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의 자식이 은혜의 자식으로 "
본문
2000년 10월 29일
본 문: 에베소서 2:1-10
1. 들어가는 말
작년에 한 탈북자가 제 삼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무사히 도착해서,
그렇게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의 주민 등록증을 받으면서 쓴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주민 등록증을 받아 드는 순간,
그 동안 겪었던 수많은 어려웠던 고난의 여정들이 눈앞을 스치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고 합니다.
밤에 자는 동안에도 머리맡 탁자에 주민등록증을 올려놓고,
불을 끄고 자려다가 다시 불을 켜고 몇 번이고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인쇄된
주민 등록증을 꺼내 보고서 잠을 잤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자란 사람에게 한국의 주민 등록증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누구나 다 받는 거라고 생각할 텐데, 정말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고,
중국의 공안의 눈을 피해 수 만리 여행을 하여 제 삼국에 가서
북한 공작원들이 들끓는 경비망을 뚫고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서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꿈같은 일을 겪은 사람에게는 우리들이 주민등록증을 대할 때의 기분과는
전혀 다른 감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왜 그 탈북자는 우리와는 다른 감회에 젖었을까요?
과거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다른 신분으로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분이 달라졌다'는, 그래서 사는 세상조차도 바뀌었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조차도
달라졌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그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신분 상승'을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요.
이 말이 지금은 '출세했다'는 말로 본래의 의미가 축소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속담의 본 뜻은 '불가능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그 불가능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 졌을 때,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저는 지금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신분 상승'을 가능한 현실로 만든
'의지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비온 뒤 흙 위에서 뒹구는 지렁이 같은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에 용으로 신분이 바뀌어진 사람들, 출세한 사람들이란 말씀입니다.
2. 몸 말
1) 이것은 저희 과거의 모습들입니다(1-3절)
오늘의 본문은 바로 신분이 상승한 우리의 모습을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오늘의 편지를 통해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과거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웠었는가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소개되고 있는 모습들은 에베소 교인들의 모습뿐 아니라,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이것은 에베소 교인들의 과거 모습이나 사도 바울의 과거 모습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습, 내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기 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의 모습들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바울은 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4가지 우리들 과거 모습을 설명합니다.
제일 먼저는 2절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즉 저희가 예수님을 알기 전의 상태입니다,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 우리들의 모습은 세상 풍속을 좇았던 삶이었답니다.
과거 우리들은 삶의 의미와 기준을 세상의 방법에 따라 살았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조차도, 그 사람이 얼마나 출세를 했는가?
하는 것에 맞추어 판단을 했었습니다.
인생의 행복조차도 얼마나 높은 지위에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느냐로 판정했었습니다.
인생의 가치, 삶의 기준이 '영혼의 상태'에 맞추었던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만져질 수 있는 것에 맞추며 살았던 우리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과거 우리들의 모습을
2절 중간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란 '악의 세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적대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말합니다. 사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탄과 뜻을 함께 하며, 사탄의 종노릇하는 온갖 악의 세력들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
사술과 무당, 이단을 말합니다. 진리를 오도하며 거스르는 온갖 거짓 신앙과 거짓 진리,
그리고 거짓 영의 활동을 말합니다. 모든 종류의 우상 숭배와 미신,
그리고 사주, 관상, 운명에 굴복하며 사는 인생 모두를 말합니다.
이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신임을 표방하며
인간의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주범들입니다.
"팔자가 세다", "젊었을 때 큰일을 치를 운명이다", "금년 여름에는 물을 조심하라"는 등의 사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주어진 운명에 따르도록 인간을 악한 세력의 하수인으로 만듭니다.
무력하게 죽은 인간을 위하여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관이 지시하는 곳에 시신을 묻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겠다는 연인들을,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헤어질 것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운세'와 '새'가 집어 주는 종이 쪽지 한 장이 전해주는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믿는 어리숙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사를 해도 복술 하는 사람에게 날을 잡아야 되고,
사업을 시작해도 죽은 돼지 머리 앞에서 고사를 지낸 후에야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허황된 거짓 진리에 속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아리 고개 밑에 있는 점 집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곳에는 온갖 귀신 귀신들의 집합소입니다.
그 귀신 앞에 엎드려 섬기는 모습은 또한 그리스도를 알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우리들이 그렇게 공중의 권세 잡은 사단의 위협과 회유,
온갖 거짓 진리에 현혹되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과거 우리들의 모습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울은 2절 끝에서 "우리들이 과거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들을 위해 종노릇했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심부름꾼, 졸병, 노예'라는 말입니다.
요사이 한창 극장과 텔레비전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괴기 영화와 무서운 공포영화 속에 등장하는
온갖 사탄과 악의 세력의 노예처럼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우리들 과거의 모습은 3절에 기록된 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절에서 여러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 이단과 투기, 술 취함과 방탕."
이 모든 것들이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타락한 인생의 모습들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동물처럼 본능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이기적인 삶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관심, 애정이나 돌봄이 없이,
모든 것을 자기의 이익에 맞게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자기의 기분만 중요하고, 자신이 많이 가져야 하고,
자신만 배부르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도 하지 않는 인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전에는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2) 진노의 자식을 은혜의 자식으로(4-8절)
본문 3절까지만 보면 참 우리의 인생이 한심하기만 합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바울은 3절 끝에서 이렇게 한심하고 희망이 없는 우리의 인생을
한 마디로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노의 자식'에게 주어지는 운명은 '영혼의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자녀'라는 말 앞에 '본질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데,
이 말은 '천성적으로'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의 세상에 오염되어 살기에
'도저히 구제 불능인 영혼'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는 모두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4절부터는 상황이 역전됩니다.
