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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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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입니다 "

1. 들어가는 말

어제 학생회에서 선생님들이 찬양 연습을 한 후에 학생들을 데리고 영화 구경을 가셨다고 하던데,

선생님들이 같은 또래의 학생들을 데리고 가면 그리 큰 문제는 없겠지만,

부모가 자녀들을 데리고 극장을 갈 경우에는 종종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국처럼, 극장 하나에 영화 한 편을 상영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극장을 일단 들어가면,

보고 싶은 영화가 다 제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보고 싶은 영화는 'Gladiator' 같은 전투 영화인데, 엄마가 보고 싶은 영화는 다릅니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도 좀 흘리고 코가 찡해야 "야 그 영화 참 잘됐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또 다릅니다. 그것도 중학생이냐, 고등학생이냐에 따라서,

또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서 좋아하는 영화가 다릅니다.

한 가지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이와 같이 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점을 들어가도 좋아하는 음식이 다 같지가 않습니다. 관심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이, 생각하는 머리가 다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신 후,

신적인 경험을 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이 그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내려오시자,

제자들의 관심이 갑자가 바뀌어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18장의 말씀은 갑자기 관심의 대상이 달라진 제자들이, 이제 그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예수님께서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입니까?(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과 함께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고 다짐했던 그 제자들에게 고생이나 죽음 등의

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출세', '으뜸'이라는 단어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적인 모습을 내 보인 예수님께서 조만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새로운 정치가, '메시야'로

등극을 하실 텐데, 그렇게 되면 누가 일등공신이 되고, 누가 이등공신이 되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 펼쳐질 줄 알았던 명예와 권력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과 얼마 전에 다짐하고 결심했던

'생사고락'의 맹세조차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 윱求?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입니까?"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예수님 주변에 서 있던 한 어린아이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제자들 한 가운데로 데리고 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어떤 뜻을 까요?

성도님들은 이 3절의 말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아야 된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말씀의 뜻을 4절에서 다시 설명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결국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가운데로 부르시고 "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라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결국 "어린이=겸손"이란 등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어린이를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오늘 어린이를 통하여 '겸손'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내가, 그리고 여러 성도님들이 생각하시는 겸손과 어떻게 다른지,

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겸손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마음 문을 여시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2. 몸 말

1) 겸손은 무릎을 꿇고 아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의 첫 번째 의미는 '낮아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 비하'라고도 말합니다. 한문으로 겸손을 써 보면 그 뜻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겸손' 할 때의 '겸(謙)손할 겸'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을 누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제넘게 참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의 범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교문화권인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이 겸손을 대인이 갖는 대단히 중요한 미덕이라고 가르칩니다.

'겸손'을 영어로는 'Humil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과 한층 더 가까운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 'Humility'라는 말?'흙'이라는 라틴어 'humus'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곧 'Humility'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땅에 묻는다', 혹은 '자기를 땅에 붙인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땅에 묻기에,

절대로 자기 과신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도 자신을 드러내 놓지 않는 낮은 자세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신의 선행이 의도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합니다.

자기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보다 더 높아지기를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신을

드러 내놓지 않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바로 겸손할 줄 몰랐던 아담과 하와가 교만으로 인하여 저지른 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꾀임에 빠져,

사람이 신이 되려 했기에 그만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 3장에서는 창세기 3장에서 드러났던 인간의 교만으로 인한 범죄의 반대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람이었음에도 신이 되길 원하여 범죄 하였지만,

마태복음 3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이 인간이 되는 사건을 세례 요한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 사건의 주인공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 분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반대인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죽으시기까지 자기 자신의 신적 모습을 낮추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가장 에러(실수)를 많이 범한 선수는 1900년도 시즌에서 120게임에 출전해서

91번이나 실수를 범한 뉴욕 자이언트 팀의 Charles Hickman이란 선수였습니다.

그에게는 나쁜 버릇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수비를 할 때 다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볼을 잘 잡지를 못하고 번번이 놓치곤 했습니다.

항상 피아노 다리처럼 뻣뻣하게 서서 수비를 하는 그 선수에게 사람들이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은 '피아노 다리 히크맨(Piano Legs Hickman)'이란 별명이었습니다.

