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본문
2000년 12월 17일
본 문: 사무엘상 28:4-12
1.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두 사람의 사울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구약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입니다.
두 사람이 아주 대조적인데, 오늘은 구약에 등장하는 사울 왕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처음 2년 동안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면서
열심히 나라를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던 왕이 집권 2년을 넘기면서 점차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초기에는 전쟁에 출정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도 했지만,
점차 나라가 강해지고, 군사력이 막강해지자 하나님께 묻는 일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는 시도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던 다윗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고,
자기의 딸 미갈과 결혼을 시켜 사위로 삼았음에도 사위에 대한 질투심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증오로 변하여, 마침내 사위 다윗을 살해하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곁길로 나가는 사울 왕의 길을 잡으려 하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도 듣질 않습니다.
마침내 성전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 아비아달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성경은 사울 왕의 이런 후반기 인생을 가리켜 '불순종과 불신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완전히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던
사울 왕의 말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사울 왕은 이 당시 백성들을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야욕으로만 살고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만 살았던 왕이었습니다.
사위를 살해하려고 동분서주하느라, 국정은 피폐되고, 군인들은 피곤에 절어 살았으며,
나라는 황폐해져 갔습니다.
그렇기에 사울 왕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습니다.
종교적으로 이끌어 줄만한 제사장도 없고,
초기에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었던 사무엘 선지자도 죽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울 왕을 떠났고, 하나님의 능력도 사라졌던,
그야말로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암흑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사울 왕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오늘 말씀 사무엘상 28장은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블레셋 민족이 쳐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위기 때문에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폭력사태가 거의 매일 일어나고,
뉴스에서 가자지구의 테러 사건들을 보여 주곤 하는데,
바로 그 가자가 블레셋 민족의 중심지였습니다.
블레셋 민족이 대규모의 전면전을 벌이기 위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사울 왕이 듣게 됩니다.
6절의 말씀을 보시면 다급해진 사울 왕이 하나님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았던 사울 왕이 몹시도 급했던가 봅니다.
하나님을 찾기는 했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사울 왕이 "하나님 어쩌시렵니까? 이 백성들을 이렇게 죽이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습니까?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의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셨습니다.
다급해진 사울 왕이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는지,
신하들에게 점을 잘치는 무당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신접한 여인, 곧 무당을 찾아 그 무당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집권 초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무당과 온갖 잡신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죄를 멀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울 왕은 자신이 내어버리고 쫓은 그 무당을 그 밤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까봐 변장을 하고는
엔돌이라는 곳에서 점을 쳐주는 무당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 무당에게 죽은 사무엘 선지자의 영혼을 불러오라고 다그쳤습니다.
무당이 한 영을 불렀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울 왕이 무당에게 그 영혼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무당은 '겉옷을 걸친 노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울 왕이 그것이 선지자 사무엘의 영혼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땅에 묻고 절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15절은 바로 그렇게 무당의 초혼 술로 나타난
사무엘의 영혼과 사울과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물었습니다.
"왜 나를 불러 귀찮게 하느냐?"라고 하자, 사울은 "블레셋이 나를 치려 군대를 동원했는데,
너무나 급해서 하나님께 여쭈어 봤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아 어찌해야 좋을지를
당신에게 물으려고 불렀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러자 사무엘은 16절부터 18절까지의 세 절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응답을 하지 않는지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몸 말
하나님께서 사울 왕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이유들(16-18절)
첫 번째로 혼으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떠나 사울의 대적,
곧 원수가 되셨기 때문에 사울 왕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가 더 이상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깨어진 관계라는 말입니다.
깨어진 정도가 아니라 대적, 곧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너하고 나 사이는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적대시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곧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벌을 받을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어 사무엘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때만 하더라도,
사울 왕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잘 나가는, 요새 말로 소위 '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라도 잘되고, 백성도 만족하고, 국방력은 막강해지고, 영토는 넓어지고,
인근의 이방 민족들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이러니까 무서운 게 없어졌습니다.
이제까지 잘 되고 있는 현실이 마치 자신만의 힘인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잘했으니까!'로 자신의 공을 치하하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서 앞의 글자가 지워지니까, '나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이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갖다 놓고,
하나님을 그의 인생 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상황이 급박하니까, 하나님을 다시 찾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사울에게서 버림을 받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의 요구에 따라 그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렇기에 혼으로 나타난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울 왕과의 관계를 '대적의 관계',
'원수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 왕을 도우시는 분이 아니시고, 사울의 대적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대적인 사울을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사울 왕이 아무리 기도한다고 한들 원수가 된 그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잘 나갈 때에는, 뜰 때에는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아도 돼요.
저 혼자서도 잘해요."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혼자서도 잘해요. 그러니 더 이상 내 인생에 하나님이 끼어 들지 마세요'라고 소리치고는
'하나님' 대신 '나님'의 인생을 살지는 않습니까?
그래놓고, 다급해지면,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는 너무 작으니까, 둘 님, 셋 님, 아니 만 님, 억 만 님, 조 님, 경 님으로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까?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버림받아 그의 원수가 되셨듯이,
때가 너무 늦기 전에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두 번째 이유가 1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시면, 사울 왕과 아말렉 족속과 전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 왕에게 분명하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 "네가 전쟁에 나가 아말렉과 싸워 이길텐데,
그 전쟁에서 이기면 짐승조차도 남기지 말고 죽이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전쟁에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게 되었는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 왕은 아말렉을 대파하여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짐승조차도 남기지 말고 죽이라고 하셨는데,
사울은 그렇게 하질 않았습니다.
