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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친구삼기 <렘 30: 12-17>



Befriending Our Hurt

어떤 아파트 단지에 다정한 이웃이 있었습니다. 옆집에 큰 슬픔이 생겼습니다.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옆집에 다섯 살 먹은 딸을 둔 어머니가 "얘야, 옆집 아줌마가 큰 상처를 입었으니까 괴롭히면 안 된단다."하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이가 큰 슬픔을 당한 옆집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주인 아줌마가 나와보니까 옆집 아이가 밴드에이드(Band-Aid)를 하나 가져와서 말하기를 "우리 엄마가요, 아줌마가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하는데요. 이 벤드에이드를 부쳐보세요. 꼭 상처가 나을 거예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철모르는 어린 소녀가 건네준 벤드에이드를 받은 아줌마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그래, 참 고맙구나. 아줌마가 이 벤드에이드를 아픈 상처에 붙여서 꼭 낫도록 할께."하고는 꼭 껴안아 주었다고 합니다. 오래 전 『낮은 울타리』어디에선가 읽은 내용입니다.

우리 몸에 생긴 상처는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해서 잘 치료해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생긴 상처는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힙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계획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받고 상처받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어떤 신문 광고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집 잃어버린 개. 까만 색과 하얀 색을 가졌음. 싸움을 하다가 한쪽 귀의 절반이 물어 뜯겼음. 자동차에 치여서 두 다리가 부러져 절뚝거림. 한 쪽 눈이 보이지 않음. Lucky라는 이름을 가진 이 개에 대하여 아시는 분은 연락바람."

