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람, 배척, 불신의 함정
본문
마가복음6:1-5
아내가 자꾸 교회를 나가자고 해서 교회를 취미 삼아 다니는 성도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와 목사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는데 성경 이야기를 하면 졸음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졸면서 “끄떡 끄덕 아멘 아멘 빨리 끝내 주세요. 빨리 끝내 주세요.”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답니다. 모임있으면 교회를 빠지며 그렇다고 권사님이 된 아내 체면도 있고 해서 교회에 나가 주었는데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일학교 학생에 자신에게 전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저씨, 오늘 돌아가시면 천국 갈 수 있겠어요” “글세다.” “넌 천국이 있다고 믿느냐?” “예,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세요.” 그래서 이 성도님이 아이에게 물었답니다. “너 하나님 보았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그곳을 알려 주면 네가 너에게 만원을 주겠다.”라고 했답니다. “내가 천문학 박사데 망원경으로 20년 동안 우주를 관찰했지만 하나님 없더라. 영혼이 어디 있어. 심장에 있냐? 뇌 속에 있냐? 피 속에 있냐?”
아이가 한참 생각하다 “그럼 20년 동안 하늘을 보면서 망원경으로 바람 보았어요.”“망원경으로 어떻게 바람을 볼 수 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아이는 “그럼, 아저씨 바람이 세상에 없겠네요. 망원경으로 볼 수 없으니까”
“아저씨 내가 하나 물어 보겠는데요. 권사님 있지 않아요. 너무 교회에서 좋으신 분이잖아요. 그 권사님 사랑해요.” “암 그렇지.”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 있어요. 간에 있어요. 머리에 있어요. 배에 있어요.” “글세” 이 때 아이는 지혜 있게 말했답니다. “좋아요. 아쩌씨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저한테 얘기해주시면 아저씨한테 2만원을 드릴께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실증주의, 실용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꼭 보여야만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당시에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하자 손으로 만져 보아야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고 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무리 세상에 있는 달과 산과 물을 가르쳐 준다고 믿겠습니까? 믿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습니까? 모를 따름입니다. 사람의 머리가 대단한 것같지만 참 약합니다. 체온이 1도가 오르면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또 1도가 오르면 침상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3도가 오르면 인사불성이 됩니다. 4․5도가 오르면 일순간 목숨이 끝나고 마는 것이 인생입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보지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믿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미지근한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이신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예수 믿으면 정말 천국에 가는가?” 이런 회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적 회의를 벗어나 확실한 믿음으로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놀람이 의심이 아니라 믿음으로/편견 뛰어 넘김/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
예수님이 고향에 가셨습니다. 출생지는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나 30년 동안 예수님이 자라나신 장소가 나사렛이기 때문에 고향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사시던 곳입니다. 이곳에 어릴 때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릴 때 모습을 다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곳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쉬시려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선포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 가르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참석했던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입니다. 회당의식에 대하여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면 회당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개인기도를 합니다. 그 다음 '쉐마'(신 6:4-9;11:13-21)를 고백하고 열 여덟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합니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합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합니다. 그 날 바로 예수님이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아마 동네 사람들이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정통 랍비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어리둥절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때 읽은 말씀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눅4:17절 이하에 보면 이사야 61:1,2절을 일고 설교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으로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은혜와 자비를 얻기 위해 마음 문을 열어 놓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 즉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하시는 분, 즉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킬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 바로 '희년'(레25:8-55) 50년 만에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선포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 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아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로마의 압제로부터 신음하던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일제시대때 해방의 날을 기다리듯이 이들은 이 메시아의 날을 유일한 희망으로 기다리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주인공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12명의 제자를 데리고 와서 이 혁명적인 말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들은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오늘 날도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첫 번째 반응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란 것입니다. 원문의 뜻은 “정신을 잃다, 공황, 충격, 놀람으로 일격을 가하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진정한 자유를 주실 분이 예수님라고 하니 얼마나 놀랄 만한 일이겠습니까? 오늘날 말하면 예수님을 이 메시아로 믿기만 하면 인간의 가장 숙명적인 난제인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 평안과 안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적 육적 질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가 출처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이것을 배웠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지혜와 권능이 누구에게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이냐 아니면 사단이 준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30여 년 성장 과정을 지켜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에 대하여 경악스러움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5장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도 믿었고, 12해 혈루증 앓는 여인도 믿었고, 12살 딸의 죽음 앞에 선 회당장 야이로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달랐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직접 들었지만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직접 목격하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권능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로서냐 사단에게로서냐?”라는 의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입니다. 예수의 초월적 권능에 대해 신앙인은 놀람을 “무릎”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비신앙인은 놀람을 “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왜 의심으로 받아들입니까? 어디에서 배우고 누구에게 나왔냐는 것은 결국 권위 문제입니다.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비타민의 효용을 선전하면 모두 그것을 믿고 비타민을 먹습니다. 