랑할 것도 없지만, 자랑할만한 그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16에는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원숭이 사냥할 때에 커다란 통에 바나나 먹이를 담아 두고 원숭이 팔이 겨우 들어갈 구멍을 뚫어놓았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손을 집어넣어 바나나를 잡으면 사냥꾼이 다가올 때까지 움켜쥔 손을 펴지 않아 잡힌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원숭이처럼 어리석은 생명체가 또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 인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꽉 쥔 손을 놓지 않고 삽니다. 가진 것을 움켜쥐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유와 풍성과 복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돈이나 자원이나 시간에 대해 이기적인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보다 자신의 능력과 욕심에 의존하고 움켜쥐고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의 신약본문을 보세요. 바울은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와서 고린도 교인들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7에서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고 합니다. 잘 계획해서 예 할 때 아니오 하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계획은 어리석음 그 자체입니다.
둘째, 악한 계획을 자랑하는 자는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시편 52:3에는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선과 의를 사랑해야 하는데 악한 사람은 악과 거짓을 사랑합니다. 선과 의를 행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는데 악과 거짓에 투자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악한 자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악한 것을 선택합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렇게 선택을 못하는지요? 악한 것과 거짓을 선택한다면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내가 모처럼 새 옷을 사 왔는데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걸 예쁘다고 골랐어? 당신은 물건 고르는 눈은 없는 것 같애. 난 그래도 물건 고르는 눈은 있는데.” “맞는 말이예요. 난 당신을 골랐는데 당신은 날 골랐으니까요.” 가장 잘 선택해야 할 것이 뭔지 잘 아시지요? 잘 못 선택하면 평생 고생합니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연약성으로 인하여 원치 않는 죄를 범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선이 아닌 악을 택합니다. 극심하게 타락한 인간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신화 ‘이카루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카루스와 아버지는 깃털과 밀랍으로 직접 날개를 만들어 감옥을 탈출하려 합니다. 이카루스는 날게 되자 태양에 닿을 때까지 계속 날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태양에 가까워지면서 태양의 열 때문에 밀랍이 녹아 떨어져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과 대응하려고 하는 악은 추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시도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현대 과학과 지식을 보세요. 인간을 작은 머리와 얄팍한 지식으로 틈만 나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시도합니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생명을 복제합니다. 인간의 잔꾀가 광우병을 일으키고, 개발이란 미명으로 파괴합니다. 빙하와 만년설이 녹고,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는 것, 이 모두가 다 인간의 악한 계획의 결과일 뿐입니다.
최근에는 전화사기가 극성입니다. 이상한 전화가 와서 돈 얘기가 오가고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봅니다. 가르쳐 주지 않고 몇 마디 물어보면 끊어버립니다. 내가 걸겠다고 번호를 가르쳐 달라면 안 가르쳐 줍니다. 가르쳐주는 번호나 핸드폰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해도 전화가 안 됩니다. 신종 인터넷 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보를 도용하고, 다른 사람의 통장의 돈을 마구 빼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기사건이 하루에도 수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범죄도 동반 발달합니다. 전화와 인터넷을 이용한 사건들도 국내에서 많습니다. 유령회사를 만들어 수많은 회원들을 가입시켜 돈만 받고 사라집니다. 흔히 먹고 튀는 ‘먹튀’ 사건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렇게 머리가 좋은지 모릅니다. 악한 데로 머리가 발달하였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어느 대학교수의 가짜 학위 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합니다. 예일 대학교의 논문과 졸업장과 미국에서 이 곳 대학교로 보내온 팩스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 교수는 젊은 교수로 광주비엔날레 예술총감독 내정자입니다. 교수 임용 때 졸업장과 논문이 가짜라고 밝혔던 어느 이사는 아무 이유도 없이 이사에서 퇴출되었습니다. 그녀의 배후에 큰 손이 있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성한 교단에도 이런 엄청난 악의 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처량한 생각이 듭니다. 이래서 사학에 대한 제재와 개방형 이사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가장 신성하고 깨끗해야 하는 곳에 악의 손은 오히려 더 뻗기 쉽습니다. 학교가 그렇고, 복지시설이 그렇고, 심지어 종교기관과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머리로 선한 생각도 하고, 악한 생각도 합니다. 선한 계획도 하고, 악한 계획도 합니다. 마태복음 12:35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선하고, 영혼이 맑아야 선한 것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하여 늘 악한 생각 속에 있으면 악한 것만 내게 될 것입니다.
어느 임금이 두 신하에게 각각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과 가장 악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상자 하나씩을 가지고 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이냐?” 상자의 뚜껑을 열고 “사람의 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은 무엇이냐?”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속에는 사람의 혀가 들어있었습니다. 임금님은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과 가장 악한 것이 혀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같은 혀를 가지고 선한 것을 만들기도 하고, 악한 것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머리도 그렇습니다. 가장 선한 것을 생각하기도 하고 가장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선으로 길들여야 선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유대에 왔을 때 궁전에 들어갔습니다. 헤롯은 그들에게 자신도 왕에게 경배할 테니 경배한 다음에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헤롯에게로 가지 말라고 하는 꿈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았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박사들을 속이려 했지만 박사들이 속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도리어 속았다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악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악을 악이라고 합니다.
요한삼서 1:11에는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악한 계획을 하지 않고 선한 생각을 하려면 선한 것을 본받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파스칼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신과 무관한 인생’, ‘신을 탐구하는 인생’, ‘신을 신뢰하는 인생’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신과 무관한 인생을 ‘어리석은 자’, 신을 탐구하는 인생을 ‘불행한 자’, 신을 신뢰하는 인생을 ‘행복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알고 보면 신과 무관한 인생이나 신을 탐구하는 인생은 악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똑똑한 척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척하는 똑똑한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1:1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악한 계획을 자랑하지 않고,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우리 자신을 선으로 채워야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계획을 세우고, 선을 행합니다.
여러분의 평생에, 오늘과 내일의 삶에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무슨 공부를 하려고 합니까? 누굴 만나려고 합니까? 어딜 가려고 합니까? 이 모든 것이 선한 계획입니까? 선한 계획을 하려면 우리 속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계획은 아무리 멋지고 사람의 눈에 보기 좋아도 악한 계획입니다. 또 한 주간 동안 해야 할 일들, 계획한 것들이 선한 계획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중심의 선한 생각 속에서 선한 계획을 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