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인하기 (마 16: 21-28)
본문
The Way of Discipleship(II)―Denying Oneself
어떤 부자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집(mansion)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천사에게 자기가 거할 집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천국 안에는 정말로 으리으리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가지가지의 저택이 여기저기 즐비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좋은 천국집을 지날 때마다 안달이 난 부자는 여기가 자기를 위한 집이 아닌가 하고 천사에게 연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천사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화려한 저택을 하나 둘 지나가면서 집의 크기나 질이 점점 떨어지게 되자 부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당신이 무엇인가 착각해서 저의 집을 그냥 지나온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천사는 매몰차게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아주 허름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것같은 초가집 앞에 도착했는데 천사는 "바로 여기가 당신이 머무를 천국집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는 너무 놀라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지나온 그토록 화려한 저택이 내 집이 아니고 왜 이런 초가집이 제 집이 되어야 합니까?" "지금까지 당신이 땅위에서 천국에 투자한 것으로는 겨우 이 집밖에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Well, this is all we could build with what you sent ahead.)
우리가 이 땅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주님과 천국을 위하여 살았는가에 따라서 천국에서 우리가 거할 집이 다르다고 하는 유머입니다. 이것은 헌금을 많이 해야지만 좋은 천국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천국생활도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봉독한 마태 16: 27에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천국에서의 대우도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을 기억하고 참회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사순절 기간 내내 어떻게 하면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을까 함께 생각해보는 뜻깊은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라고 고백한 바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무나 흐뭇했습니다. 자기가 공들여 길러놓은 수제자가 자기를 바로 알아본다는 사실, 이것보다 더 보람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마태 16: 21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당신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일절 말씀하지 않으셨다가 이제 이와 같은 메시아 수난을 예언하실 때가 왔다고 믿으신 때문인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베드로가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22절)라면서 주님의 고난을 전면부인하고 나선 일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을 때 생각했던 메사아상은 비극적인 모습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는 승리와 영광의 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패배와 무기력, 수치와 고난, 죽음의 메시아가 아니라 승리와 권능, 영광과 축복, 생명의 메시아만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메시아상을 가졌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시자 안된다고 반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인류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심하게 꾸짖습니다. 16: 23에 보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면서 베드로의 짧은 생각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지 24-26절에 보다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로,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오늘 우리와 같이 어떤 프라이버시를 가진 자유로운 '개인'의 개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개인은 언제나 가족을 비롯하여 공동체의 일부로서 이해되었다고 합니다. 가족이나 공동체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시대가 바로 예수님 시대였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가족이나 공동체와 관련된 것을 끊으라는 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14: 26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족간의 관계나 공동체와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앞설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뒷전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편리나 자기 이익, 명예, 인기, 권세 등을 구하는 자아를 하나님의 의, 자비, 사랑, 평화를 구하는 자아로 바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 안에 '십자가'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모두 47회나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생활에 십자가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을 각오를 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프리카의 한 때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불렸던 Zaire라는 나라에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전한지 100주년이 된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기념식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나이가 몹시 든 한 노인이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인은 자기가 곧 죽게 될 터인데 만일 자기가 알고 있는 이 비밀을 이 시간에 털어놓지 않으면 자기와 함께 무덤으로 영영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 노인의 간증에 따르면 Zaire사람들은 백인 선교사들이 처음 자기 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낸 것이 서양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먹는 음식물에 독약을 조금 조금씩 타서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자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들의 무서운 흉계대로 많은 수의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영문도 모른 채 독약이 든 음식을 먹고 병들어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이들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평화롭게 아무 불평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드디어 Zaire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노인의 증언대로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으며 더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순교자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그저 주님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임을 기억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들은 마태 16: 25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는 말씀 그대로 주를 위하여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복음의 불모지인 Zaire땅에 예수의 계절이 꽃피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의 뒤를 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비록 스승이 걷는 길이 즐거움과 영광 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그 길을 따라야만 합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스승인 예수님에 비하여 너무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못박지 말고 거꾸로 못 박히도록 도와 달라고 스스로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십자가 길을 뒤쫓아가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애쓰는 절기가 사순절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가끔 집에서 프로 레슬링을 지켜 볼 때가 있습니다. 입에 담지 못할 저질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폭력에 가까운 싸움을 벌이는 모습에서 어떤 스릴을 느끼고 또 스트레스를 푸는 제 자신을 생각하면 가끔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어떤 통계보고에 따르면 미국에 사는 두 살에서부터 다섯 살 사이의 어린이들이 하루에 TV를 보는 평균 시간은 약 3시간 30분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또 어른들이 하루에 TV를 시청하는 평균 시간은 약 5시간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일하고 잠자는 시간 다음으로 TV보는 시간이 많다는 통계입니다. 아마 인터넷이 나온 다음에는 TV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 컴퓨터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TV를 보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데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보통 미국 어린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TV나 인터넷을 통하여 약 8천회 이상의 사람을 죽이는 모습과 10만회 이상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청소년들 가운데 살인죄로 체포된 사람의 숫자가 약 55%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 청소년들 중에 질병으로 죽는 사람의 숫자보다도 총기나 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졌다는 보고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사회 속에 사는 폭력적인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 속에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참제가 되어서 폭력을 평화로, 무자비함을 자비로, 교만을 겸손으로, 원수를 용서로, 미움을 사랑으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의 뒤를 쫓아갈 때 이 세상은 분명히 조금씩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Oswald Chambers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When you fear God you fear nothing else, whereas if you do not fear God you fear everything else.)
김흥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