우리의 인생이 바로 이 신문광고에 난 럭키라는 개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암과 같은 불치의 병이 우리를 엄습하고, 행복하던 가정에 갑자기 이혼이라는 불행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또한 전혀 예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고통치를 받을 때가 있으며 잘나가던 사업이 순식간에 벼랑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한 평생 살아가면서 고통받고 상처입는 일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숙명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의 주인공인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큰 위기에 처했을 때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를 마치 롤러 코스터(roller coaster)를 타고 높다란 언덕과 가파른 내리막길을 도무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오르내리는 사람과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주전 626년부터 주전 584년까지 약 40년 동안 고통과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예언 활동을 했던 '눈물의 선지자' 혹은 '고독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들을 듣지 않고 무참히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상숭배와 온갖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가증한 백성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거의 피할 수 없는 노도와 같이 다가오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바로 이러한 심판은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장차 온 이스라엘의 산하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지도자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통하여 실현되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레미야 30: 12―17에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특히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게 될 깊은 상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12―13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고 했으며, 15절 상반부에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장차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입게 될 고통이 얼마나 엄청난지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기초로 해서 우리 인간의 상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과 상처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범죄함을 통하여 인류전체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와의 범죄 때문에 여자들은 아이를 낳는 축복을 가지되 반드시 고통을 거쳐서 낳게될 것이며(3: 16절), 아담의 범죄 때문에 남자들은 땅을 일구어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거저되는 것이 아니라 종신토록 수고해야지만 어떤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3: 17―18절). 이와 같이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에 인간이 고통받고 상처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을 주시되 반드시 불에 탈 위험성을 함께 주셨고, 물을 주시되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동시에 주셨으며,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시되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도 함께 주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통이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할 때 늘 기억해야 할 진리는 바로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악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생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칠 수 없고 싸맬 약조차 없을 정도로 중한 고통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의 가증한 길에 빠지고 온갖 더럽고 불의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삯으로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애매한 고통, 즉 구약의 욥이 겪었던 것과 같이 까닭을 알지 못하는 불의하고 불공평한 고통도 분명히 있지만 대부분 우리 자신의 죄악이나 또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홀로 고통받고 상처입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와 온 우주가 함께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좀처럼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게 될 때 우리는 흔히 오직 나 혼자만이 이런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불교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외아들을 금지옥엽으로 여기고 살아오던 어떤 홀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부처님께 찾아 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부처님께 찾아온 이 어머니는 자신이 어떤 위로 받을 길이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여자가 당한 고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지금부터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아무런 슬픈 일이나 고통거리를 당하지 않은 집이 있거든 그 집으로부터 쌀 한 되박을 담아오라."고 주문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 길로 온 동네 집집마다 슬픈 일을 하나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 없나 하고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허탕을 치고 빈 쌀바가지만 들고 되돌아 온 여인에게 부처님은 "그렇다. 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당한 고통 중에 겨우 한 가지 고통을 당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고통과 상처가 온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 케이블 TV에서 나오는 한국 뉴스를 우연히 본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 아들이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아 임종을 하려고 어머니 곁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가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머니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았던 어머니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져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 병원에 누워 있는데 어머니가 세상 떠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켜보겠다던 효자 아들이 어머니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난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가만히 돌아보면 이보다 더한 고통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온 가족이 목숨을 잃은 가정,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어머니와 딸이 함께 세상을 떠난 경우 등등, 불행을 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들라 하면 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나 혼자만이 이 고통과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똑같은 고통과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겉모양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내면에 들어가 보면 다 하나씩 기가 막히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습니다. 말을 안 할 뿐이지 고통 없이 100%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와 고통을 부인하거나 도피하려고 몸부림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현실을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고통과 상처를 우리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처럼 하나의 친구로 삼으면 됩니다. 절대로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상처가 찾아오지?"하면서 고통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고 해서는 결코 참된 치료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당하는 고통과 상처 중에 그저 작은 고통을 나 역시 당했을 뿐이야!"하면서 현실의 아픔을 조용히 받아들이면 시간이 결국 모든 것을 해결하여 줄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당신에게 주어진 상처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면서 친구삼으신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 분은 멀쩡한 상태에서 아무 눈물이나 고통 없이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처절한 고통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처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 5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상처를 친구삼아 그 형극의 길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모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를 조용히 쓰다듬으십시오. 여러분의 고통과 상처가 우주의 고통과 이어지고 마침내 예수님의 수난에까지 맞닿게 될 때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에 하늘이 무너질 것같이 절망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도 고칠 수 없고 그 어떤 약으로도 싸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17절 후반에 하나님은 다시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모습이십니다. 어떤 때는 진노하셔서 우리를 땅에서 쓸어내실 것 같은 하나님이 결국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고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희망의 예언 그대로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고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상처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금 싸매 주시고 치료해주신 놀라운 사랑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나온 『Christianity Today』라고 하는 잡지에서 Philip Yancey 가 다음과 같이 자기의 장인 어른에 대하여 간증하고 있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얀시의 장인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생 동안 성경을 가르쳐 온 주일학교 교사요 믿음이 아주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말년에 가서 신경마비가 오는 병에 걸려서 침대에 누워 자기가 즐기던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식물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39살 먹은 사랑하는 딸이 이상한 당뇨병에 걸려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집안에 두 사람이나 처참한 질병으로 엉망이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재정적인 압박이 얼마나 극심하게 되었던지 어느 크리스마스 때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얀시의 장인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지난 수 십년 동안 나는 성경을 가르쳐 온 주일학교 교사였고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에 확신을 가져 왔었는데 나는 드디어 내 신앙이 산산조각이 나서 세 가지 사실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얀시의 장인이 언급한 세 가지 사실이란 "첫째, 인생은 힘들다는 것"과 "둘째,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것," 그리고 "셋째, 천국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얀시의 장인은 생의 말년에 기막힌 고통과 상처를 당했지만 다른 모든 기독교 신앙을 부정한다고 해도 고통스러운 삶 한가운데 여전히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확신만큼은 한결같이 붙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의 장인이 말했다는 것처럼 인생은 때로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삶의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비로우시며 우리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Charles Spurgeon이 어느 날 오후에 산책을 하기 위하여 시골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어떤 농부가 헛간의 지붕 위에 달아 논 풍향계(weathervane, 바람개비)를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 풍향계 꼭대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이 풍향계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을 때 집주인 농부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스펄젼은 왜 이 농부가 하필이면 풍향계 위에다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써놓았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에게 묻기를, "당신이 이 풍향계 꼭대기에다가 이렇게 적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날씨처럼 자주 변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랬습니까?" 농부는 이 질문을 받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하길, "그 정반대입니다. 제가 풍향계 꼭대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써 놓은 것은 바람이 어느 곳으로 불든지 간에 하나님은 항상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이 어느 곳으로 불든지 간에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시며 우리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십니다. 이 곳에 계신 여러분들 중에 자식을 두신 분들은 누구나 다 여러분의 자식들이 고통당할 때 안쓰러워 하고 평소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고 우리가 속상해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속상해 하시며 우리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상처를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모든 상처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시고 싸매 주시고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바람이 어느 곳으로 불든지 간에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김흥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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