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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풍가운데 찾아 오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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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풍가운데 찾아 오시는 예수님
마가복음6:45-56

우리 열린교회가 이 땅에 설립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막11:17)”이라 하셨는데 그동안 이곳에서 성도님들이 나와 기도하여 많은 응답을 받았을 줄 믿습니다. 늘 새벽마다 나와 기도하시던 조권사님이 85세가 되었습니다. 새벽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기도하셨는데 한 4개월 전에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심각한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방을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을 드리지만 치료되지 않아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늘 긍정적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셨는데 얼마 전에 심방을 가니까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몇분 간격으로 다가오는 고통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저도 안타까워 계속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심각한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역풍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건강의 역풍이 다가옵니다. 경제의 역풍이 다가 옵니다. 신앙의 역풍이 다가옵니다. 뜻하지 않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하여 2만 여명을 먹이는데 열심히 수고를 하였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 최대의 이름이 드러난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이 일어나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요한 복음에는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4-15)” 이들은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경제 대통령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대중들은 예나 지금이나 빵을 해결해주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진정한 빵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정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넉넉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2만 여명이 모여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이 고조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1.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데 만나는 순풍과 역풍

1)말씀에 순종하여 떠남
그래서 예수님은 서둘러 군중을 해산시키고 급히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였습니다. 재촉하였다는 말은 강권하였다는 말입니다. 제자들도 은근히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권력을 잡아 보지 않은 사람은 권력을 매력을 잘 모르지만 조그마한 권력이라고 잡아 본 사람은 그 매력이 대단한 것입니다. 요즈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의 피터지는 권력 다툼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장차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에게 서로 줄을 서지 않습니까? 제자들도 군중들에 의해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들도 중용되어 권력과 명예, 부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매력적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른 목적이 분명합니다. 함께 있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권세로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몰아세워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벳새다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가신 것이 아니라 홀로 남아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대도 날이 저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배를 타고 나아갔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즉각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2)순풍을 만남
순종하는 그들 앞에 처음에는 순풍이 다가 왔습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잘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콧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대단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큰 닻에 바람을 한 아름 안고 봄 소풍 가듯 즐겁게 갔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어부이니까 아주 익숙한 길이고 능숙한 일입니다. 예측 가능한 항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항해이니 좋은 일이 앞에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이렇게 순풍에 돛단 듯이 항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가정이 평안합니다. 자식들이 기도한대로 잘 되어 갑니다. 기업이 잘 되어 가고 직장에서 보장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건강합니다. 특별한 염려가 없습니다. 큰 장애물 없이 평탄합니다. 대과 없이 편안히 잘 삽니다. 그러 지금과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 우연히 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주신 복을 타락의 도구로 누리지 말고 더 큰 축복의 도구 은혜의 도구로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교만해져는 안됩니다. 자신이 항해의 선장인 것처럼 인생의 주인이 자신인 것처럼 오해하고 오만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기도하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갑자기 역풍을 만남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순풍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배가 바다 가운데에 갔습니다. 인생의 중년의 때입니다. 이제 막 활짝 꽃피우려고 하는 때입니다. 이제는 살만하다고 한숨을 돌릴 때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거슬렸습니다. 갑자기 역풍이 불어 왔습니다. 