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가두지 못하는 빛
본문
마가복음4:21-25
제가 이 시간 두 개의 쉬운 퀴즈를 낼 터이니까 한 번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참 귀중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중한 것들은 대부분 흔하지 않습니다. 얻기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인간이 사는데 가장 귀중하면서 흔한 것이 있습니다. 너무 흔해 그것이 없을 때까지는 고마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세가지를 들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빛, 공기, 물입니다.
두 번째 질문을 내겠습니다. 빛은 참 우리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사물을 밝게 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생물이 살 수 있고 빛이 있어야 따뜻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계절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그 세 종류의 빛은 무엇일까요?
첫째가 인공의 빛입니다. 윌리엄 길버트나 벤저민 프랭클린, 안토니오 볼타, 에디슨 같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것 없으면 인간은 엄청나게 불편할 것입니다. 인공의 빛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둘째가 자연의 빛 즉 태양의 빛입니다. 질량이 지구의 33만배나 되는 태양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22억 분의 1의 빛과 열로 인류는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살고 있습니까? 이 태양 빛으로 생명이 살아납니다. 이 빛으로 식물이 광합성을 합니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이러한 인공의 빛과 자연의 빛 말고도 또 하나의 빛이 있습니다. 세 번째 빛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빛, 생명의 빛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그 빛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빛으로 오신 예수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시고 등경 위에 올려놓는 등불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함께 한 사람들과 제자들입니다(1). 씨뿌리는 비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해석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사람도 있고, 예수님의 흠을 잡기 위해 온 사람도 있고, 질병을 고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한 가지 공동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와서 불의한 사람들을 물리쳐 주고 자유와 평등,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를 기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이 기대하시는 그분이시길 바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밤마다 경험하는 그들의 일상 생활을 통해 설명합니다. 밤이면 등불을 가지고 방을 환하게 밝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밤에 등불을 가지고 방에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곡식을 재는 말 아래나 잠을 자는 침대 아래 두려고 가지고 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등불을 말 아래 두면 불은 꺼지고 평상 아래 두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불을 잘 비추어 방을 환하게 만들 수 있는 등경 위에 두기 위해 등불을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사람이 불을 켤 때는 불이 가장 잘 비취는 곳에 둔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해석할 때 씨뿌리는 비유와 연관하여 옥토와 같은 너희는 빛을 발하여야 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나타난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에 단순한 그런 교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씨를 말할 때 씨가 말씀을 상징하듯이 예수님이 등불을 말할 때는 단순한 불을 켜는 등불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등불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등불"은 원문대로 하면 '하나의 등불'(a lamp)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바로 '그 등불'(the lamp)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등불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빛으로 비추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요한 복음에서 자신이 빛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46)”
당시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감겼기 때문에 영적 무지로 예수님이 빛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인공의 빛이 있고 태양의 빛이 있지만 다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보이지 않은 사람은 그 밝음을 볼 수 없고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눈이 감긴 사람은 생명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빛으로 만났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을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여전 전에 이사야가 어떻게 예언해 주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6)"
메시아가 빛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빛인 것을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개혁성경 번역을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표준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막 4:22)” 현대어 번역에서는 “아무리 감추어 둔 것이라도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막 4:22)”라고 번역했습니다.
방안에 불을 환히 밝혀 어둠에 갇혀있는 것들을 밝히 드러내듯이 아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진리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언젠가 밝히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하신 일과 진리가 온전히 밝혀질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말씀합니다. 빛되신 예수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구원의 진리, 말씀, 복음을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1) 이 빛을 받으면 밝게 보게 만듭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 빛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명이 보이지 않던 눈에 사명이 보입니다. 이사야처럼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어지고 이해되어 집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론이나 지식, 보편적 경험 수준이 아닙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고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만의 경험이과 빛이신 예수님과 개별적인 만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빛으로 모시지는 못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실 때 이성이 살아 납니다. 지성이 새로워 집니다. 양심이 살아납니다. 이성이 제 구실을 하게 됩니다. 정확하고 바르게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세계관이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이 됩니다. 지성과 도덕적인 분별력이 정상적으로 됩니다. 참 지식, 참 거룩, 참 행복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을 밝히 보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 있음으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라는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이 빛을 받으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죽음의 어두움, 죄의 어두움, 근심의 어두움, 시기와 질투의 어두움, 전쟁과 기근의 어두움, 두려움과 불안의 어두움, 질병과 고통의 어두움을 몰아 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죄의 깊은 수렁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죄의 수렁에서 용서받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어두움의 사상, 어두움의 지식, 어두움의 도덕, 어두움의 문화가 달아납니다. 이 빛이 임하면 음란한 밤의 문화가 달아납니다. 타락한 어거스틴이 이 빛을 받으니까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방탕하게 살던 부시가 이 빛을 받으니까 새사람이 되어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깡패 대장이었던 김익두가 이 빛을 받으니까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빛은 받으면 나라의 어두움이, 가정의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바이킹족이었던 스웨덴이 변하고 해적들이 신사로 변합니다. 온갖 죄악과 우상으로 타락한 로마가 이 빛을 받으니까 2천년동안 엄청난 축복을 누렸습니다. 불모지의 땅 미국이 이 빛을 받으니까 세계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헨델과 베토벤,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가정이 밝아집니다. 영혼이 밝아집니다. 마음이 밝아집니다. 세상이 밝아집니다.
