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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을 받는 그리스인 ( 계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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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을 받는 그리스인 ( 계3:7-13)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가 있으면서 성령의 감동함을 받고 당시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향하여 칭찬과 책망을 하신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 ,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렇게 일곱 교회중에 다섯교회는 책망했으며,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책망하지 아니하고 칭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빌라델피아 도시이름 유래는 본래 버가모 왕국시대 이 지역의 통치자였던 유메네스 2세(Eumenes)는 전장에 나갈때마다 정치와 군사 지식이 탁월했던 동생 앗탈로스 2세(Attalos 11,BC159-138)에게 내정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고 인기가 많았던 그를 로마정부가 이용할 목적으로 그에게 왕위에 오르도록 충동했지만 앗탈로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형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 ‘앗탈로스의 형제애“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빌라델피아라는 말의 유래였던 것입니다.

빌라델피아는 두 낱말이 합쳐서 이루어졌습니다. 필로스(사랑, Φίλος) 와 아델포스(형제, άδελφόϚ) 를 합쳐서 필라델피아(형제사랑, φιλαδελφεία)인데 이 말은 “형제의 사랑”“형제의 우애”란 뜻입니다. 빌라델피아의 이름을 통해서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교회 안에 형제 자매간에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이 도시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놀라운 형제사랑을 나누며 동시에 이런 사랑에 목말라하던 도시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이러한 교회를 성도들을 칭찬해 주었던 것입니다.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큰 교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8절)

"보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빌라델피아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이말은 헬라어로 '미크란 에케이스 뒤나민'이라는 단어로 '능력이 거의 없다' 는 의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신분이나 지위가 변변치 못한,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적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크냐 작으냐, 많으냐 적으냐에 관심이 있지 않고, 최선을 다 했느냐,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것보다도 우리의 충성을 중요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연약하고 부족하며, 능력이 없어 드릴 것도 드리지 못하였지만 적은 물질로 주님께 드리며 주님의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즐거움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소수지만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순종하며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 사실을 아신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했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내 말을 지켰다"는 것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순종했고 그 말씀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8절에서 "내 말을 지켰다"고 칭찬했고, 10절에서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칭찬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주님께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우둔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부적응의 사람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순종하는 사람이 주님께 인정받고 그 사람이 명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사람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는 이미 능력이 충분하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비록 능력은 적을지라도 주의 말씀에 ‘아멘’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진실하신 예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조선시대에 보면 나라를 위하여 왕을 위하여 충성했던 사람들이 간신배들의 모함에 의하여 죄를 뒤집어쓰고 귀향살이를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륙 지역 보다는 섬으로 유배시키는 것이 효율 적이어서 같은 섬이라도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도나 백령도는 왕족등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 되었고, 제주도는 흑산도 ,진도,완도,등의 여러 전라도 섬들과 함께 그외의 유배지도 쓰였습니다. 유배지는 보통 수도에서 3000리가 넘어야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이와 같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멀리 떨어진 제주도로 많이 갔다고 합니다. 죄가 많을 수록 한양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합니다. 충신도 유배를 당할 때 억울하다고 느끼니까 측근들과 연락을 하면서 복수의 칼을 갑니다. 이것을 안 간신 배들은 다시 왕에게 아룁니다. 그 사실을 안 왕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사약을 내립니다. 사약을 받은 신하는 임금이 사는 궁궐을 향해 절을 하고 사약을 받습니다. 요즈음 같은 시절에 사약을 내린다고 하면 절하면서 받을 사람있겠습니까? 그러나 조선시대에 왕을 사랑하는 충신들은 사약을 받으면서 절하였습니다. 그만큼 임금님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죽도록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사약을 내리면 받으시겠습니까?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어려운 중에도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말씀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라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충신들은 임금이 주신 것은 사약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약같은 원치 않는 말씀을 주신다고 해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사약처럼 순종하기 힘든 원수를 사랑한다든지, 용서하라고 하든지, 화목하라고 하든지하는 말씀이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약도 충신에게는 귀하듯이 충성한느 그리스도인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도 순종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재명이 쓴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책을 읽으면서 감동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W. 브레이크가 말했는데 “자신의 날개 짓보다 더 높이 날아가는 새는 없다”는 것입니다. 날개 짓을 한 만큼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높은 하늘을 날기 원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접하여 살고 싶으면 말씀에 순종하는 날개짓을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말씀에 순종한 만큼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 외부적인 박해가 심했습니다. 소아시아는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황제 숭배를 내세워 기독교를 엄청나게 박해했습니다. 장장 300여년이나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박해가 계속되자 박해를 두려워하며 다른 종교와 타협하는 사람이 생기고, 교회를 등진 채 주님을 떠나가는가는 사람들이 생기고, 아예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힘이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적은 능력 상태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내부적 박해가 심했습니다. 본문 9절에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대인임을 내세우며 은근히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났음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지도자를 무너트리며, 성도들을 성장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내외로부터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필라델피아교회는 하나님이 문을 여는 교회입니다.

