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한 사람
본문
이름 : 김춘섭
날짜 : 2003-03-25 09:22:53 (IP : 202.123.145.54)
조회 : 417
홈페이지 :
딤후 4:6-13
바울을 빼고 기독교와 신약성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약 27권 중에 13권이 바울의 저작으로 되어 있는 정도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고생했던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1. 떠나는 사람
이런 바울이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 자신은 이제 떠날 기약, 곧 죽음이 가까웠으며, 달려갈 길도 마쳤고, 믿음도 지켰다고 합니다(딤후 4:6-7). 그렇지만 함께 하던 자들은, 고난의 끝이 보이지 않고 더욱 길어지게 되자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9-11)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쉬운 법인데, 그것이 사람일 때는 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길을 떠나 보낸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함께 있는 것이 힘들다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떠난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은 세상을 떠난 그들로 인하여 허탈함을 경험합니다.
아마 그래서 바울은 더욱 자신을 향하여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보내고 있는 디모데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솟아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부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외투를 가지고 오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바울의 곁을 떠나간 사람들의 심경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난도 어느 정도까지는 참고 견디지만, 더 이상 어려운 고통이 될 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경우들이 있게 됩니다. 좋은 것이 있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상황을 일단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감옥에 있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는 얘기를 다시 들어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기억하며 그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오직 누가만 바울과 함께 있느니라"
특히 데마라는 사람은 신약성서에 세 군데 나타나는데, 모두 바울과 옥중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누가와 같이 갇혀서 고생하고 있으면서, 바울은 그와 함께 안부를 전합니다(골 4:14). 빌레몬서에서는 마가와 아리스다고 누가와 함께 역시 옥중에서 고생하고 있습니다(몬 1:24). 그는 분명히 복음을 위하여 많은 일을 바울과 함께 하였으며 함께 고난까지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서신 중 맨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디모데후서 오늘 본문 말씀은 가슴 아프게 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리운 사람
그렇게 고생까지 하였던 데마가 바울을 떠나서 데살로니가로 간 이유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옥에 갇히기까지 수고하고 애쓰던 사람, 함께 고난 당하고 무릎꿇고 기도하며 애쓰던 사람, 그런 데마가 끝까지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의 길에서 세상으로 돌이킨 사람들이 많습니다. 환난을 당하니 견디다가 결국 믿음을 저버린 많은 배교자들이 나왔는지를 교회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있는 바울은 누가만 자기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의원으로 알려진 누가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데마가 나오는 곳에 함께 등장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키며 바울과 함께 고난을 나눕니다. 갖가지 병을 가지고 있는 바울과 함께 있는 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형편을 말하면서, 디모데를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을 믿어주고 따라주는 확실한 사람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너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너는 제발 와야만 한다"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더욱 그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직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다른 이들이 다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부르기만 하면 먼 곳에서도 바로 찾아올 수 있는 사람, 내 마음에서 보이지 않는 나의 힘이 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진실로 행복한 일입니다.
바울의 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의 멋진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스승의 곁을 다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떠난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스승의 편지를 받고서 부탁 받은 외투와 책을 들고, 지체 없이 길을 떠나는 디모데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그려봅니다.
3. 한 사람
잭 니콜슨이 열연한 <어바웃 슈미트 About Schmidt>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보험회사에서 은퇴한 슈미트란 사람의 노후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퇴직하고 나니 일이 없고, 예전 직장에 가보아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하루에 77센트로 아프리카의 한 어린이를 도울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는 '엔두고'라는 어린이에게 한 달에 23불 보내면서 편지를 쓰는 일이 고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사고로 죽습니다. 잔소리하던 때가 오히려 좋았습니다. 딸 하나 있는데, 사위가 못마땅하여 결혼을 막는 것을 목표로 삼고 덴버로 갔다가 딸에게마저 버림을 받습니다.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외로운 자기를 발견하고는 남은 것은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집에 들어섭니다.
편지함에 여러 통의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엔두고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수녀가 대신 써준 것으로, 병에 걸렸었지만 고비를 넘겼고, 감사하며 살고 있다면서 그림을 보내왔습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며 슈미트는 눈물을 흘리며, 삶의 용기를 다시 가집니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도움으로 용기를 얻은 소중한 한 어린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새 자신도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서 새로운 삶을 향한 힘을 가지게 됨을 깨닫습니다.
계산에 의하여 사람들은 모였다가 흩어집니다. 속된 말로 차버리기도 하고 차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쉽게 모였다가 미련 없이 사라집니다. 가정조차도 너무 계산적이 되어 너무 쉽게 만났다가, 만난 것보다 더 쉽게 헤어집니다. 무슨 인정이나 아쉬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 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과 형편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이저가 "부루터스, 너 마저도!" 하며 숨져갔다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얽혀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배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아름다운 인간관계로 엮어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까?
모든 이들이 다 떠나도 부르면 언제나 올 수 있는 이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또한 누가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그 한 사람으로 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누군가가 나를 부를 때, 고독하고 어려운 인생 길에서 나를 오라고 하였을 때, 열 일 제쳐놓고 달려갈 수 있는 마음과 영혼의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런 일은 험난한 삶을 극복하게 합니다. 모든 인생의 악조건을 뛰어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그는>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이 시의 '그'와 '나'를 바꾸어서 다시 읊어보기도 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 인생의 아픔이 되기도 하고, 이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된 우리 인생 길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내가 이 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 존재한다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이 한 분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