과학의 권위, 이성의 권위는 믿겠는데 하나님의 권위, 신앙의 권위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주장처럼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놀람은 믿음으로 발전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6)”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요17:5) 세상을 창조하였고, 아버지를 본자는 나를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소망을 주는 말씀이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을 진정 믿고 나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인 것을 선포합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니까 병든 자를 고치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시고, 바다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며 우주 질서를 다스리는 하나님으로서만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말을 못믿겠으면 하는 것을 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으려면 고정관념과 편견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익힌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성을 초월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의 고정관념은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대하여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혈루증 여인을 고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성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신성에 대하여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이 사람이라고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눈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2. 축적된 경험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예수님 주변의 경험이 배척이 아니 수용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존재에 대한 반응입니다. 첫 번째 반응이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반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셨으면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자녀의 이름을 부를 때 아버지의 이름과 관련지어 부르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예수님 공생에 이전에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욕적인 언사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전통적 관습에 의하면 비록 아버지가 생존하지 않은 때에라 하더라도 그 자녀를 그의 어머니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이 용인(容認)되지 않았다고 합니다(Taylor). 따라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에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호칭하는 것으로써 사생아를 지칭하는 경멸적 표현이라는 점을 들어 예수를 경멸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Orgen). 아버지가 불확실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신분적으로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생아 인간 예수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남편이었다고 반응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직업이 목수라는 것입니다. 직업이 목수인 그가 뭐 메시아가 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신분이 아니냐?” 또는 “이 자가 랍비라 칭하면서 이적을 행하고 돌아다니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라는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무로서 일하는 기술자라는 말입니다. 경멸합니다. 멸시 천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분에 대하여 비아냥 거리는 것입니다. 한낱 목수에 불과한 사람이 메시아라고 말한다고 웃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계 걱정을 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반응은 “야고보와 요셉과...그 누이들”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줄 형제들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가깝기 때문에 위대함을 보지 못합니다. 친숙하게 지냄이 경멸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겪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함정에 빠뜨렸다는 말입니다. 넘어지게 했다는 말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올가미를 씌우고 예수님의 언행에 대하여 성을 내고 불신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경험이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배척하다”는 뜻은 “넘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30년의 경험이 오히려 그들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게 하는 넘어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경험의 덫에 걸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자신들은 넘어졌습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진정 메시아로 믿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경험으로 예수님을 진정 믿고 따르는데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어느 교수님을 만났는데 텔레비전에서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비리에 대하여 나왔다며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을 통하여 부정적인 경험도 할 수 있고 긍정적인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다는 말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에 대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 주변 사람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경험까지를 다 해석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단회적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령교수가 '이성'을 넘어 '영성'으로 나아간다고 동아일보에 보았습니다. 아주 지적인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종교를 문화의 일부로 인식해 오신 분입니다. 딸 민아(47) 씨가 미국에서 변호사로 검사로 활동하였는데 갑상샘 암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 차례나 암이 재발했다고 합니다. 유치원에 들어간 손자가 특수 자폐 아동으로 판명이 나면서 지난 10년간 울었답니다. 울지 않고 잠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고 그는 고백했다.딸이 망막이 파열돼 시력을 잃었답니다. 딸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적적으로 치유의 능력을 체험받았답니다. 이것을 30분 동안 교회에서 간증하였는데 아버지는 딸의 삶을 보면서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못 해준 것을 해준 분이 있다면 대단한 것 아니냐"며 믿기로 했답니다.
경험을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목회자가 무슨 잘못된 일을 하였다는 보도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마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오히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더욱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은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와야만 구속사역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에 대한 경험을 통해 실족하고 또한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경험이 신앙을 더욱 돈독하게 할 수 있지만 경험이 무감각하게 합니다.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삶의 환희가 없습니다. 경험이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삶을 꺼꾸러 뜨립니다.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낙천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 중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먼저 죽을까요? 미네소타의 마요크리닉에서 의사들이 3년에 걸쳐 800명을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빨리 죽었답니다. 그러면 다시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낙천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빨리 늙겠습니까?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빨리 늙겠습니까? 늘 “나는 늙었어.” “기억력이 나빠졌어.”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등과 같은 메시지를 자신에게 보내는 사람과 “나는 아직도 이팔 청춘이야” “기억력이 나빠졌지만 아직도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수 있어” 등과 같은 메시지를 자신에게 보내는 사람 중 어느 부류의 사람의 신체가 빨리 늙겠습니까?
