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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길동무되시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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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길동무되시는 예수 <눅 24: 13-35>


Jesus, A Companion for Our Life Journey



어떤 자연 박물관에서 한 관광객이 공룡들의 뼈를 전시해 둔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 공룡뼈를 가리키면서 이 뼈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안내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안내원은 "3백만 4년 6개월이 되는 뼈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관광객은 안내원이 단지 "3백만년 되었습니다." 하지 않고 4년 6개월을 덧붙여서 정확하게 말하는 것에 다소 놀랐습니다. 그래서 "아니, 당신은 이 공룡뼈에 대해서 어떻게 달수까지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안내원이 대답하길, "글쎄요, 제가 이 공룡 전시장에서 처음 일할 때 저 공룡뼈의 나이는 3백만년이었는데 그 동안 4년 6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 시대나 고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유명한 왕릉이나 신하들의 묘지를 자주 도굴 당해서 문화재 당국이 큰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국보급 왕릉과 이 왕릉에 묻힌 시신과 유품들, 그리고 유명한 스님들의 죽은 유골, 즉 사리를 전문적으로 도굴한 사람들을 법정 최고형인 사형에 처해서 북경에서만 16명의 도굴꾼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1852년 미국 사우쓰 캐롤라이나 주, 찰스톤(Charleston)에 '부활의 사나이'(Resurrection Man)라는 별명이 붙은 36살의 노예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조지아 의과대학(the Medical College of Georgia)이 고용한 사람으로서 주임무가 밤에 몰래 공동 묘지에 들어가 금방 묻은 시신을 훔쳐내 의과대학생들의 해부 실험용으로 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본래 이름은 그랜디썬 해리스(Grandison Harris)였는데 워낙 시체 도굴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의과대학 교수들이 '부활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부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 시체 전문 도굴꾼은 주로 깊은 달밤에 공동 묘지로 몰래 숨어 들어가 매장지의 위쪽 끝 부분을 파헤친 뒤 도끼로 관을 부수고 묻은지 얼마 안되는 시신을 두 팔로 끌어 올려 능숙한 솜씨로 마대 자루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마대 자루에 넣은 시신을 손수레에 실은 뒤 다시 묘지를 마치 아무 일도 없듯이 원래 상태로 돌려놓은 뒤 훔친 시체를 의과 대학 실험실에 배달해 주곤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 도굴꾼이 그 날도 시신 도굴을 다 마친 뒤 훔친 시체를 짐마차에 실어서 어두운 골목길에 몰래 세워 놓은 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선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두 명의 의과대학 학생들이 이 사람이 도굴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미행을 하다가 이 사람이 술집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서는 장난기가 발동해 놀려주기로 했습니다. 마대 자루 속에 들어가 있는 시신을 얼른 딴 곳에 치워놓고서는 한 의대생이 그 안으로 대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이 그랜디썬이라는 도굴꾼이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오자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Grandison, Grandison, I am so cold. Buy me a drink!" 하고 귀신 흉내를 냈다고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50년 이상을 수백구의 시신을 도굴해서 의과대학에 조달해 온 이 그랜디썬이라는 사람이 191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어디에 묻히게 되었는가 하면 자기가 평생 단골로 시신을 훔쳤던 세다 그로브(Cedar Grove) 공동묘지에 똑같이 매장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다시 사신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예수님의 여제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시신이 온데 간데 없어진 빈무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성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당황해서 흉계를 꾸미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시신이 도굴당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었습니다. 마태 28: 12―13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로마 군병들에게 돈을 주며 간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갔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라고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과 '도굴,' 이 두 가지는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항상 함께 따라 다니는 가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틀림없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주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신 아침은 도굴꾼들에게 허탕을 치는 운이 안 좋은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굴꾼들은 무엇인가 무덤 안에 값이 나가는 유물이나 시신을 훔치려고 하는데 무덤이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다는 것은 재수가 안좋아 허방을 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제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영생과 희망을 주신 날입니다. 빈무덤! 이 보다 더 위대한 상징은 없습니다. 무덤이 우리 주님을 가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주일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빈무덤을 발견하고 기뻐하시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누가 24: 13-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두 사람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약 25리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촌으로 여행을 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18절에 보면 '글로바'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34절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다른 한 사람의 제자가 '시몬 베드로'라고 주장을 하기도 하고 혹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지만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의 나그네가 여행하는 목적지 '엠마오'가 도대체 오늘날의 이스라엘 도시중 어느 곳에 해당되는가에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그 옛날의 엠마오로 생각하고 찾는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암와스(Amwas)라고 하는 곳인데 이 역시 고고학적으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엠마오를 영적으로 자유롭게 해석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절망과 낙심으로 가득찬 우리의 인생길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제자가 주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몹시 마음이 상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이들의 여행길에 동행하셨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동행하시는 분이 부활하신 주님인줄 전혀 모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알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했을까요? 이 아침에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서 놀라운 영적인 회심을 배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첫째로, 두 사람의 나그네가 처음 걸어갔던 엠마오 길은 십자가와 죽음과 낙심만 남아있던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본문 17절 후반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랑하고 따랐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퍼서 이들은 슬픔과 절망의 장소,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주님께서 이들과 동행하시면서 대화의 문을 여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셨지만 아직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6절). 그러면서 주님은 최근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 채 가장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글로바는 19절로부터 24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셨으며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어떻게 부활의 소문이 시중에 떠돌아다니는지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21절에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즉,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으며 희망을 잃고 고난 당하는, 노예 상태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 줄 정치적 왕으로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희망이 좌절되어 예루살렘을 떠나 비탄의 길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복음의 핵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오직 한 가지 아직 부활의 확신과 체험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문에 대하여 듣기만 했습니다. 이들이 알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진리는 부활의 체험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이들은 좌절과 절망의 길, 엠마오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낙심한 제자들의 길동무가 되시고 말벗이 되셔서 저들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본문 25절에서 27절까지에 보면 예수님은 이 두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에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진리를 다시 한번 자세히 풀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히 25절에 보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하고 구약에 있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두 제자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길에 말동무가 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약속의 확실성을 가르쳐 주십니다. 32절에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져 주님의 동행하심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실 때, 즉 성만찬을 나누셨을 때 눈이 밝아져서 마침내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며 대화하시는 분이 부활의 주님이신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는 날이 어두워지자 예수님을 억지로 권하여 집에 모시고 함께 음식을 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주님이 음식에 대하여 축복기도를 하시고 떡을 떼어 저들에게 나누어주자 저희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에 이들의 식탁에 초대된 손님이셨지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30절) 이 만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고 만찬을 함께 나눌 때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듣고 성만찬을 함께 나눌 때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 가지 종류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식탁을 말합니다. 첫째로, 매일 우리가 먹는 식탁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둘째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기 위하여 모이는 성만찬 식탁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나누게 될 영원한 식탁이 또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식탁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식사하시는 분이 부활의 주님인 것을 알게 될 때 썩어 없어질 세상의 떡과 음료가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의 신령한 떡과 음료로 바뀌어지게 될 것입니다.


