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본문
The Comfort God Grants to Us
미국의 하딩 목사님은 매우 성격이 급한 분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하딩은 어느 조그만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월급인상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어느 날 하딩은 매우 흥분해서 사장에게 급여인상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만일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사표까지 쓸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출근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일에 너무 파묻혀 지내다보니 사장과 면담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지친 몸으로 퇴근한 하딩은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은 두 장의 카드를 발견했습니다. 아내가 준비한 카드였습니다. "여보, 봉급 인상을 축하드려요!" "봉급은 인상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여보, 힘내세요!" 하딩의 아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딩은 아내의 격려에 힘입어 유능한 직원이 되었고 결국 훌륭한 목사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의 시국은 우리 모두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백성에게 희망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0: 1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51: 3에도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66: 13에도 하나님께서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테러의 참사로 고통 당하는 미국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고린도 후서는 바울이 쓴 여러 서신들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추상적인 신학이나 교리서가 아니라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위기와 절망 속에 빠져 신음하고 때로는 환희와 희망에 넘쳐나는 인간 바울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줍니다. 특히 고린도 후서는 흔히 '눈물의 편지'(고후 2: 4 참조)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은 뒤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고통과 슬픔 속에 빠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과 슬픔에 빠지게 될 때 항상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자를 어루만지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도대체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8―9을 보건대 그가 아시아에 당한 환난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we were so utterly, unbearably crushed that we despaired of life itself. Indeed we felt that we had received the sentence of death"――생각했을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고난을 겪었기에 이렇게 표현할까요?
고후 11: 23―29에 바울이 겪은 온갖 환난들을――"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등등――자세히 열거하고있습니다. 아마 그 중에 어느 하나를 당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도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바울과 고린도인들이 받는 고난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겪게되는 그런 자연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자발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고린도인들이 겪은 고난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초대교인들이 흔히 당했던 폭동, 투옥, 매맞음, 혹은 법정에 무고하게 고발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고통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으로 위로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5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난당하고 슬픔에 빠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반드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위로받으십시오!
어떤 국왕이 나라 안의 석학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연구해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학자들 중에 몇 사람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수십 필의 낙타 등에 연구논문을 싣고 국왕을 방문해서 연구 결과를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이 든 왕이 "그 책을 모두 읽을 힘이 없으니 간단하게 정리해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학자들은 다시 몇 년 동안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서 국왕에게 보고했습니다. 국왕은 그 때 눈과 귀가 예전보다 더 나빠져서 그 단 한 권의 책마저도 읽을 기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 한 권의 책조차도 읽을 수가 없구나. 누구든지 좋으니 단 한 마디로 인생을 표현해다오."하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학자들이 잠시 의논을 한 뒤 대표자 한 사람이 왕의 귓전에다가 대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폐하, 인생은 태어나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국왕은 그때서야 빙그레 미소지으면서 "그래, 그게 인생이구나."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고통받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히 믿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46: 1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짧고 허무하고 슬픔 많고 고통 많은 세상이지만 위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둘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항상 구원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지금 네가 당하는 고난은 진짜가 아니라."든지, "곧바로 너의 고난을 완전히 제거해 주겠다."라든지, 아니면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말아라." 하는 종류의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거의 죽음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사망에서 자신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9―10절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엄청난 위기와 환난을 주신 것은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 즉 부활과 영생, 구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일시적 위로와는 다릅니다.