1979년 엘렌 랑거 교수가 75세 이상의 노인 남성들을 선택해서 실험을 했답니다. 두 부류로 나누어 일주일 동안 시골 휴양지에 보냈답니다. 한 부류는 20년 전의 생활 환경을 마련해 놓고 살게 했고 한 부류의 사람은 시간대를 바꾸지 않았답니다. 그 결과 스스로 젊었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노인들은 기억력과 손재주가 향상되고, 청력과 시력도 향상되고 뻣뻣한 관절도 부드러워졌다고 합니다. 피오나 해롤드가 지은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멘토가 된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어떠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보는 방식을 바꿔라”라는 책에 의하면 보는 방식을 조금만 바꾸면 삶 전체가 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더 나아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는 방식의 차이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강정형 사고와 단점형 사고로 나누어 강점형 사고를 가지라고 합니다. 문제보다는 기회에, 약점보다는 강점에, 불가능한 것보다는 가능한 것에 관심을 집중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나쁜 쪽에 쏟는 관심, 즉 단점형 사고를 줄이고, 좋은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우리는 강점형 사고를 가지면 저절로 에너지와 열정이 솟아나고 삶이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험도 걸림돌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3. 근본적인 태도를 불신이 아니라 믿음으로/고정관념 뛰어넘기
이들의 이런 태도를 보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고향 사람들과 식구들이 이미 알고 경험한 것으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 조건과 편견으로 인한 고정관념입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과거 사생애에 대한 지식만을 근거로 한 고정관념입니다. 진지하게 예수님의 지혜와 권위에 대하여 숙고하지 않습니다. 피상적 경험으로만 단정을 해 버립니다. 주관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알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육적인 기준에 고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메시아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인데 과거 시각에 인식은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을 보는 눈이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세상적 견해를 따라 예수를 안 자들이 바로 고향사람들입니다. 예수에 대한 피상적 지식이 고정관념이 되어 오히려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풍습에 길들여 지면 하나님의 견해보다 세상의 견해에 익숙해 지면 믿음보다 고정관념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익숙함, 편리함, 편안함에 길들여지면 우리도 그렇게 고정관념대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고정관념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을 발명한 것은 지배자가 정치적 의도에서라고 말합니다.(정치적 기만설) 공포가 신을 창조하였다고 말합니다.(공포기원설) 마치 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생활에 유용한 허구라는 것입니다.(허구설) 신은 행복을 구하는 인간의 소망(所望)이며 상상으로써 그 소망이 충족된 것(환상설)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경험적 사실의 관찰이나 실험만으로 설명하려 하고 초감성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실증주의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경험되어지는 확실한 것이 아니면 진리가 될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성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은 합리적인 이성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시대적인 인물이라고 하며 사상은 다른 사람들 보다 앞섰고, 재능은 다른 사람들 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미신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증명되어서가 아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 좀더 어두움을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나쁜 사람이 법률이 없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컨닝하는 학생이 감독이 없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들은 원마음이 하나님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증거해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스스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직무상 무신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학자의 간판을 달았고 교육자의 직함을 가지고 믿으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있으면 받아들인다고 하다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증명해 주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데도 증거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무신론, 유물론, 자연론,. 불가지론, 실증론, 범신론,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버립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지혜와 권능의 출처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존경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수에 의해 길들여진 고정관념입니다. 대세를 거역하기 힘든 것입니다.
당시 보편적으로 알려진 격언으로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친밀함이 경멸함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존경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보편심리입니다. 대통령이 되었어도 친구이기 때문에 사석에서는 막말을 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신을 세워주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의 문제입니다. 한 번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고정관념이 변화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여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왜곡되게 해석해 버립니다. 평생 제자리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회사 사장이 되었는데도 예전에 자기 밑에 있던 일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닫힌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불신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기 때문에 지금 귀신을 내어 쫓고 질병을 고쳐 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과거를 잘 알기 때문에 변화된 모습을 보고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믿는 자를 안수하여 질병을 낳게하는데도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 있는 축복을 스스로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곳에서는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받을 믿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소수에게만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이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기”(대하 16:9)를 기뻐하십니다. 기적이 있는 곳에 신앙이 있고 신앙 없이는 기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불신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신앙의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에 ‘기이한’ 사람들로 남습니다.
지혜와 권능을 가진 고향 사람 예수님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인 도리어 배척하다니 정말 기이한 불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인간적인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로 예수님이 배척된다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예수님은 끊임없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고향에서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메시아의 사역을 접은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에 촌에 다니며 두루 가르쳤습니다.
한 청년이 어느 목사님에게 찾아와 하나님은 없다고 말했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자네가 하나님이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자네가 하나님인가? ”라고 물었답니다. “자네 지금 북경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가?” 청년은 “모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때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는 자네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안단 말인가?”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 이해하고 믿는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의 말씀과 함하신 일을 보고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2007년 4월 15일 /열린교회/ 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