인생 항해에서 역풍을 만난 것입니다. 경제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건강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신앙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자녀의 역풍이 불어옵니다. 가정에 역풍이 불어옵니다. 인간관계의 역풍이 다가 옵니다. 지난 주 심방을 갔는데 딸이 시집을 가 잘 살았는데 갑자가 우울증이 와서 결국 이혼을 당하고 홀로 살면서 정신이 이상해져 가고 있다고 기도를 부탁하시는 성도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시집 잘 갔다고 기뻐했는데 예측하지 못한 사이에 역풍이 불어 온 것입니다. 이런 역풍이 불어오면 이제까지 잘 가게 했던 돛이 오히려 장애물이 됩니다. 익숙한 경험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능숙한 지식도 역풍을 푸는데는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조권사님, 아드님이 신경외과로는 권위 있는 의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심방을 가니까 “어머님이 고통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학적 지식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안타깝게 고백하였습니다. 어머님이 목사님이 기도해 주시며 나을 것이라고 하니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인생에 다가 오는 역풍 앞에 지식도, 돈도, 권력도 아무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제 한화그룹 회장이 유치장에 갇힌 것을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드넓은 가회동 저택에 살다 하루아침에 4평밖에 안 되는 좁은 유치장 방에 홀로 갇힌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밥과 미역국, 나물, 김치가 전부인 `초라한' 식사입니다. 33개 계열사, 2만 5,000여 직원을 거느리고 작년 매출 20조 5,530억원을 올린 재계 9위 대기업그룹의 總帥총수입니다. 영향력으로 치면 대한민국에서 100명 안쪽에 드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돈과 권력과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발생한 인생의 역풍 앞에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큰 멍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일반 소시민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언론에 보도되어 심각한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 돛을 내리고 손으로 괴롭게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괴롭게 노를 저어도 한 치 앞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역풍은 순식간에 잠자기 않았습니다. 끝없이 다가 왔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어느 때까지 사투를 벌이는 노젓기가 이어집니가? 밤 4경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인의 밤 시간 구분법입니다. 유대인은 3등분했지만 로마인의 4등분했습니다. 일경은 오후 6시에서 9시, 이경은 오후 9시에서 12시, 삼경은 새벽 12시에서 2시,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까지입니다. 로마에 네로 치하에서 수많은 고통과 압제를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쓴 복음서이기 때문에 로마인의 시간 구분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붙들려 십자가형을 당하고 아버지가 붙들려 사자의 밥이 됩니다. 하루아침에 끝나는 역경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버렸는가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버렸다고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으로 절규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80 살로 계산하면 60대까지 고생고생 한 것입니다. 인생의 3/4을 고통과 절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믿는 사람만 피하여 가지 않듯이 역경은 누구에게 다가 옵니다. 요셉이 역경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대단한 사랑을 받던 아들이었지만 갑자가 역경이 다가와 죽음의 위기를 당하고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다윗이 이런 역경을 만났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하루 아침에 백성들의 인기를 얻어 여론 조사에서 늘 1위를 차지했는데 하루 아침에 사울의 시기를 받아 겨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숨어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욥이 이런 역경을 만났습니다. 동방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자식들과 다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있던 모든 재산 다 잃어 버리고 자식들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 고난의 문제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때가 다가 오면 누가 도와 줄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죽음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가 우리 예수님을 정직하게 만날 때입니다. 영안이 열릴 때입니다. 사람은 풍랑을 통해 멀리 보는 눈이 열립니다. 세상의 권세와 부귀 영화, 지식이 얼마나 부질 없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죽음 앞에 국무총리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죽음 앞에, 자존심과 명예,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멀리 볼 때는 밝을 때가 아니라 어두울 때입니다. 먼 별을 볼 때는 밝은 대낮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두움이 임할 때입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은 유난히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 천국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잘 될 때 세상 부귀 영화를 더 구하지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개인마다 영적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실제의 풍랑이 살아지기 전에 내 마음 속의 풍랑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풍랑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안에 태풍을 잠재우는 예수님이 계시면 세상의 풍랑은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안을 뿐 아니라 영향력도 별로 미치지 못합니다. 유리 속의 물은 아무리 큰바람이 불어 와도 파도처럼 출렁이지 않습니다. 작은 동전이 우리 눈 앞에 가리면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그 동전을 거둬내면 푸른 초장이 보이는 것입니다. 문제만 보면 문제만 보이고 터널 속에 들어가면 절벽만 보이는 것입니다.