다리를 굽힐 줄 모르면 평범한 땅볼도 쉽게 놓칩니다.

1975년에 은퇴한 John Wooden이란 사람은 미국 농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코치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UCLA 농구팀을 10년 동안 챔피온 자리를 연속해서 머물게 한 명 코치였는데,

그는 훈련을 할 때나 게임을 할 때, 빼 놓지 않고 선수들에게 강조한 한 가지 표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절대로 드러내 놓지 않고 경기를 하는 것(selflessness)'이었습니다.

아무리 우수한 기량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농구는 5명이 함께 뛰어야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드러내 놓지 않는 것, 무릎을 구부리고 사는 것,

자기 자신을 땅에 붙이기까지 낮추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겸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한 것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 겸손의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지혜서인 '잠언 16:18'에서는 "겸손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2) 겸손은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는 사실은 사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살지를 못해서이지, 이론적으로는,

논리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의미에서의 겸손, 곧 자기를 낮추고, 비하하는 겸손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겸손이긴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의 진정한 의미는 앞에서 말씀드린

이 첫 번째 의미의 겸손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한 어린아이를 부르시고 "이 어린아이처럼 겸손하라"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가 들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두 번째 의미, 기독교만이 가지는 겸손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이 두 번째 의미로서의 겸손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겸손=죄인'의 등식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등식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에서의 겸손=죄인이라는 등식을 누가복음 5:8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시몬 베드로는 얼른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을 순간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예수님의 발아래 자기 자신을 할 수 있는 한 낮춘 후에 그는 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낮춘 것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할 수 있는 한 자세를 낮추는 겸손한 모습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겸손의 가장 최상급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이 최상급의 겸손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할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죄인으로서의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자만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더불어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두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성전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끄러워하며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후에 누가복음 18: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리가 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기독교의 구원은 바로 '죄인으로 자신을 고백하는 겸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죄인으로 자신을 고백하는 겸손'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그런 의미에서 겸손의 반대인 '오만'은 그 자체가 바로 '죄'라고 했습니다.

그 오만은 '하나님의 사랑'과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자 어거스틴에게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은 그 친구의 물음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는 없다"고 대답하고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그리고 셋째도 겸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 유명한 지성인이요 성자요, 학자인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말하라면

'겸손'밖에 없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겸손이야말로, '자신의 모습이 죄인인 것을 알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죄인으로 자기의 모습을 보는 영혼들을 만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죄인임을 거부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절대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3. 맺 는 말

한국의 지도자 중에서 조만식 선생님은 손에 꼽힐 만큼 존경을 받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평양의 산정현 교회의 장로님이시기도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 산정현 교회에서 봉사할 때,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계실 때, 주기철 목사님은 학생으로 조만식 장로님의 가르침을

받은 선생과 제자의 사이였습니다. 학교로 보면 조만식 장로님이 선생님이고 주기철 목사님이 제자이지만,

세월이 지난 후 그 두 분이 산정현 교회에서 만났을 때에는 제자가 담임 목사가 되었고, 선생님이 장로님이 되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주일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조만식 장로님이 예배당 안에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밖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예배시간에 늦으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설교 중에 늦게 들어오셔서 자리에 앉으려는 조만식 선생님을 불렀습니다.

"조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보통 사람 같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화를 벌컥 내면서 밖에 나가든지, 욕을 하고 호통을 쳤을 텐데, 조만식 장로님은 그대로 서서 설교를 들었답니다.

설교를 마친! 주기철 목사님이 "거기 서 계신 조만식 장로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부탁드렸더니,

고개를 푹 숙인 조만식 장로님이 강단에 올라오시더니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미련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답니다.

기도를 시켰던 주기철 목사님도, 기도를 듣고 있던 교인들도 조만식 장로님의 겸손한 태도와 기도에 감동이 되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결코 자기를 낮은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낮혀진 자리를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흑인 인권운동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설교 중에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에 조금 알려졌다고 나를 성자나 위인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모든 하나님의 자녀처럼 죄인입니다."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는 겸손이

마틴 루터 목사님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이 미덕일 수는 있지만, 미덕만으로 구원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고개를 낮추시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도 필요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겸손을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지경까지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자의 겸손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죄인'의 경지까지 낮추셔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에서 큰 자'가 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김종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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