한 선생이 제자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토끼를 쫓고 있는 여우를 가리키면서 "저 여우는 결코 토끼를 잡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우가 토끼보다 훨씬 빠른데요." 제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선생의 말에 이의를 댔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여우는 겨우 저녁끼니를 때우기 위해 달릴 뿐이지만 토끼는 목숨을 위해 달리기 때문이지."리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난 번 테러 사건 때 필라델피아에서 추락한 여객기는 본래 백악관이 공격 목표였다고 합니다. 승객들 중에 일부는 이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폭격을 당한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납치범들과 격투를 벌여서 백악관으로 향하는 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온 국민들이 그들의 영웅적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더 용기 백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기와 고난과 사망의 권세 속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장 죽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심을 믿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가족이 차를 타고 길을 가다가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서있는 동안 벌 한 마리가 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운전하는 동안 벌이 윙윙거려서 신경이 거슬렸습니다. 식구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이 벌을 죽이지 않고 창문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손으로 벌을 몰아서 열려진 창문 밖으로 내보내려했습니다. 그럴수록 이 벌은 더 필사적으로 윙윙거리며 나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옆에다가 차를 주차시켰습니다. 앞쪽 창문을 열어 놓으면 벌이 꽃향기를 맡고 밖으로 쉽게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벌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차안을 열어 보았더니 이 벌은 뒷좌석이 있는 창문 밑에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앞 창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꽃향기를 맡고 밖으로 나가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이 벌은 자기 힘과 지식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밤새 내내 뒤쪽 창문을 공격하다가 결국은 죽게 된 것입니다.
미국이 최강의 군사력만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와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모든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확실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세상의 일시적 위로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전염성이 있어서 공동체 전체까지 미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넘치는 위로를 주셨을 때 단순한 자기만족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받는 위로가 고린도인들의 위로로 연결됩니다. 먼저 4절을 또 한번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했습니다. 또 6절도 다시 한번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통받고 위로받을 때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의 위로가 된다는 사실은 주님의 몸되신 교회(엡 1: 23) 안에서 한 지체가 된 성도들은 이제 고통만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위로까지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전 12: 12―31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붙어 있는 우리 지체들은 하나가 됩니다. 특히 고전 12: 26의 말씀처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게 됩니다. 바울의 고난과 아픔은 고린도 교인들의 고난과 아픔이 됩니다. 또한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위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는 이들끼리 서로 가엾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알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를 돕고 또 도움을 받게 됩니다. 테러 사건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한 유족의 진한 아픔이 다른 유족들 전체의 진한 아픔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또한 한 유족의 위로는 다른 유족들 전체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번 테러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업체는 항공회사들입니다. 많은 회사들이 수 십만 명의 직원들을 감원하고 있습니다. 항공회사의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아픔과 위로는 모두의 아픔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또 더 크게 보면 미국이 테러로 겪는 아픔은 더 이상 미국만의 아픔이 아닙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 모든 시민들의 아픔이 될 것입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국 편이 되든지 테러리스트들의 편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주문한 것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제 세계는 더 이상 한 국가의 고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비슷한 위기를 언제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중문화가정 교회에서 목회한 후부터 누가 이중문화가정 사람들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좋은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좋고 조금만 나쁜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몹시 상합니다. 아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과 하나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클린/폿 후드는 군사 지역입니다. 군인 한 사람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 군인 한 사람의 위로는 우리 모두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메리옷(Marriott)이라는 호텔에서 일하는 찰스라고 하는 웨이터가 있었습니다. 손님 중에 한 사람의 여동생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찰스는 카드 한 장을 산 뒤 호텔에 일하는 모든 직원들의 사인을 받아서 뜨거운 애플 파이와 함께 이 손님에게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 손님이 메리옷 호텔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당신을 아마 평생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날 필요도 없겠지요. 왜냐하면 저는 당신의 호텔에서 일하는 찰스라는 사람을 이미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호텔, 즉 메리옷 호텔만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에게도 당신의 호텔을 사용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한 웨이터가 베풀어 준 격려와 위로가 이 여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메리옷 호텔만 사용하는 것으로 은혜를 갚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위로를 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슬픔에 빠진 미국의 모든 국민들에게도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우리의 이웃에게 전하는 위로의 전령자들이 됩시다. 아멘.
누구의 시어(詩語)처럼 가슴에 늘 푸른 파도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너를 사랑한단 말 아주 작게 속삭여도 내 귀엔 파도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왔으면 좋겠습니다.
갈수록 세상은 어두워지고 갈수록 산다는 게 어려워져도
그래도 나는 널 사랑한다 말 한마디에 가슴이 늘 그렇게
감동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김흥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