2. 역풍 속의 우리를 보고 계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어릴 때 아이들을 앞에 보내 놓고 어떻게 하는가 봅니다. 아이들은 한참 가다 부모가 없는 것을 보고 웁니다. 이 때 부모들이 아이 앞에 나타나 “까꿍”하며 아이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부모의 품안에 안깁니다. 제자들끼리만 보냈지만 우리 예수님의 시선이 그들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었습니다. 우리의 남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막막한 대해 같은 세상을 말씀을 붙들고 가는 우리의 외로움을 알고 계십니다. (왜 나만 홀로 당하는 고난이라고 슬퍼하지 말아요. 찬양)

3. 역풍 가운데 있는 우리를 찾아 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나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신 분이 찾아옵니다. 인과의 법칙을 초월하신 분으로 찾아 오십니다. 위기의 순간, 우리 주님의 때에 외면하지 않고 찾아 오십니다. 40년의 광야 훈련을 받은 모세에게 하나님을 찾아 가셨습니다. 모세가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보고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찾아 오셨습니다. 한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의 역경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의 고난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고 있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히 스치듯 걸어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보일 때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은 제자들이 자기들 배로 초청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며 예수를 향한 전적인 신뢰를 보일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히 11:6).

4. 역풍 가운데 두려워하는 제자들(유령 소동)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49절을 보십시오.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고함치며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의 심적 상태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모습을 실체가 없는 환영으로 본 것입니다. “....인가 하여”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내린 자연적인 결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경험에 따른 추측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던 예수님이 갑자기 시. 공을 넘어 물위로 나타나니까 두려워하며 유령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50절에 보십시오. 다 예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미 4:35-41에서 광풍 제압 기적을 경험한 제자라면 적어도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 침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령처럼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값싼 위로, 싸구려 축복으로 찾아오는 분이 아닙니다. 공포와 놀램, 답답한 가슴으로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실제적 능력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다가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무관심하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때로는 구름처럼, 폭우와 폭풍으로 찾아오십니다. 가장 깊은 밤 새벽 3시에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전혀 기대하시 않은 시간에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생의 새 역사를 쓰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5.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역풍을 만난 제자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거 말씀하십니다.
1)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라는 말씀입니다.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용기와 위로를 더하는 강한 명령입니다. 이제(현재형) 더 이상 바람과 유령의 악몽에 짓눌리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담대히 떨쳐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해결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바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해결해 주시고 나는 유령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2)나라는 것입니다.
유령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너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 진정 평화와 안정을 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내니”(에고 에이미, It is I)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모세가 하나님이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출 3:14). 예수의 “나” 선언은 곧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으로서의 예수님의 존재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요 8:58). 이 말씀은 심한 두려움에 놓여있던 제자들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람과 풍랑과 지구의 중력까지도 정복하시고 바다 위에 우뚝 서 계신, 그분이 바로 제자들이 믿고 따른 자신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모든 공포와 유혹을 물리쳐주실 수 있는 만유의 주, 메시아이심을 “내니”라는 그 한 마디를 통해 전달하신 것입니다.

3)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무서워하는 상태를 중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단호한 명령입니다. 이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으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홀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운 것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운 것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원하는 목적지까지 이르게 만드십니다.

4)주님을 배에 모심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5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배에 모십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일순간에 바람이 그쳤습니다. 내려 놓는 것입니다. 주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도 내려 놓고, 부도 내려 놓고, 건강도 내려놓고, 권세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도 내려 놓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 이루려는 것을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 항해의 주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평안이 찾아 옵니다. 역풍이 순풍으로 변합니다. 인생의 주인이 우주의 주인이, 삶의 메시아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6. 믿음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제자
이 때 이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빠져 있지만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이 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워 했습니다. 점점 물 속으로 빠져 갑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이 때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말씀합니다. 오늘 51절에서는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것을 심히 놀랬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믿음이 없어 놀랩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둔하여서입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치니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4:33)” 오늘 역풍 가운데 찾아 오시는 예수님은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닙니다. 이 세상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풍 가운데 찾아 와서 인생의 파고를 잔잔케 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약속한 천국으로 이끄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가 만난 인생의 역풍에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도 말씀합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007.5.13/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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