12살에서부터 17살까지 사춘기 청소년들 가운데 술과 담배를 하고 마약까지 하는 비행 청소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이들 비행청소년들 가운데 자기 부모님이나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12%의 청소년들은 한 주간에 여섯 차례 이상의 마리화나를 피우는데 반하여 부모님을 비롯하여 온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35%의 청소년들은 한 주에 두 차례 정도밖에 마약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분명히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식사시간이 청소년 범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일에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청소년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에 비하여 훨씬 더 흡연이나 음주, 마약같은 것에 손을 댈 확률이 떨어집니다.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 가족간의 식탁, 그리고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 이 것보다 우리를 더 확실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해 주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길은 어둠과 좌절과 절망의 길이었지만 말씀과 성만찬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그 길은 빛과 재기와 소망의 길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후에 우울하고 낙심으로 가득 찼던 길이 부활 후의 즐겁고 희망이 넘치는 길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꾸로 십자가의 아픔과 상처, 절망만 남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부활의 기쁨과 치유와 소망을 증거하는 사람들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두 제자들은 33절 이하에 보니까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열 한 명의 사도들과 모든 제자들에게 과연 주님은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힘있게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만 있고 부활은 없는 예루살렘에 부활과 소망의 증인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누가 복음을 읽을 때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일 뿐 아니라 부활하신 곳이며 초대교회가 시작된 곳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방향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은 부활의 주님을 전함으로 새 희망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부활절 예배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오늘까지는 어두움과 근심과 죄악과 두려움과 절망 속에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 이 부활절 예배 후로는 빛과 즐거움과 구원과 평안과 소망 속에서 사는 새 피조물로 변화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옛날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다정하게 대화하시며 마음을 뜨겁게 해서 영적인 눈을 활짝 열어 주셨던 부활의 주님이 오늘 여러분과도 동행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인생의 길벗이요 말동무인 것을 늘 기억하며 사십시오! 슬픔과 낙심의 길 엠마오로 향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기쁨과 소망의 길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김흥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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