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광풍 다스리기
본문
마가복음5:1-20
어느 집사님이 사업을 하면서 사업상 술을 먹지 않을 수가 없어서 술을 드셨답니다. 그런데 아주 친한 친구 집사님도 마찬가지였답니다. 나이가 들자 건강이 쇠약해지고 믿음까지 약해졌답니다. 이 두 분이 술집에 앉아 주님께 불만을 늘어놓았답니다. 한 집사님이 “내가 비록 사업상 술을 마시지만 나처럼 주님 일에 충성한 사람 나와보라고 해!”라고 말하니까 옆에 있는 집사님이 “나도 마찬가지야! 난 개척교회를 다섯 개나 세운 사람이야, 그런데 주님께서 왜 나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는거야. 장로도 안 시켜 주고” 그러다가 한 집사님이 먼저 술로 인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러자 정신이 들어 술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였답니다. 자기 스스로 다스릴 수 없으니까 먼저 가신 집사님과 늘 술을 먹던 술집 주인에게 술을 끊었다고 공포를 했답니다. 그런데 작심 삼일이라고, 며칠이 되지 않아 술집에 와서 술 두 잔을 시키더니 돌아가신 집사님과 늘 하던 방식대로 두 손으로 두 잔을 들고 “쨍” 부딪히며 “위하여”하며 마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왜 두 잔을 그렇게 드십니까?”라고 물으니 “한 잔은 먼저 친구의 술잔을 내가 대신 마셔준 거라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오늘만 마시고 난 술을 끊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또 왔더라는 것입니다. 술 한잔을 시켜서 술집 주인이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이제 끊어야지요? 술끊기로 약속했지않습니까?” 라고 말하자 그 집사님이 “결심했습니다. 난 오늘부터 술 끊기로 했습니다.” 주인이 의아하여 “그럼 왜 또 술 한잔을 시켰습니까?”라고 말하자 “나는 술을 끊었는데 먼저 간 친구가 도무지 술 끊을 친구가 아니라 그 친구 거 마시는 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대로 놓아 두어서는 안되겠기에 부인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답니다. 목사님은 집사님에게 권면하여 술을 끊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부인 집사님과 약속을 하고 술만 마시면 곧 바로 연락을 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수요일인데 집사님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집사님이 대낮부터 술을 드신 것입니다. 목사님이 기습 심방을 하였답니다. “술 드시지 않기로 목사와 약속했지 않습니까?” 집사님이 “깜빡 잊었습니다.” “무엇을 잊었다는 것입니까?” 그 때 집사님이 “술 마시기 전에 방문을 걸어 잠근다는 걸 깜빡 잊었다고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목사님이 “집사님! 제발 술을 끊으세요. 신문에 못보셨나요? 술을 마시면 간암 발병률이 몇 배나 높다잖아요?” 그 때 “목사님! 밤마다 무서워서 잠을 통 이룰 수가 없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자면 밤이면 밤마다 침대 밑으로 귀신들이 우글우글 몰려들거든요.” 그 때 목사님이 “그렇다면 침대다리를 모두 잘라내고 주무시면 되겠네요.”라고 했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참 연약합니다. 무엇이든지 중독이 되면 아무리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제가 소개한 집사님처럼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술 뿐 아니라 담배, 마약, 놀음 중독, 일 중독, 돈 중독, 성 중독 등 무엇이든지 중독이 되면 그것들은 광풍이 되어 마음을 지배해 버리고 사람을 그것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건강한 마음을 삼켜버리는 이런 광풍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1.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마음에 일어나는 잔잔한 파도는 자신 스스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야단을 맞아 마음이 일렁이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습니다. 학기 말 시험 잘 못 보아 마음 상한 것 시간 지나면 정상적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지배해 버리는 중독증은 자신 스스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을 보면 인터넷이 없으면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소모적인 일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인터넷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라고 해도 역시 쓸데없는데 사용하고 하루라도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어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저희 집 아이들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 주기 위해 지한 한 주간 저녁에 교회에 기도하러 오면서 줄을 제거해 놓았습니다. 한 주간 내내 교회에 나와 저녁기도를 하고 교회에서 자고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인터넷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 인터넷을 하라고 했는데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외부의 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이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그의 마음을 온통 귀신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림을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체에 주는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에 주는 영향입니다. 티센(Thiessen)은 전자를 억압(oppression)이라고 하였고 후자를 사로잡힘(possession)이라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림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악령이나 귀신이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희생자를 자기 마음대로 완전히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에 대한 자기 통제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권을 의미하기 보다는 지배권입니다. '침입'이며, 크고 작은 정도의 지배이지 결코 '소유'개념이 아닙니다. 귀신은 사람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이든, 어떠한 행위이든,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바로 그곳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귀신이 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정신적 광풍에 매몰되어 광인이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크게 네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 정신 장애적 증상들과 유사한 것들이 나타납니다. 정신 이상이 있다고 해서 다 귀신 들린 것이 아닙니다. 정신 이상자들이나 귀신들인 사람들을 보면
(1)지각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자극을 받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극을 받은 것 같은 반응을 일으키는 확각 증상이 나타납니다. 환청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상인에게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데,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 보아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리 나라 대통령이 되라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환시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상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가 보이는 증상입니다. "벽에 피가 묻어 있다. 귀신이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환촉, 환취 등등의 환각 증상이 나타납니다.
