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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헌금관 <눅 21: 1-4>




어떤 가난한 농부가 평생 소원이 자기 소유의 땅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 농부의 집착덕분에 마침내 작지만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농부는 좀 더 넓은 땅을 갖고 싶은 욕심때문에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가족들과 함께 좀더 많이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 이사 덕분에 이 사람은 상당한 분량의 땅을 가질 수 있었고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새로운 유목지가 한창 개발중인 지역에 러시아 화폐로 1천 루블만 내면 하루 종일 자기가 걸은 만큼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단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자기가 출발한 지점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된 이 농부는 흥분을 가누지 못한 채 해가 뜨자마자 기름진 대평원을 젖먹는 힘을 다하여 걷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진 땅 곳곳에 말뚝을 박으면서 이 광활한 땅이 모두 자기 것이 된다는 기쁨 때문에 피곤도 모른 채 걸어가고 또 걸어갔습니다. 아니 뛰어 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한낮이 되어서 그동안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니 엄청난 길이의 땅이었습니다. 이제는 해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기 위하여 부지런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너무 넓은 땅을 잡았기 때문에 도저히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처음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많은 땅을 고스란히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하자 넘어지고 다치고 땀이 범벅이 된 채 단 1초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마침내 해가 지평선위로 막 떨어지고 있었을 때 이 사람은 간신히 출발지점에 도착했지만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루 종일 기를 쓰고 걸어서 엄청난 땅이 모두 자기 땅이 되었다는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하고는 출발 지점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결말을 맺고 있다고 합니다. "머슴은 괭이를 집어들고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여섯 자의 땅을 팠다. 그의 묘를 쓰기 위해. 그리하여 그를 그곳에다 묻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쯤의 땅이 필요한가』하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사람이 본래 적신(赤身)으로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욕심을 적게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밑빠진 독과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젊은 목사들이 말하기 싫은 설교주제가 '헌금,' 즉 돈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나 너무나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명한 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큰 문제라고 생각이 되어서 오늘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물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돈을 바르게 버는 것도 어렵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제가 볼 때 버는 일보다 바르게 쓰는 일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흔히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무리 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남보기에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어서 큰집 짓고, 좋은차 타고, 사치한 옷 사입고, 맛있는 요리 먹으면서, 인생을 한번 멋지게 즐겨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돈을 벌고 돈을 쓴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일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온전한 일을 위하여 쓰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전서 6장에서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 6: 19-21에서 좀과 동록과 도적이 노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늘 창고에 안전하게 보물을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태 6: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는 일은 그저 자기와 자기 가족들만을 위하여 현세의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을 말하며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금을 드리거나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훌륭하게 물질을 사용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헌금에 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으면서 훌륭한 목사님들일수록 교인들의 헌금생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헌금생활이야말로 개인의 영적 건강과 참된 축복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해수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은 다섯 가지의 잘못된 헌금 생활을 지적합니다.

첫째로, 억지헌금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헌금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펌프교인'과 '옹달샘교인'이 있는데 펌프교인은 지하수는 풍성하지만 항상 펌프질을 하고 자극을 해야지만 억지로 헌금을 하는 사람들이고 옹달샘교인은 누구의 간섭이나 자극이 없이도 항상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에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사람들입니다. 고후 9: 7에 바울은 "각각 그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기분내키는대로 헌금하는 '기분헌금'이 있다고 합니다. 사전에 정성껏 준비하여 헌금하는 것이 아니고 헌금시간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고 자기 기분대로 헌금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 있을 때에는 기분파가 되어서 한꺼번에 많은 헌금을 하다가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헌금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헌금태도는 결코 건강한 영혼의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셋째로, '말많은 헌금'이 있다고 합니다. 목회를 쭉 해오면서 어느 교회에서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열심히 많이 헌금하는 사람이 교회재정이나 교회일에 불평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헌금생활에는 인색한 사람들이 이것저것 불평을 쏟아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정성껏 헌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잘하는 사람은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할 수 있으면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함께 헌금생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몇 사람이 전체 예산의 대부분을 감당하는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많고 적음의 액수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헌금생활에 참여할 때 우리 교회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십일조를 비롯하여 열심히 헌금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우리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손님으로서 방문객으로서 몸만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여러분의 믿음도 자라나고 생활도 윤택하고 복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넷째로, '찌꺼기 헌금'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개를 키우는 주인이 음식을 다 먹고 난 뒤 찌꺼기를 개에게 주는것과 같다고 조해수 목사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수입이 생기면 승용차 유지비, 집 페이먼트, 교육비, 세금, 옷값, 외상값, 월부값, 곗돈, 등등을 다 떼어놓은 다음에 남으면, 다시 말해 음식찌꺼기와 같이 남은 돈을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주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조목사님은 이와 같이 개밥 주듯이 헌금하는 생활을 결코 성도의 영혼을 성숙케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다섯 번째로, '눈치헌금'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개가 얼마 하니까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자기도 얼마 하겠다는 것은 옳은 헌금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형편에 따라 정성껏 하면 되지 누가 헌금하면 하고 누가 안하면 안한다는 생각은 종의 모습이지 자유인의 모습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남이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지 분명한 믿음과 소신을 가지고 주님께 드린다는 태도로 헌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헌금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성도의 헌금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언제고 기회가 닿으면 더욱 철저하게 제가 얻은바 헌금에 대한 영적 교훈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축복을 얻기 위하여,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나의 명예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받고, 더욱 큰 축복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체면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구속하여 주신 은혜가 너무나 깊고 크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가 바로 헌금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주 드리는 헌금은 우리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사를 지원하고, 전도하고 목회하는 일, 사회 봉사하는 일, 등등 모두 귀한 일에 쓰여집니다. 제가 이곳에 부임하면서 여러분이 정성껏 헌금한 물질이 한 푼도 헛되이 쓰여지지 않도록 얼마나 세심하게 노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드리는 물질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실현하는데 귀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백만장자, 록펠러(John Rockefeller)라는 사람은 여덟 살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평생 십일조하는 교인이 되었으며, 콜 게이트라고 하는 치약 공장을 크게 일으켰던 윌리엄 콜게이트(William Colgate),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 등등의 사람들이 모두 십일조를 통하여 알뜰하고 경제적인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어떤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했는데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얼마되지 않는 헌금을 칭찬했습니다. 렙돈이라고 하는 화폐는 구리주화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서 가치가 제일 낮은 돈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 미국돈의 페니처럼 아주 보잘것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돈을 바친 부자보다도 왜 이 가난한 과부가 드린 페니 몇 푼을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되었을까요? 4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 풍부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언제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액수가 많고 적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성껏,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는가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헌금하는 생활은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기초입니다. 주일성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헌금생활에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김흥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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