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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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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



이름 : 김춘섭
날짜 : 2003-01-19 12:03:14 (IP : 202.123.145.54)
조회 :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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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13

보내고 있는 주현절기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을 기념하며 특별히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지난 주일은 예수님 세례기념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신 것과 또한 그 예수님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내 사랑하는 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어 죄 많은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죄지은 자가 죄를 용서해 주는 자에게 받아야 마땅한데, 그 반대의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처음부터 자기를 부인하는 철저한 겸손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 머리를 세례요한에게 맡기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는 자기를 낮춥니다. 그리고 그 낮아지심은 바로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려온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이 한 마디 말씀, 예수님 편에서 보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다"라는 이것 하나로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자격을 계속해서 자각하시고 결코 잊은 적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만 원하셨다면 고백하는 자가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셨을 경우에 한해서였습니다.

주님은 겪으신 이 세상의 온갖 고난과 고초는 복음서에서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경우를 당하시어 기도도 많이 하셨습니다. 때로는 한적한 곳에서, 때로는 산에서, 또 때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랑 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위치를 조금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구로부터 더 인정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답답해지지 않습니까? 속이 상하지 않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사랑 받는 하나님의 아들 딸 맞습니까? 그러면 되었지 않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없으니까 사람으로부터 자꾸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무시당하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없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시당한 것으로 말하자면 주님보다 더 한 분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이런 조롱과 무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잊지 않는 자세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귀중한 바탕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어떤 교만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기를 부인하는 일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일도 그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내 기뻐하는 자

하늘에서 들려온 또 하나의 내용은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무조건 기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라고 다 부모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들의 하는 일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시고 그것을 뛰어넘어 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주님의 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뉴질랜드에는 아름다운 교회당들이 많았습니다. 역시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정성을 들여 지은 것입니다. 자동차 여행 중에 잠시 쉬면서 아름다운 예배당 하나를 보았습니다. 잠시 차에서 내려 바깥에서 살폈는데, '성 안드레교회'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어느 교파인지 궁금했는데, 자세히 보니 교회 이름 밑에 작은 글씨가 있었습니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공동교구 교회(co-operating parish presbyterian/methodist)라고 쓰여있었습니다. 두 교회가 합친 것입니다.

그런데 합친 이유는 교인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아름다운연합교회 이야기를 했더니 부러워하였습니다. 자기들은 교인 숫자가 줄어들어서 합친 것인데, 너희들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한 것이니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나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습니다. 수많은 눈물을 흘렸어도 이런 노력이 없으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의 은총이란 바로 자기를 뛰어넘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는 일은 무익한 종의 고백처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달 닥쳐온 태풍이 우리의 삶을 많이도 흔들었습니다. 속상한 일이 도를 뛰어 넘었습니다. 집과 차와 자연만 흔들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실 것입니다만 지금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은 그런 흔들림에서 꿋꿋하다고 믿고 있습니까? 지금의 신앙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계실까? 이런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있거나 무엇 때문에 기분 좋아하고 있습니까? 지금 무엇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차 있습니까? 무엇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내가 가장 염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작한 사업으로 인하여, 자식 문제로 인하여 잠이 오지 않고 답답해 할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로 인하여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이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를 인하여 염려하고 걱정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괜찮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더 큰 문제가 있어서 뒤로 미루었습니까? 진정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더 소중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 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

지난달의 태풍으로 인하여 항공기가 끊어져 사이판을 갔다가 서울을 거쳐 뉴질랜드로 갔습니다. 사이판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면서 임마누엘교회에 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하고있는 기구한 운명의 한 조선족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화장해서 남은 자기의 재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뿌리게 해달라고 유언을 남겨 그 남자의 부모가 유골을 전해주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도 심장병이 있어서 이대로는 수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있는데, 그것을 아는 남자가 자기의 심장이 여자에게 맞으니 이식해 주라고 하여 경제사정이 괜찮은 남자 집에서는 병원에 맡긴 심장으로 이식수술을 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죽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혼자서 사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기는 주어진 시간 힘을 다하며 열심히 살다가 그대로 죽는 것이 더 의미가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토록 나를 사랑했으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확인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 하는 주님의 이 한 말씀으로 부족합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것도 더 채워야 합니까 이 말씀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이 말씀 하나로 우리의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밑거름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주님에게 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음성으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가 그 주님께 기쁨을 돌리면 그것 이상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생애도 예수님처럼 이 두 말씀이면 족하지 않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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