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고 용서받는 사람되기
본문
The Way of Discipleship (VI)―Becoming a Forgiving and Forgiven Person
최근에 Wall Street Journal지는 '보복 산업'(Revenge Industry)이라는 신종 사업에 대하여 크게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보복 산업'은 누군가에 의해 큰 상처를 입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멋지게 복수를 해주는 대행업체입니다. 인터넷 화면에 올라온 수많은 복수 대행업체들 가운데 'Revenge Unlimited,' 즉 '무한대의 복수'라고 이름을 붙인 한 회사는 고객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복수하기를 원하는 상대방에게 '다 시들어 죽어버린 꽃'이나 '검은 장미,' '몸통과 꼬리는 잘라버린 채 남은 물고기 대가리,' '다 녹아서 엉망진창이 된 초콜릿,' '각종 저주문구를 새긴 돌' 등을 즉시 배달해 준다고 합니다.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있는 어떤 복수 대행업체는 5명의 풀타임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특히 발렌타인 데이가 있는 주간에는 여섯 명의 일꾼들을 더 고용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알면서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 상처를 주기도 하며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노아와 그 자식들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몸종 하갈 사이에 생긴 이야기,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 등등 창세기에 기록된 이야기들만 보아도 온통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불교에서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조상의 원죄 때문에 우리는 이 땅위에 사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형제로부터 깊은 학대를 받기도 하고,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도 있고, 사랑했던 배우자로부터 버림을 당할 때가 있는가 하면, 목숨을 걸고 충성했던 직장으로부터 해고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 어떤 고통과 상처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쉽게 잊혀지기도 하지만 내 잘못과 전혀 상관없이 부당하게 받는 어떤 고통과 상처는 기억의 창고 속에 철저히 저장되어 우리를 두고두고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두 가지의 단어가 있다면 '사랑'과 '용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으며 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종려주일을 한 주간 앞두고 '제자됨의 길'에 대한 연속 설교의 마지막으로 저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삶이 진정한 제자의 길임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의 제자됨의 길은 모두 예수님의 12제자와 관계가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한 '죄많은 여인'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생활의 핵심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에 나타난 오늘 본문말씀은 다른 세 복음서에 모두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와 있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먼저 마태복음 26: 6-13과 마가복음 14: 3-9에 보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노동자가 1년 동안 일해야지만 벌 수 있는 액수의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 12: 1-8에 보면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가 지극히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나 마가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이 시몬의 집에서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고 말하는데, 마태와 마가는 이 시몬이 문둥이 시몬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누가는 바리새인 시몬으로 기록하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와 마가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아니라 머리에 부었다고 말하는 대신에 누가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태나 마가, 요한은 모두 이 사건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반하여 오직 누가만이 한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여 큰 죄악을 용서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학자들간에 사복음서에 나타난 이야기가 똑같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사복음서에 나타난 '향유를 주님께 부은 이야기'는 결국 한 가지 사건이 각각 다른 신학적 관심과 배경하에서 달리 표현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나 죄인들 집에만 가셔서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가장 미워했던 바리새인 집에도 방문하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없는 자, 소외당한 자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말해줍니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었는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당시 식사 습관처럼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식탁 밖으로 발이 뻗어 나온 상태에서 음식을 들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식사 자리에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여인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37-38절에 보면 이 동네에 살고 있던 한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귀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뒤로 와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성경학자들 사이의 일치된 견해는 이 여인이 어두운 밤의 여인, 혹은 거리의 여인으로서 화류계에 몸을 담은 여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마태나 마가, 요한에서는 이 여인이 가지고 온 향유가 노동자 한 사람이 일년동안 일해야지만 벌 수 있는 액수의 향유였다는 사실에서 이 여인의 신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귀한 화장품을 사서 자기 얼굴과 외모를 가꾸어야만 하는 그런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은 율법적인 의나 성결에 있어서 자타가 공인할 만큼 엄격했기 때문에 감히 자기 집이 어떤 집인데 전혀 초청도 하지 않은 죄많은 여인이 잔치 자리에 들어와 이와 같은 일을 하니까 대경실색을 했을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예수님을 자기 집 잔치에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이 이 여인이 예수님께 하는 짓을 보고서는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예수님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의 과거가 어떻고 또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 죄많은 여인을 물리치시지 않고 그대로 두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은 '데나리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두 사람이 각각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빚갚을 능력이 없어서 주인이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는데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고 감사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즉시 더 많은 돈의 빚을 탕감받은 자가 빚주인을 더 사랑하고 감사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이제 바리새인의 위선을 정곡으로 찌르십니다. 