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왕
본문
A Humble King
<종려주일 설교>
여러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저 유명한 그림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 그림이 상당 부분 손질되어 일반 대중들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고 선명하고 아름답게 수정이 되어서 사람들 앞에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에 500년 동안 묻어 온 먼지와 잡티를 제거하는데 무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합니다. 1497년에 만들어진 이 그림은 그 동안 수차례의 역사적인 변란 때문에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불란서의 영웅 나폴레옹이 전쟁 중에 이 그림이 걸려 있던 교회의 마당을 마구간으로 사용하면서 그림을 더럽혔으며 1943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또 한 차례 그림이 충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이와 같은 외부의 충격과 세월의 풍화로 다 빈치가 본래 그렸을 때보다 상당히 희미해지고 퇴색된 이 그림을 약 800만 달러를 들여서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결과 매우 선명하고 화려한 그림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수정 작업에 크게 반발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림을 손질하는 과정 속에서 먼지만 털어낸 것이 아니라 다 빈치가 본래 그렸던 그림의 색상마저도 깎아 냄으로서 원래 그림의 약 80%를 수채화 물감으로 다시 칠할 수밖에 없어서 크게 왜곡시켰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 빈치라는 천재적인 화가의 원화를 재수정 작업이라는 미명하에 망가뜨렸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천년 전에도 비슷하게 일어났습니다. 오늘과 같은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목요일이 되자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이 갑자기 폭도로 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게 됩니다. 마치 다 빈치의 원화가 수정되는 과정에서 크게 왜곡된 것처럼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군중들도 예수님의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수정하고 왜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왕,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로마의 폭압으로부터 구원해서 새로운 질서와 해방을 가져다주리라고 믿었던 메시아상(像)에서부터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 중의 죄인으로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고 왜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영광의 왕에서 한 사람의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왜곡과 수정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중국에 들어가면 중국인으로, 유럽에 들어가면 유럽인으로, 아프리카 땅에 들어가면 아프리카인으로 수정되어서 이해됩니다. 마치 다 빈치의 그림이 수백년의 역사가 흘러가는 도중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변형되고 왜곡되어 갔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미지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모습 저 모습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중세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타종교와 타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는 정복왕으로서, 공산주의자인 막스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은 민중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혁명가로서, 상담가들에게는 심리 치료사로서, 사업가들에게는 경영의 천재로서 각각 이해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서 마르쿠스 보어그(Marcus Borg)라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를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영적인 사람'(spirit person)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매개' 혹은 '중개' 역할을 했던 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지혜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지혜를 가르치신 '지혜의 교사'(teacher of wisdom)로서 이해되기도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당시의 정치 경제 종교 등등 모든 부분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과 사사건건 충돌할 정도로 혁명적인 사상을 가졌던 '사회적 예언자'(social prophet)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예수님은 당시 존재하던 유대교를 내적으로 갱신해서 기독교라는 개혁종교를 만들어 낸 개혁운동의 창립자(movement founder)로서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네 가지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바로 살펴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천년의 역사 동안 이렇게 저렇게 왜곡되고 수정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바로 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군중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사복음서 모두 이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마태 21: 1-9; 마가 11: 1-10; 요한 12: 12-18). 물론 네 저자의 관심에 따라서 이 이야기 중에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 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사복음서는 공히 예수님께서 군중들로부터 시편 118편에 나오는 말씀으로 환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마태와 마가와 요한은 모두 시편 118: 25이하부터 나오는 "호산나," 즉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을 인용하는데 반하여 누가는 '호산나'라는 말을 쓰지 않는 대신에 요한과 마찬가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38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은 강력한 원수와 전투를 벌인 뒤 승리하여 개선하는 장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 대개의 경우 왕이 화려하게 개선해서 이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들을 성전으로 인도하는 개선 행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사복음서 모두 시편 118편에 나타난 승리의 개선가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찬 왕의 개선행렬과 같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 새끼를 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스가랴서 9: 9의 말씀, 즉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이루신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야기는 또한 열왕기 상 1: 32-40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윗왕이 세상을 떠나기 전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여 노새를 타게 하여 온 도성의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한 사건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30절에 보면 예수님이 타셨던 나귀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전혀 새로운 왕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훌륭한 왕들이 영광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하여 군중들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폈던 것은 열왕기 하 9: 13에 나오는 말씀, 즉 예후가 아합왕의 후손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되어서 사마리아에 입성했을 때 군중들이 보여주었던 환영과 비슷합니다. 