(2)사고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망상현상입니다.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감시망상에 사로잡힙니다. " 안기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관계망상에 사로잡힙니다. " 저 두 사람이 수덕거리는 것은 나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체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간이 썩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힙니다. "대통령이 나를 중용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도청망상,(다른 사람 또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자기를 조종한다는) 피조종 망상, (자기가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는) 조종망상, 텔레파시망상 등에 사로잡힙니다.
(3) 말하기 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상관성이 결여됩니다. 묻는 말에 엉뚱하게 대답합니다. 일관성 결여됩니다. 말을 하는데 앞뒤가 잘 맞지 않습니다.
(4) 행동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혼잣말을 합니다. 이유없이 어떤 행동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자기 머리로 들어온다며 못 들어오게 머리를 반복적으로 흔들어 댑니다.
이런 정신 병은 ①뇌의 이상, 신체적 이상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②신체적 질병으로 인한 이온들의 불균형 또는 독성 물질의 과부하 등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③심리적 원인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잇습니다. ④극도의 생리적 박탈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⑤약물남용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히로뽕,대마초,각성제 등등)
그러나 귀신 들린 것은 영적인 원인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죄의 행동이 통제할 수 없도록 나타납니다. 귀신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인격과 행동, 사고와 언어를 귀신이 지배해 버리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죄악된 행동이 나타납니다. 자학자가 되게 해 버렸습니다.(5) “…돌로 제 몸을 상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사탄이 자학과 자살을 주도합니다. 다수의식(多數意識)의 종이 되게 해 버립니다(9).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합니다. '레기온'은 6,000명에 해당되는 규모의 그 당시 부대를 칭합니다. 자신의 고유명사인 이름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다중 인격자가 됩니다. 난폭한 사람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3). 제어할 수 없는 난폭성, 광폭성, 무법성, 무질서성, 파괴성이 나타납니다. 부끄러운줄을 모릅니다(15).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눅 8:27)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미신적이고 사이비 종교적 접촉을 합니다. 귀신이 그를 붙잡아 버립니다. 누가복음에는「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눅 8:29)라고 하였습니다. 상습적으로 노예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귀신이 좋아하는 무덤 사이에 거하게 해 버립니다(3). 죽음과 썩음의 장소입니다. 죽은 시체가 썩고 있는 곳입니다. 안락과 안식의 장소 집을 거절합니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합니다.
네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을 저항합니다.
6,7 절에 보십시오. 귀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거라사인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 뿐이지 믿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극단적으로 광풍을 잠재우지 못하면 그 광풍에 의해 광인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경우는 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대로 가면 그의 인생을 더럽게 끊이 나 버릴 것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부모도, 힘있는 권력자도, 나이든 지혜자도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쇠사슬로 그를 묶어 놓았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그것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대로 두면 그의 인생은 파멸되고 맙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이 때 어떻게 마음의 광풍을 다스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잔잔한 평화와 기쁨,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멀리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을 합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 와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 이유가 8절에 나옵니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우리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진단해 주시고 귀신을 쫓아 내주십니다. 다른 것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연의 광풍 뿐 아니라 영적 세계도 제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계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귀신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어도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7) 한 마디 하시면 귀신도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계를 지배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이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할 때 어떻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 16:18)"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악마는 쫓긴다.