당시 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손님에게 발씻을 물을 가져다주거나 입을 맞추는 것은 지극한 공경과 대접의 한 표현이었으며, 특히 가장 귀한 손님에게는 감람기름을 붓는 일조차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의롭다고 하는 너 바리새인아, 나를 이 잔치에 초청한 너 시몬아, 너는 내가 너의 집에 들어올 때 발씻을 물도 주지 않고 내게 입맞추지도 않고 내 머리에 감람유를 붓지도 않았지만 이 죄많은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어주었을 뿐 아니라 내 더러운 발에 입을 맞추며 값비싼 향유를 내 발에 가득 부었지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을 손님으로 맞고 대접함에 있어서 바리새인과 죄많은 여인의 정반대되는 태도를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겉은 의롭고 성결하다고 하는 바리새인은 참 마음과 정성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이 죄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하면서 자기의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구절인 47절에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표현 때문에 그의 모든 죄가 용서받게 되었음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적게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적은 사랑을 보이고, 많이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많은 사랑을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48절에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르시길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뒤, 다시 50절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많은 여인은 그 당시 유대 관습으로 볼 때 감히 바리새인이 베푼 잔치자리에 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했고 예수님이라면 자기가 과거에 지은 모든 어두운 죄를 아낌없이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이 여인 사이에 누가 더 주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했는가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참 선지자라고 한다면 이 여인이 죄많다는 것을 알고 물리치셨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죄많은 여인은 깊은 통회의 눈물을 쏟아 주님 발에 적시고 발에 입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향유를 부어서 주님 향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아낌없이 표시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 때문에 사랑과 죄를 용서받았다는 느낌이 없었지만 이 여인에게는 깊은 사랑과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할 때 진홍같은 우리의 죄가 흰눈같이 용서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크면 클수록 감사하는 마음도 비례해서 커질 것입니다.
희랍어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용서'라는 말은 'aphiami'인데 '씻어내다,' '청산하다,' '제거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성서적 용서 개념은 다분히 법률적인데 우리가 마땅히 갚아야 할 빚과 당해야 할 형벌을 주 예수님께서 대신 청산해주시고 제거해주셨습니다. 상담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데는 반드시 몇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이웃에게 너무나 심하게 상처를 받아 고통을 잊지 못할 정도가 되면 우리는 그 다음에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상처와 고통을 받게 하리라고 복수심에 불타 증오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수하는 마음을 버리고 대신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내적인 상처는 치료되기 시작하며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마침내 우리 마음속에 용납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깨끗이 기억조차 않으시고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웃에게 확장해야 할 차례입니다. 죄가 많으면 용서도 크게 받고 용서받은 확신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다음과 같이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림으로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어느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이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작은 새우가 가득 담긴 양동이를 부두 끝에 잔뜩 모여 앉은 새들에게 먹이로 주고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수많은 바다새들 한 마리 한 마리에 먹이를 주면서 "Thank you! Thank you!"를 연발했습니다. 이 노인의 이름은 Eddie Rickenbacker였는데 1942년 10월, 그 당시 태평양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던 맥아더 장군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는 특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다른 7명의 동료들과 함께 파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탄 B-17 함선이 폭격을 맞아 침몰하게 되자 간신히 구명선을 타고 바다위를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낮에는 작렬하는 더위와 싸워야 했고 넘실대는 무서운 파도와 때때로 덮치는 식인상어의 위험을 피해야만 했는데 무엇보다도 굶주림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이들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자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조용히 최후를 맞고자 구명선 위에 잠자듯 누워 있었습니다. Rickenbacker 선장 역시 구명배 위에 누워서 모자로 눈을 가린 채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은 무엇인가 자기 머리 위에 앉아서 자기 몸을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고 잠을 깼습니다. 바로 바다새가 그의 몸에 내려앉았던 것입니다. 이 때 순간적으로 생각하기를 "아, 내가 이 새를 잡을 수만 있다면 허기를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마침내 Rickenbacker는 바다새를 잡아서 먹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장은 고기를 잡는 미끼로 사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새들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Rickenbacker 노인은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그 다음부터 매주 금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작은 새우가 가득 담긴 양동이를 바닷가 부두에 가져와 새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면서 "Thank you! Thank you!"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극히 작은 미물이 목숨을 건져 준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깊이 감사를 표할진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깊은 감사는 죄인된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있을 때 더욱 배가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우리들은 이제 적극적으로 우리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죄많은 여인처럼 용서받은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릴 뿐 아니라 이웃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용서하고 용서받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