3)이 빛을 받으면 아름다워집니다. 가정이 아름답고 교회가 아름답고 자녀가 아름답고 아내가 아름답고 남편이 아름다워집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4)이 빛을 받으면 생명이 살아납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빛입니다. 이 빛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2.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반응/복음을 수용하는 마음 자세
이미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똑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지지만 길가 같은 마음에 떨어지면 새들이 주어 먹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돌밭 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즉시 기쁘게 받지만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면 세상의 염려의 유혹, 재리의 유혹, 일락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등불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질 것을 말씀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9절과 함께 경청하는 자세를 말씀합니다. 듣기를 거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듣는가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아무것이나 듣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들으라'라는 말씀입니다. 눅8:18에서는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라고 말씀합니다. 듣는 방법을 말씀합니다. 주의 깊고, 사려깊고, 분별력있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어 번역에는 “이 말을 명심하여 들으라.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받을 것이다. (막 4:24)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막 4:25)”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후하게 됫박을 되어 줍니다. 그러면 그만큼 후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호의적으로 대해 줍니다. 그러면 더 후한 대접을 받습니다. 친절하게 대해 줍니다. 그러면 더욱 친절하게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그릇)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음을 들을 때 깊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게서 그 마음 그릇에 풍족히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각자의 마음의 그릇에 따라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많이 받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고후 9:6).
옥토가 되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풍성한 열매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하게 주십니다. 은총위에 은총을 주시고, 복에 복을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널리 용서해 주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4)”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을 때 지혜 뿐 아니라 장수와 부귀까지 주셨습니다(왕상3:9-15).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을 때 하인을 치료시켜 주실 뿐 아니라 백부장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복까지 주셨습니다. 한나는 아들 하나를 구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무엘을 주실 뿐만 아니라(삼상 1 : 20)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고(삼상 2 : 21) 사무엘을 민족 지도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왕이 병 낫기를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만 낫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나라까지 앗수르왕의 손에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셨고(왕하 20 : 6),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아들까지 주셨습니다(왕하 21 : 1).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손해 되는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더 풍성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있는 자는 더 받는 영적 은혜를 체험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길가 밭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밭처럼 씨앗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말씀을 받지만 환란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쾌락의 유혹에 넘어지면 있는 것까지 다 빼앗긴다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똑같이 12제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니골라는 초대교회 7집사로 임명을 받고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결국 니골라 당이라는 이단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잊는 것 마져 빼앗기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있는 것으로 더 풍성해 지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우리가 있는 것 빼앗기기 않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풍성해 지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귀있는 자가 되어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23)./말씀받는 태도
이 말씀을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9).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고 예수님이 메시아, 나의 구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번민과 갈등이 있을 때 자살하지 말고 용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라고 말씀하시면 그냥 순수하게 그 말씀 받아들이면 용서의 기쁨이 있고 풍성한 삶이 이어집니다.
미래에 대하여 염려와 근심거리가 있으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라는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 소망이 끊어지고 절망적인 상황이 다가오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를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무엇을 들을 것인가 분별해야 합니다(24)./ 무엇을 들을까?
무엇을 듣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듣지 말아야 할 나쁜 소문을 꾸준히 듣는다면 그는 경솔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똑같은 병이라도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고귀하게 대접받는 병이 될 수도 있고 천하게 대접받는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끝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내 소리를 들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점점 가면 갈수록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텔레비전과 세상에는 많은 귀를 기울이지만 말씀은 등한시 합니다. 설교자도 말씀을 도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신앙의 악세사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만들어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진리가 있고 참 행복한 삶의 원리가 있고 위로와 평강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되고 사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7)”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어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예레미야는 렘15:16에서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인격을 변화시키고 사명을 이루게 합니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입니다.
3)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24-25).
우리는 이제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빛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둠을 거두어 냅니다. 사물을 밝히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빛을 만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2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 앞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전구는 수명이 되면 살아지고 태양 역시 50억 년이 지나면 죽는다고 하지만 빛이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합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함께 하신 뿐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시다. 어둠의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죽음의 어둠, 죄의 어둠, 두려움과 근심, 낙심, 절망의 어둠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밤 문화만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까지 술마시다 남자 친구집에서 죽어가는 인생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롬 13:13)"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이제 우리는 어둠의 문화 땅의 문화, 어두움의 사상, 어두움의 지식, 어두움의 도덕, 어두움의 문화를 몰아 냅니다. 담대하게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어둡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빛의 자녀로 불렀습니다. 우리도 등경을 말 아래 감추어 놓지 말고 침대 빛에 놓지 말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등경 위에 올려놓고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