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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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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1:1-11
인생에서 최대의 저주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너는 쓸모 없는 존재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따라서 최대 축복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쓸모있고 가치있는 사람입니다”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를 통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 마을까지 왔을 때의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건너편 마을에 가면 큰 나귀와 작은 나귀 한 마리가 묶여 있을텐데 가서 풀어 끌고 오라. 그리고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건너 마을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베다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첫째, 예수께서는 나귀가 거기에 매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나귀 한 마리는 우리네 농촌의 소 한 마리처럼 농사살림의 밑천이었을텐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사복음에 모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가 490년전 이미 예언했었다”는 이 내용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구약에 예언된 왕의 왕국 입성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 나귀 새끼가 이날 이렇게 영광스럽게 쓰임받을 것을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귀새끼 한 마리를 향하여 이토록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세워 놓으셨을까요?
여러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고, 이 땅에 보내시기로 만세 전에 작정하셨으며,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시려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고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하고 맞바꾼 소중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요?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시시하게 아무런 의미없이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딤후2:20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이 땅에서 몇 번 쓰임 받다 깨어지는 그릇 하나까지도 쓰임의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여기 큰집은 하나님의 집이요, 그릇은 우리 인생입니다.
그리고 큰집에는 금. 은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한 그릇이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얼마를 가졌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받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가치가 있고, 행복할 수 있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순간순간, 자리자리마다 우리는 감격하며 “하나님 예언의 응답이 나다. 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다”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의 주권입니다.
예수님은 마을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기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을 아셨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주인은 “주가 쓰신다”는 두 제자들의 말 한마디로 괭이나 삽 한 자루가 아닌 나귀를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 주경학자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쉽게 아셨을 것이라고 쉽게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런 것까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셨을까요?
저는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을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체 그림이 아주 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한번도 예루살렘에서 주무시지 않으시고 그때마다 베다니에 오셔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시고, 말씀도 나누었고, 그곳에서 주무셨습니다.
베다니라는 말은 슬픔의 집, 가난한 집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 마을에서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을의 나병환자를 고치셨고, 죄많은 여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으며, 죽은 자를 실리셔서 소망과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다니는 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있고, 발 밑에 앉아 말씀을 즐겨 듣던 마리아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그를 살려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베다니 마을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막14:1-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그 당시 장정들의 연봉에 해당하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성 속에서 무명의 헌신 자, 나귀 주인 역시 자신의 소유인 나귀를 예수님께 내어 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을 내어 준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주권의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내 것과 예수님 것의 구별이 없는 그때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신비의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친밀한 가족이었기 때문에 어디에 누구의 나귀가 매여 있고, 어디에 어떤 나귀가 있는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억지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흔쾌히 내어놓을 것도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가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베다니 사람들은 이미 천국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며, 헌신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3.가슴마다 예수의 피가 묻어야 합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만큼 이 본문은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베다니 사람들을 방문하고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따라 예수님은 마을을 찾아오시지 않고 나귀만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베다니 사람들은 천국가족으로서의 관계성에서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이번 여행이 어떤 여행길인지 알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는 길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나귀를 드리는 것은 예수의 인류 구속을 위한 십자가 죽음을 준비해 드리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헌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흘러야 합니다.
주일 날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속엔 예수의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마다 선생님의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목장 식구들을 가슴에 안고 기도할 때마다 내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주님의 주권이 나타나 “주님이 쓰시겠다”하면, “예, 언제든지 저를 쓰십시요”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매인 나귀를 풀어 끌고 와야 주님이 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사업과 물질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묶인 것들이 풀어지고 주를 위해 바로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질병에 묶여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묶인 질병이 풀어지고 건강이 주를 위해 올바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이 쓰지 않으시면 마귀가 나를 쓰게 됩니다.
내 시간을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을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사탄이 침략합니다.
내 물질을 주를 위해 쓰지 않으면 세상이 빼앗아가 갑니다.
내 육체를 하나님 영광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노예가 됩니다.
지난 주 어떤 성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그 성도로부터 이런 고백을 들었습니다.
“내가 이사 다니며 여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긴 인생을 살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해 봤고 저런 일도 해 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다 해보았는데, 돌이켜 보면 지치도록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이 성도만의 고백이고, 이 한 분만의 간증이겠습니까?
나의 고백이요 여러분의 고백이 아닙니까?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계획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주님이 필요로 하는 일에 쓰임받을 때마다 집중하여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창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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