즉 환영과 지극한 존경의 의미로 겉옷을 길에 폈던 것입니다. 또한 요한 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은 고대에 종려나무가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였기 때문에 승리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오늘 봉독한 누가 복음을 비롯하여 사복음서 모두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승리한 영웅의 개선 혹은 왕의 즉위 등과 관련된 부분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그대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해도 군중들이 그런 기대를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적어도 모든 군중들은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고 흥분해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37절에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온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그 동안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것을 직접 보았고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새로운 면모와 가르침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한 사람의 영웅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 줄 분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엄청난 군중의 기대가 며칠이 지나면서 무너지자 군중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메시아상(像)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군중들이 바랐던 것처럼 세상의 인기에 영합하는 세상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께 요구하고 기대했던 것은 권력과 부귀와 영광, 인기, 눈앞에 보이는 세상질서의 변화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 가지는 권력과 영광의 왕이 아니라 겸손의 왕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질서를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가진 하늘의 왕이셨습니다. 세상 사람의 인기에 영합하여 정치적 무질서와 경제적 불평등을 바꾸는 세상의 왕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여 죄와 죽음의 권세하에 신음하는 인생들을 구원하는 하늘의 왕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군중들의 뜻을 따르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고독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길은 너무도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중 잡지 중 하나인 People지는 "25명의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The 25 Most Beautiful People)이라는 특집을 일년에 한 차례씩 실어서 수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끕니다. 이 잡지는 어떤 영화배우가, 어떤 모델이, 어떤 가수가, 어떤 정치인이 외모가 가장 아름다운가를 특집으로 싣습니다. 아마도 이 잡지를 비롯하여 서양 사람들의 잡지에 가장 많이 나타난 세 사람을 들라면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Princess Diana), 케네니 대통령의 부인 제키(Jackie),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아들 잔 에프 케네디 2세(John F. Kennedy, Jr.) 세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정말로 유명한 사람들로서 세상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누렸으며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유명하다고 해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그저 우리들의 가십이나 막연한 동정심, 흥미정도를 해소해 줄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유명해지고 영광받는 길을 포기하셨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불후불멸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른바 '무하메드 알리 신드롬'(the Muhammad Ali Syndrom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알리가 권투선수로 한창 유명했을 때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I am the greatest!), "나는 세상의 왕이다!"(I am the king of the world!)를 떠벌리면서 안하무인격으로 굴었던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대해지는 길, 힘있는 길, 부유해지는 길, 유명해지는 길을 찾아 넓은 길을 나서지만 예수님은 낮아지는 길, 자기를 비우는 길, 가난해지는 길, 겸손해지는 길을 찾아 좁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치욕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이 인류를 구원한 길이 되었고 영원히 승리하는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종려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주님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아이스 크림이 처음 나와서 값이 아주 쌀 때 있었던 일입니다. 10살 먹은 어린 소년이 어느 호텔 커피샵에 들어가 웨이트레스에게 자기가 먹고 싶은 아이스 크림을 골라서 값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웨이트레스가 "50 센트"라고 대답하자 이 소년은 자기 호주머니를 열심히 뒤지더니 여러 개의 동전을 꺼내서 열심히 세기 시작했습니다. 동전을 센 뒤 이 소년은 다시 웨이트레스에게 "그러면 저 접시에 담긴 아이스 크림은 얼마예요?"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쯤 되어서 이 소년 뒤에 손님들이 쭉 늘어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몇 푼 안되는 돈을 세고 있는 이 소년에 대하여 웨이트레스는 짜증을 내면서 퉁명스럽게 "35 센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어린 소년은 다시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세기 시작하더니 "저는 이 접시에 담긴 아이스 크림을 먹을래요"하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소년은 의자에 앉아 자기가 주문한 아이스 크림을 다 먹은 뒤 35센트를 지불하고 이 커피샵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웨이트레스가 이 소년이 있었던 테이블을 치우려고 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년은 자기가 먹은 뒤 남은 접시를 깨끗이 치웠을 뿐 아니라 그 테이블 위에 두 니켈(nickels), 즉 5센트 짜리 두 개와 5페니(pennies), 즉 15센트를 이 여종업원의 팁으로 남겨두고 떠났던 것입니다. 웨이트레스는 어린 소년이 몇 푼 되지도 않는 아이스 크림을 사먹겠다고 손님이 한창 붐빌 때 동전을 하나 하나 세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지만 이 소년은 어떻게 해서든지 누나같은 웨이트레스에게 팁을 주려는 착한 마음씨로 50센트 짜리 아이스 크림을 포기하고 35센트 짜리를 사서 먹은 후 나머지 15센트를 팁으로 남겨둔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바로 이 소년과 같이 남을 배려하는 넉넉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 지나치게 많은 세상적인 요구를 해서 결국은 그 이기적인 욕구가 무너질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왕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의 겸손을 배울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아멘.
김흥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