짐승 중에서 가장 살찌고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짐승들만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질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짐승까지도 다 죽이질 않았습니까?"
그러자 사울 왕이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제일 좋은 짐승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 가장 좋은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쓰기 위해서 죽이지 않은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려고 가져 온 것인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요"라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그 유명한 말씀을 사울 왕에게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더 좋아하십니다."
곧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18절에 기록된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말렉 군사와 그의 짐승까지를 모조리 죽이지 않은
사울 왕의 불순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후 사울 왕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속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순종의 생활로 그의 남은 생애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불순종의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십니까?
얼마 전 어떤 기독교 신문에서 '신자는 많은데 제자는 없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모이는 사람은 많은데,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편의주의 적인 신앙관' 때문입니다.
'신앙'의 우선 순위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닙니다.
세 번째나 네 번째가 될까요?
"이것 먼저 하고, 저것 먼저하고, 쉴 것도 쉬고, 즐길 것도 즐기고, 내가 먼저 편하고,
여유가 있으면, 짬이 있으면, 낮잠 자는 셈치고 신앙생활하지 뭐!"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내 생활을 즐길 만큼 즐기고 난 후에 성경 읽을께요."
아니면 "내 편한 대로 살다가 여유가 있으면 그 때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성가대도 할께요."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이런 편의주의 적인 신앙관은 결국 하나님보다는 '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하고,
순종보다는 '변명'을 먼저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정작 내가 급할 때, 그래서 그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봐야,
하나님은 "네가 나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했느냐?"고 물으실 때,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맙니다.
3. 맺 는 말
하나님은 결국 사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19절을 보시면,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죽은 사무엘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 군대에 몰살당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사울 왕은 길보아 전투에서 자신의 세 아들들과 함께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이런 두 가지의 이유 외에 더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그 마지막 시기에 무당을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박한 시기에 사울 왕은 자신의 집권 초기에
내 쫓고 청산했던 가장 사악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무당을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울이 과거에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청산했던 것이었습니다.
단절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급박하고 다급한 시간에 사울 왕은
자신이 버리고 청산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무당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울 왕이 자신이 청산하고 버린 무당을 찾아갔다는 것은,
그가 다시 과거의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과거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으로 다시 되 돌아갔을 때,
하나님은 사울 왕을 심판하셨습니다.
지혜의 책인 '잠언 26:11'에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더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처럼 미련한 짓을 한다고 합니다.
'버렸던 과거의 악습을 되풀이한다'는 말입니다.
단절하고 청산해야 했던 과거의 죄악을 다시 범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탕자가 어떻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까?
아니 아버지를 자신이 있던 그 죄악의 도시, 방탕의 거리로 초청을 해서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그 아들은 그 곳을 떠났습니다.
죄악의 도시, 방탕의 거리, 유혹의 마을을 떠나 아버지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실패도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줄 압니다.
실수의 횟수를 줄이고, 마침내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실패는 어쩔 수 없더라도, 반복되는 실패는 막을 줄 알아야 합니다.
과거를 거울 삼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와 구분해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창세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고 심판시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사일생으로 그 곳에서 도망치는 유일한 생존자들인 롯의 가족들이 소돔 성을 뒤로하고
산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리면서 자신들이 살던 죄악의 땅 소돔 성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롯의 아내가 그만 두고 온 그 죄악의 땅, 자신의 과거를 향하여 뒤를 돌아다 볼 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그 여인을 소금 기둥으로 만드셨습니다.
사울 왕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급박하고 다급한 시기에
자신이 버린 '개가 토한 오물'을 다시 찾아갔을 때,
청산하고는 다시 보지도, 찾아가지도 말아야 할 무당을 찾아갔었을 때,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가 다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아찔한 순간들도 많았고, 위험했던 순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화가 난다고,'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과거 단절했던, 청산했던, 그리고 우리가 버렸던 죄의 습성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시지는 않으십니까?
끊었던 연기를 다시 들이키시거나, 술병을 마시거나,
세상의 쾌락과 유혹을 쫓아 살고,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며 살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니 지금 그렇지는 않으십니까?
부부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할 때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애인의 망령'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그 때 미스터 박하고 결혼했더라면, 내가 오늘 당하는 설움을 당하지는 않을텐데.."
남편은 또 "그 때 내가 미스 김하고 결혼해야 나긋나긋하게 깨소금 볶아가면서 살수 있었을 텐데"라고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단절해야 할 과거로, 버려야 할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부부관계는 더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사울 왕이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에 실패했을 때,
그의 인생 전체가 실패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기 전, 바로 오늘부터라도 과거 우리의 구습,
아직도 우리를 죄의 늪에 빠지게 하는 어떤 비 신앙적인 모습의 작은 뿌리라도 있거든,
오늘 신앙의 날카로운 칼날로 그 뿌리와 줄기를 근원부터 차단하셔서,
과거 우리의 죄된 모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