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 (눅 18: 9-14)
본문
기도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두 번 더 기도에 관하여 설교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기도해야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기도가 될까 생각해 봅시다. 자식을 키워보면 부모님 마음에 꼭 맞게 무엇을 구할 때 금방 들어주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녀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를 드릴 때 즉각 응답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가지 정반대의 기도 태도를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두 사람은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살았던 어떤 개인이라기보다는 두 가지 상반된 기도의 예를 들기 위하여 설정된 상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두 사람의 극단적인 기도의 본보기를 들므로써 어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더 합한 바른 기도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모세오경, 즉 Torah(율법)를 철저히 준수해보고자 노력했던 보수적인 율법정통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Pharisee)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과는 구별된다(separated)'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그 당시 살고 있었던 보통 사람들로부터 뚜렷이 구별될 수 있도록 모세오경에 나타난 모든 율법들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자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시편 1편 1-2절에 나오는 말씀, 즉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하는 말씀을 생활 속에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순수한 의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1세기에 이방 종교와 문화의 침입 때문에 유대교의 고유한 전통이 자꾸만 훼손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외부 영향으로부터 과거의 전통을 지켜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자꾸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차별되게 생활한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이들은 자기만이 의롭고 거룩하다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와 교만(pride)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 특히 세리나 죄인들을 업신여기고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조리 배척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지키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다 품으심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께서 사사건건 충돌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쪽으로, 다시 말해 자기들처럼 율법에 충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갔는데 반하여 예수님은 소외받고 상처받고 낙오된 죄인들을 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싫어하셨습니다. 내적인 경건은 형편없이 외적인 형식만 앞세우는 바리새인들의 가식을 미워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미국 사람이 대학에 다니는 남학생과 이 학생의 여자 친구를 초청해서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좀 편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도 하고 식사도 하기 위하여 자신도 코트와 넥타이를 다 벗고 초대한 남학생에게도 양복 윗도리와 넥타이를 풀으라고 권했습니다. 한참 멈칫거리던 남학생이 주인을 구석에 모시고 가 자기가 왜 양복 상의와 넥타이를 벗을 수 없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가 다리미질을 해서 다린 부분은 와이셔츠의 소맷부리(cuffs)와 깃, 즉 칼라(collar) 부분이기 때문에 제가 양복 상의를 벗으면 우굴쭈굴한 와이셔츠 모습이 금방 다 드러나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젊은 대학생이 와이셔츠의 소맷부리와 칼라만 다림질을 한 것처럼 바리새인들 역시 외적인 것은 경건하고 거룩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내면 생활은 형편없이 썩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미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가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도대체 어떤 기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까? 본문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먼저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따로 서서 기도했다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특별히 기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숨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랑하기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11절 후반을 보면 이 바리새인은 또한 자신은 누구누구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에서 바리새인은 "나"의 의로움, "나"의 특별함, "나"의 거룩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토색하는 자,' '불의한 자,' '간음을 하는 자들'과 자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말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바로 옆에서 기도하는 세리가 들으라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11절에서 자신이 세상의 죄인들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한 뒤에 바리새인은 12절에서 자기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를 율법의 두 가지 세부 조항을 말함으로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즉 일주일에 반드시 두 번씩 금식기도하고, 자기 소득의 1/10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립니다." 7일에 한번씩 금식기도드리는 것과 십일조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겸손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람에게 자기의 의를 자랑하려는 기도였습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1세기에 세리들은 유대동족들로부터 가장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리들은 로마정부의 앞잡이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정부에 고용되어서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동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었지만 로마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에 이들은 자기 동족들에게 얼마든지 세금을 착취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로마정부가 한 집에 1,000달러의 세금을 부과하면 세리들은 2,000달러하고 써서 1,000달러는 로마정부에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의 혈세를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자요 매국노였습니다.
세리의 이런 신분을 이해한다면 바로 이런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더 기쁘시게 듣는 기도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인 것입니다.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본문 13절에 보면, 세리는 첫째로 멀리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이 따로 서서 당당히 기도했던 것과는 달리 세리는 멀리 외진 곳에 서서 남몰래 겸손히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자기의 율법적 의를 자랑하면 드린 기도와는 정반대의 기도인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진실과 자기의 부족을 절감하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가에 대한 이유가 9절에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말씀하신 후 "세리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더 의롭다 인정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말씀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기도,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진실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앗시시에 살던 성 프란치스꼬는 아베르노 산상에 자주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산상에서 기도할 때 그의 입술에서는 가끔 한 마디가 흘러나왔는데 그것은 "하나님"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라는 말 한마디만 되풀이하면서 여러 시간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향하여 있다면 화려한 미사려구가 아닌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기도가 오히려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라는 유대 신학자는 우리에게는 두 개의 호주머니(pockets)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우리는 그저 먼지나 한 줌의 재에 불과하다는 보잘것없다는 작은 의식"(smallness--"We are nothing but dust and ashes.")을 움켜잡게 되며, 다른 쪽 호주머니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위대함"(greatness--"For our sake the universe was created.")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자도 될 수 있고 형편없는 죄인이 될 수도 있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100% 성인군자도 될 수 없고, 100% 비참한 죄인으로만 전락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말대로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의인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같은 자기자랑, 자기의, 교만이 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은 세리와 같이 한없이 왜소하고 부족하다는 겸손함과 죄인의식이 우리를 압도할 때도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즉 의인이면서 죄인인 양면성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부버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호주머니와 우리를 형편없이 보잘 것 없다고 만드는 호주머니가 두 개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야 하나님께 바로 서는 것일까요?
연합통신(AP) 보도에 따르면 어떤 병원의 간호원이 이식수술을 위하여 제거된 심장을 운반하다가 땅에 떨어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있던 심장이 땅에 떨어져 기스가 나자 이 간호원은 그 심장을 쓰레기통에다 버리고는 허위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이 간호원의 실수가 발각되었을 때 이 간호원은 250불의 벌금을 물고 징계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간호원에게 부과된 공식적인 죄목은 "inappropriate handling of a human heart," 즉 "사람의 심장을 잘못 간수했음"이라는 죄목으로 벌금을 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고 저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inappropriate handling of a human heart," 즉 "사람의 마음을 잘 못 다스리는 죄"를 범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는 바리새인적인 마음과 세리적인 마음이 다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과 죄인의 마음이 다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드리시기 원합니까? 아니면 세리의 기도를 드리시기 원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어떻게 간수하고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도 될 수 있고 세리의 기도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흥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