특히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말씀 가운데는 7절에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는 말씀이 복이 되는 말씀입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사람이 없는 주님이 우리들 앞에 열린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닫게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열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이 있으니까 한번 해봐야지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마음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적은 물질,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선교문을 여시는 분, 교회 문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 이시므로 문을 여실 때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을 닫기 전에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8월31일) 아프카니스탄에서 19명이 모두 나왔습니다. 탈레반의 요구는 몸값을 받았으면서도 정부가 ‘기독교 선교단을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 정부에서는 단기선교여행을 대대적으로 막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잠시 선교가 멈춘다하여도 제3세계를 통해서 문을 여실 입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탈레반의 힘이 아니라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르단에 계시는 김선길 선교사님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요르단에서 2주안에 떠나라는 것입니다. 문을 닫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린마음을 주시고 일할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구제하며 양육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섬기에 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문이 닫히기 전에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핑계하거나 나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렸을때 일하십시오. 열렬을 때에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중고등부 교사인 한권희 선생님이 신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았는데 장학금이 원주교회 약국하는 백두산 약국이름과, 집사님이름, 부인이름, 세 자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으로 해마다 MDiv 과정의 학생6사람에게 전액 장학금 (년400만원) 6개를 새롭게 만들어서 학교에 기탁했습니다. 조성택 집사님은 오래전부터 '원주백두산 장학금' 명목으로 전액 장학금을 학교에 기탁해 왔는데, 이번에 6개를 신설함으로 총 7개의 전액장학금으로 매년 2800만원을 학교에 기탁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학생의 설교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교내 설교대회를 개최하라고 매년 500만원을 기탁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번 가을에 신학생들과 전도사들이 설교대회를 갖습니다. 극동방송국을 듣다보면 정경주 교수가 나와서 특송을 합니다. 이분은 숙명여대 영어 교수인데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극동방송 음악 컨설턴트에서 무료로 찬양하면서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주의에는 이보다 더한 헌신자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을 보면 우리는 너무나 작게 보일수가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에 어렵게 사시면서 6개월치 모운 건축헌금 100만원을 가져오신 분이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가정도 어려운데 조금 잘되었다고 건축헌금으로 100만원 가져오신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돈의 액수에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하며 적은 것이지만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순종하며, 말씀을 지킨 여러분을 칭찬하시며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2.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11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님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네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기 위한”것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0절)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면하게 하리니’는 원문에 ‘~으로부터 지키리니((τηρησω εκ)'로서 ‘환난의 면제’보다는 오히려 ‘환난 중에서도 보호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키셔서 대환란의 때에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면류관을 빼앗기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왕관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힘을 다 쓰는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나름대로 지금까지 영광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썪지 않는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의의면류관을 얻기위해 수고해 왔는데, 이제 와서 사역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면류관을 빼앗기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적은 지식, 적은 재산, 적은 능력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거나 아예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그들의 적은 숫자로도 결코 기죽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능력으로 막강한 사탄의 세력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초보적 수준으로도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어떤 고난도 견뎌내며 이겨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단순한 신앙의 연조나 성경 지식에 있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약시대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소수의 믿음으로도 바빌로니아 왕권을 거뜬히 이겨냈습니다(단 1:8-15).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실력이나 재력에 있지 않고, 믿음의 위력에 있습니다.

