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본문
로마서 9:1-5
지난 수년간 외래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중요사안이 논의될 때마다 언론에 회자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라는 뜻을 가진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입니다.
노블리스는 “귀족”을 뜻하는 말이고, 오블리제는 “의무”를 뜻하는 말로서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귀족의 의무”라는 뜻입니다.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로마시대에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높이는데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갑자기 유행한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귀족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나 사업가들이 존경받을 수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귀족들 특히 부자들은 가질수록 평민들과 더 나누고 더 베품으로 리더십의 존경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사회에 고갈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모두가 신앙을 갖는 순간부터 특별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늘나라의 기업을 받게 되고, 영생을 소유하고,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응답받는 삶을 살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녕 특권중의 특권을 부여받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런 특권에 부응하는 의무를 다하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소위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정말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과 특권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권과 기대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특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4-5절을 읽겠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되는 순간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1)양자 됨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그들이 이제는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4:22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고, 신14:1에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2)영광을 경험하는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성막이나 성전에 들어 갈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영광 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3)언약들을 선물로 받은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하시고, 모세와 언약하시고, 다윗과 언약하십니다.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괜히 자녀들과 약속을 하시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4)율법을 수여받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를 산위로 부르시고 그들의 새로운 삶의 규범이 될 거룩한 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그들의 삶의 원칙이 되고 삶의 표준이 된 것입니다.
삶의 방향자체가 혼란한 세상에서 분명한 표준을 갖고 살수 있다는 것이 특권이 아닌가요?
5)예배의 특권입니다.
구약에서는 피조물이요 죄인된 인생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날마다 대면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특권입니까?
6)약속들을 붙들고 사는 특권입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약속은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희망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약속들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날마다를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7)명예로운 조상들을 갖게 된 특권입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아모스, 느헤미야, 등 자랑할만한 조상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가 한 300명되는데, 그중 100여명이 모두 유대인 출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체 수상자의 약 30%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집안에서 군수만 나와도 자랑인데, 이스라엘인들은 얼마나 자랑거리가 많은 백성들입니까?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뉴튼, 색채의 마술사 샤갈, 작곡가 쇼팽,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정신 분석학의 원조 프로이트, 세계 경제계의 큰손들이요, 투자가들인 그린스펀, 조지 소로스모두가 다 유대인들입니다.
거기다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육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여러분, 이스라엘이 자랑할만한 특권들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을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이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2.그것은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외적인 특권들이 그들을 자동적으로 특권을 누릴만한 자로 만든다고 착각하여, 오히려 그 특권이 그들을 눈멀게 하고 오판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게 할 수 있는 조건들인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선민이 되기 위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모태 교인들이 종종 빠지는 신앙의 함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이기 때문에 나도 자동적으로 신앙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책임과 상관없이 자기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도 신앙인이 된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디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이라는 분은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의 결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부모가 신앙인이라는 것은 축복된 특권이지만, 그것이 나를 자동적으로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오죽하면 모태 교인을 “못해요 교인”이라고 말하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특권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롬9장 전체를 살펴보면,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있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태어남이 아닌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영적인 태어남의 중요성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여러분, 이삭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사라의 잉태가 더 이상 불가능한 가운데에서도 마침내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삭이라는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환경 안에 태어나거나, 교회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내가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믿음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누리는 그 어떤 특권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31-32절을 읽겠습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관적인 의에 근거한 행위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율법을 읽고 토론했고 남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봉사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을 의롭게 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종 좋은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내가 그런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그런 수준에 와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좋은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다.
듣는 것이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들음은 중요하지만 그 들음을 행함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최선을 다해 행하더라도 나의 행함은 여전히 주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걸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의 보혈을 믿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이런 여러 가지 우월한 민족적, 사회적, 종교적인 특권들을 소유하고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골육 친척들을 인하여 사도 바울은 안타까워하며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자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제발 이런 답답한 저주의 자리에 있는 내 가족 내 이웃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주변에는 이런 답답한 영혼들이 없는지요?
인생의 여러 특권을 즐기고 사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주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고 저주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출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어떤 권세를 붙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그들에게 이제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전도요,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 소식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들, 그리고 익산 시민 더 나아가 땅 끝까지라도 가서라도 아직도 이 진리를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전해주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창훈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