2.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들을 제거할 때는 제거함으로 가만이 놓아두면 안됩니다. 마음의 빈 공간은 다시 무엇인가가 차지해 버립니다. 마약 중독에 들린 사람을 고치기 위해 감옥에 격리 시킵니다. 자신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 격리시켜 마약을 일정기간 끊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형기를 만료하면 출소시킵니다. 사회에 나가 정상적인 삶을 살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를 하고 다시 마약을 합니다. 몇 년전 마약 중독으로 어려움을 당한 분을 상담하고 고쳐 주기 위해 애를 쓴 경험이 있습니다. 마약으로부터 멀어질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다시 마약을 하게 되었고 아마 지금은 감옥에 다시 들어간 줄 알고 있습니다. 마음의 광풍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격리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로 귀신이 나가니까 이 사람이 어덯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자기 동네에서 떠나 달라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돼지 이천 마리가 하루 아침에 몰살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에 10만원 씩 치면 2억입니다. 큰 돈입니다. 생명의 귀중성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크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 천하보다 한 생명이 주님께 돌아 오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귀신들렸다가 치료받은 사람은 그 동네 사람과 다르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이 떠나려고 하니까 그는 어떤 요구를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광풍을 지속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탄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술과 마약과 돈과 쾌락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 때 우리는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 참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바로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지각 영역에 있어서 이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에 까지 새롭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 3:10)” 환청, 환시, 환촉, 환취에 빠져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예) 변화받았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식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탄이 주는 지식 체계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 체계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사고영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감시망상, 관계망상, 신체망상, 과대망상, 도청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약속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어떤 절망과 어려움이 있다해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19)”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날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신 1:29)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신 1:30)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말하기 영역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답게 말하는 것입니다. 늘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소극적인 말이 아니라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행동영역에서 하나님 아들 딸 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고 말씀이 가라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가로 막혀 있다할 지라도 법궤 메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하다해도 돌라면 도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발했다 할지라도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귀신들렸다가 놓임받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 속에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족 뿐 아니라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했는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무능력하고 귀신의 포로였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살리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자신을 긍휼이 여기셨는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광풍에서 노임받아 다시 광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전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면 주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부어 주실 텐데 조금 나아지면 다시 아 옛날이여 하면 사탄의 종노릇해 버립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변변치 못한 사람 왕으로 삼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얼마나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까? 그런데 이제 살만큼 살고 오를 만큼 오르자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성을 쌓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다윗이 만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시기와 질투의 늪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악신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지배해 버립니다.
사업하여 돈을 잘 벌면 그것도 주님 때문이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중독에서 해방되면 의도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은혜로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고 친한 친구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문화의 지배를 받아 참 못 사는 나라이지만 초대 교회 때는 신앙의 위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터툴리안, 오리게네스, 키프리안,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같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했습니다. 그 중 어거스틴은 우리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방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여자를 맞아들여 15년을 같이 살았고 아들도 두었답니다.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동거하는 여자를 내보내기 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성욕을 이기지 못하여 술집도 드나들었는데 그가 어머니의 30년의 기도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회심한 후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길가에서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라고 유혹했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고 나는 새 사람이 됐소”라고 대답했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과거 우리의 약점을 붙들고 광풍의 포로로 잡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이 이미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고후 5:17)라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요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귀신에게 대로를 만들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로저 버포드는 귀신의 영향을 받거나 귀신에 들리는 경로에 크게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귀신의 대로”라고 부릅니다. 크게 두가지를 통해 들어와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이방신 숭배입니다. 동양종교에 참여하거나 뉴에이지 통로 행사에 참여한다는지, 손금보기, 무당, 사탄 숭배, 사이비 종교의식, 점술 등에 참여하면 자기 삶에 들어오도록 사탄과 귀신을 의식적으로 초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삶의 양식들 가지게 되면 사탄이 그것을 틈타 인간들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영적성장에 무관심하거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예배의식 등에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날 때 사탄이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못하고 한 맺힘을 풀지 않고 복수심에 불타며 그것을 사탄이 노린다는 것입니다. 알콜이나 약물남용, 습관적인 노름이나 성적일탈 같은 중독적 패턴에 빠지면 사탄을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기를 싫어하고 권력, 부, 지위, 명예 등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조금만 빈틈을 노출하면 시험, 송사, 속임수, 애먹임, 육체적인 상해, 사로잡음 등의 방법을 통하여 인간들 속으로 침투하여 인간을 지배하려고 애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신갑주를 입고(엡6:10-19), 마귀에 대적하며(4:7),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여야(벧전 4:8-9) 만 합니다. 귀신의 대로를 차단시켜 버려야 합니다. 과거 어떤 죄를 지었던지 그 죄를 우리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제는 과거를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 어떤 실수와 실패가 있었다 해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처에 대해서 3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상처를 받은 후에 자신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상처의 책임을 모두 남에게 전가시키는 책임전가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처나 시험을 자기 갱신의 기회로 삼지 못합니다. 셋째는 상처를 은혜로 치료하고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 시험과 상처를 자기발전의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살다 보면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고 자신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성폭행, 실직 등 강한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큰 상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의 큰 슬픔으로 해서 환상과 환청을 통해 자기에게 새로운 힘이 오기를 바라고 돌파구를 찾으면 광풍이 몰아칩니다.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쓰라린 실패일 수 있습니다. 이혼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성폭행일 수도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일 수도 있습니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실수 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세월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강박증에 시달리고 자학하며 중독으로 회피해 보려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도피일 뿐입니다. 술을 진탕 먹고 잊으려고 한다고 잊을 수 있습니까? 눈을 뜨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행복한 느낌을 덮어 버립니다. 공포감, 모멸감, 미움, 수치심은 여전히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자신을 괴롭힙니다. 치유받지 못하면 신앙 생활을 해도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형식적일 뿐입니다.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무책임하고 충동적이고 진실하게 말할 자리에서도 거짓을 말합니다. 과거의 모든 문제는 우리 하나님이 치유해 주었음을 믿고 주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렘 30:17)"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렘 33:6)"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명적인 상처를 가진 인간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광풍이 몰아 오고 있습니까?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07.3.25/열린교회/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