"우리가 겨자씨 만한 믿음만 가져도 태산을 옮길 수 있느니라"(마 17:20).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적은 힘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는 언제든지 작은 것을 활용하십니다. 모세의 나무 지팡이 하나로도 이집트의 철장 권세를 쉽게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의 물 맷돌 한 개로도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거뜬히 쓰러뜨렸습니다.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 한 개를 가지고도 오 천 명이 먹고도 남는 큰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사람이 볼 때는 작고 미미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든지 능력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면류관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입니다. 그는 교만하고 순종치 않으므로 면류관을 잃게 되었습니다. 롯이 그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사랑하여 영적인 모임보다는 세상적인 모임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아내를 잃고, 사위 둘을 잃고 딸 둘을 데리고 유황과 불못에서 겨우 살아 나왔습니다. 데마가 그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과 함께 동역자로서 일했던 그가 면류관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것이라고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시험할 때입니다. 시험받는 사람들은 작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적은 것이라도 굳게 지키는 자들은 ‘시험의 때를 면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여건이나 환경이나 대인관계들이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멈추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을 머물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시험을 받을 때라고 했습니다. 혹시 지금 마음에 시험이 든 사람 있습니까?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지금 시험에 들려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네” 라고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며, 헌신된 사람들이 왜 시험을 받습니까? 지금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험으로부터 이길 수 있나요?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긴 말씀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있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적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당면하는 시험에서 면하게 하시며, 칭찬받게 될 것입니다.




3.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이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적은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세상에 영향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12절) 여기서 ‘기둥’은 안전성과 영구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최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이었습니다. (갈2:9) 구약시대의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두 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둥은 이름이 각각 있는데 하나는 '야긴'이라고 하고 다른 한 기둥은 '보아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둥의 이름은 다 뜻이 있습니다. '야긴'이라는 말은 "저가 세운다" 혹은 "견고하다"는 뜻이요, '보아스'라는 말은 "능력"이 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왜 이 기둥을 세웠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옛날에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광야를 지날 때에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나타나서 저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그것의 상징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당시 빌라델피아 교회가 있던 알세히르의 도시 현장에 가면 6세기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사도 요한 교회에 6개(밖으로 3개가 드러남)의 거대한 돌기둥들 만이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둥이 되게 한다는 말씀은 하늘나라에서나 세상의 교회에서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요긴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성전의 중요한 기둥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확고부동한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귀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은 빌라델피아 교회 성도들이 이 상급을 잃지 않도록 면류관을 받도록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아야 하리라고 권면합니다.


2) 다시는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당시 이 도시는 지진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성밖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주민들은 지진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안전해야할 집이 안전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작은 능력으로 예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고 선교의 사역을 감당한 이 교회가 다시는 성밖으로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할 영원한 아버지 집의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천국의 시민권은 영원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3) 새 이름을 기둥에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빌라델비아 지방에서는 제사장이 평생을 충성되이 봉직하고 나면 그가 죽은 후에 그가 봉직했던 전각 안에 새로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그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새겨 넣음으로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신실한 자들에게 주는 영원한 명예를 뜻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충성되고 신실한 자의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했습니다.

각 기둥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으로 아로 새긴다고 했습니다. 작은 것을 충성되고 헌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기는 자 위에 기록한다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이름이 새겨지며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를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당하는 핍박과 고통과 고난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위로하시며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925년경, 소련에서는 전 국가적으로 기독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자행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를 박해하던 기관의 책임을 맡았던 부르실바라는 사령관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며느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체포되게 되었습니다. 그 부하들은 상관의 며느리를 어떻게 하든지 살려 보려고 달랩니다.

“부인, 딱 한번만 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당신을 내 보내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완강하게 부인하기를 “나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셨는데 내가 어찌 죽음이 두려워 그 분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브르실바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이제라도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끝까지 거절하고 오히려 기쁨과 찬송을 부르며 얼굴에는 평화의 빛까지 가득 넘쳤습니다. 사령관은 화가 나서 “네 얼굴에 웃음을 멈춰라.”고 호통을 쳤지만 며느리는 조용한 소리로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내 육신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마음에 솟아나는 이 끝없는 기쁨과 감사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역장 여러분, 집사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며 섬기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글쓴이: 류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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