3절과 4절 사이에는 생략되어 있는 중요한 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이 '그러나'라는 단어를 넣어서 읽어보시면,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개천의 지렁이에 불과한 우리 인간들이
용이 될 수 있는 엄청난 도약의 기회가 주어지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신분 상승'의 절호의 기회가 저희들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 할렐루야!
한 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우리의 과거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들"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참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생명 되시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고 살았기에,
생명을 떠난 인생, 생명을 떠난 영혼은 죽은 인생, 죽은 영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1절에서 '허물로 죄로 죽었던 영혼들'이었다고 저희의 과거 모습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 곧 끝이 없으신 사랑은 저희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사형'에서 '사면'으로의 대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개천의 지렁이'가 하늘을 나르는 용이 된 것 같은 엄청난 신분의 변화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신분의 변화는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완전하고도 본질적인 신분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지하도 입구에서 동전 하나 얻기 위하여 굽실거리는 거지 소년에게,
1짜리 지폐를 넣어 주었다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긍휼과 사랑이긴 해도, 본질적인 소년의 인생을 바꿀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군가가 그 거지 소년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좋은 옷을 갈아 입히고, 자기의 호적에 그 소년을 입적시켜 양자로 삼았다고 하면,
그 거지 소년의 인생은 엄청난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긍휼하심은 바로 이렇듯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는 측량 불가능한 긍휼하심과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로 죽을 운명의 지렁이 같은 인생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고(5절), 또 함께 일으키셨습니다.
곧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부여, 영혼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6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로의 구원을 말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말합니다.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늘나라로의 구원 이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짐을 사도 바울은 강조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저희들은 예수님을 저희들 구원의 주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주체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님들 가운데에서도
아직까지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육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죽음 다음에 뭐가 또 있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최근 영국 사우스 햄프턴 종합 병원의 샘 파니아 박사가
임상적으로 사망한 상태에 있다가 다시 살아난 심장마비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연구 보고서가 바로 며칠 전인
10월 23일(2000년) 영국의 BBC 방송에서 보도를 했습니다.
파니아 박사가 조사한 환자들은 완전한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소생한 경우들이었는데,
분명히 그 사람들은 뇌가 완전히 죽은 상태였었는데,
소생한 환자 63명 중 56명은 자신이 사망했던 그 무의식의 시간을 기억해 냈고,
다른 7명은 무의식의 시간뿐 아니라 그 때 느꼈던 경험을 기억해 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죽음 후에 평화와 환희, 빠른 시간의 흐름, 고양된 감각,
육체의 감각을 상실하는 단계를 거쳐, 밝음 빛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
신비스러운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음의 상태에서 그런 경험을 하는 동안에도
뇌 세포는 전혀 움직이지 않은 뇌사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모든 과학자들이 뇌를 통해서 인간은 생각하고 꿈을 꾸고 의식하는데,
뇌가 죽어 있는 상태에서도 인간이 무엇을 경험한다는 것은,
"육체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세계, 곧 영혼과 죽음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고 파니아 박사는 그 연구 보고서에서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3. 맺 는 말
1999년, 작년 12월 31일의 2000년대를 맞는 망년회를 축하하기 위해
런던의 사보이 호텔과 뉴욕의 레인보우 호텔, 윌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이미 1995년부터 예약을 받았는데, 입장료가 1,000의 고액임에도,
대부분의 호텔이 예약 6개월만에 대기자 명단을 만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5년 후에나 있을 새로운 시대 2000년대의 새해 축하 파티를 위해
어떤 사람들은 5년 전부터 그 파티를 예약해 놓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을 맞게 될텐데,
천국 파티를 위해 예약해 놓으셨습니까?
2000년을 맞는 파티를 위해 1999년에 가서,
아니 1999년 12월에 가서 예약을 하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기에
그 근처도 가지 못한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 영혼이 천국에서의 파티를 위해 죽음 직전에 예약하겠다고 생각하시는 성도님은 안 계십니까?
혹시 우리들 중에 3000년까지 살아 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인간사에서 가장 예측을 못하고, 순서가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절대로 육체의 죽음뿐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개천에 사는 지렁이 같은
우리 인간들이 '진노의 자식'에서 '은혜의 자식'으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기적의 '신분상승의 기회'가 바로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8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죽음의 자식'이 '구원의 자식'으로 신분 상승이 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은혜를 믿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은혜를
'아멘'으로 믿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개천의 지렁이'가 '용으로 승천' 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청소년 시절, 깡패로 갱으로 수도 없이 감옥을 드나들었던 한 목사님이 이렇게 자신을 간증했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은 판사나 정신과 의사나, 집행유예 감독관들이 줄 수 없는 것들을 주셨습니다.
과거 치안 판사에게 '사회 악'이라고 낙인이 찍혔던 '나 같은 사람까지도'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받는 기쁨을 주셨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와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기쁨을 주셨으며,
많은 사람에게 '나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 저나 여러분들의 모습은
오늘 말씀에서처럼 바울과 에베소 교인들처럼
내 허물과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저희들은 도저히 하나님 편에 설 수 없는 인생들,
그리고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과거 존재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꺼져 가는 작은 불씨조차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영혼은 대 변신을 하게 됩니다.
'저주의 자식에서 축복의 자식'으로의 변신입니다.
'죽음의 자식에서 생명의 자식'으로의 변신입니다.
'진노의 자식에서 은혜의 자식'으로의 변신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변신이며, 신분상승입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신분 상승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영혼과 인생을 책임지실 구원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의 구원자로 고백하심으로,
'개천의 지렁이가 용'이 되는, '진노의 자식이 은혜의 자식'으로 변화되는
기적을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