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함을 입은 자 "
본문
민수기 1장 1절 ~2장 34절
석기현 목사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갑자기 무슨 운동 시합 따위를 하게 될 때면 먼저 편을 갈라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경기가 재미있게 되기 위해서는 양쪽이 다 전력이 비슷하게 되어야 하는데, 평소 실력들에 대한 무슨 공식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 참고할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생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통 사용하는 방법은 자기와 실력이 대충 비슷해 보이는 사람끼리 두 명씩 짝을 짓고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긴 사람들과 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두 편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도 괜찮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혹 때에 따라서는 한 쪽으로 전력이 치우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그 곳의 아이들은 좀 더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생기면, 우선 제일 잘하는 사람 두 명을 각 팀의 주장으로 선정하고 그 둘이서 일단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그리고 이긴 주장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 팀에 넣고 싶은 사람을 한 명씩, 그 두 사람이 각각 번갈아가며 마음대로 지적해서 뽑아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일 잘하는 순서대로 교대로 양쪽 팀에 들어가게 되니까 결과적으로 가장 공정하게 편이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이 방법에도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이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대표자에 의해 불려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게 되는 사람입니다.
곁에 있던 친구들은 일찌감치 하나둘 스카우트되어 나가는데 끝까지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고 있을 때 그 창피스러움과 자존심 상하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한 팀을 구성하는데 그 자격과 가치에 있어서 남보다 뒤떨어진다는 것과 그것이 또한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펼치고 있는 본문은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교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출애굽을 통해 큰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받고 또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출발하려는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지시를 내리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장대한 광야행군을 앞두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팀워크를 다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광야교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로 계수함을 입었습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이 교회 안에서 과연 어떤 일을 위하여 주님께로부터 호명을 받고 뽑히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1. 교인들은 사단과 싸우는 전투에 나갈만한 병사로 계수함을 입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레위 지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파에 적용된 것이었습니다.
본문 2절로 4절에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 매 지파의 각기 종족의 두령 한 사람씩 너희와 함께 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명하시면서 그 목적을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이 인구 조사에서 유독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들만 그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군대 편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닥쳐올 광야생활은 단순한 나그네의 행진이 아니라 항상 전시하에 있는 나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그 전에도 여러 이방 민족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이겨나가야만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앞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5절로부터 19절까지 기록된 대로 각 지파마다 두령을 임명하고 전투에 동원될 수 있는 장정의 숫자를 점고하여 전 이스라엘을 군대 편성 체계로 재조직하게 됩니다.
본문 20절로부터 43절까지는 각 지파별로 계수된 인구조사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데 매 지파마다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라는 문구가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두 지파들의 총계를 기록하고 있는 44절부터 46절의 말씀에 보면 "이 계수함을 입은 자는 모세와 아론과 각기 이스라엘 종족을 대표한 족장 십 이인이 계수한 자라 /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그 종족을 따라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가 이스라엘 중에서 다 계수함을 입었으니 /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전투력 있는 장정 수자가 육십 만이었다면 실제 이스라엘 백성의 총계는 여자와 아이들을 합쳐서 이백 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교인을 계수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귀와 대항해서 도무지 싸울 능력이 없고 그저 자기 신앙만 간신히 지키고 있는 '영적 노약자와 여인' 같은 교인들을 다 합쳐서 세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남을 돕고 무엇보다도 교회 밖에 있는 불신앙적인 세력과 대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을만한 영적 전투력을 가진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의 숫자만 계산하는 방법입니다.
목사가 자기 교회의 교인들을 이끌고 무언가 주님의 사업을 힘차게 이끌어나가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은데, 그 교인들 가운데 '싸움에 나갈만한 자'는 얼마 되지 않을 때 그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복음사업에 힘이 되어 주기는커녕 담당 교역자들이 그 사람의 주일 출석부터 매주일 신경 써야 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보다는 걱정이 앞서게 되는 그런 '노약자와 여인' 같은 교인들만 모인다면, 아무리 교인 수자가 많다고 해도 많은 만큼 오히려 더 큰 고역이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에게도 그렇다고 한다면, 그처럼 자기 믿음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날마다 시험받고 날마다 흔들리는 그런 약골 교인들만 가득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위에서 내려다 보시기에는 또 그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모름지기 신자가 불신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전투 나팔을 불고 악한 마귀를 향하여 성령의 검을 휘두르면서 나아가야 할 터인데, 공격은커녕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마치 외줄타기하는 사람처럼 항상 아슬아슬한 신앙생활을 위태롭게 겨우 유지해 나가고 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그런 교인을 '장정'의 계수에 넣어 줄만 하시겠습니까?
자기가 지금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통계 수자에 계수되기만 하면 다 된 것이라고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교회생활이란 것이 다른 교우가 더 많이 흘리고 있는 땀의 덕택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아직도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여인' 같은 교인의 수자에 들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남편이나 아내가, 자식이나 부모가, 전도사나 목사가 날마다 눈물로 기도해 주는 덕택에 간신히 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그저 '남의 도움이 필요한 노약자'의 수자에 계수되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혼자의 신앙만 간신히 지키는 그런 부끄러운 명단에 들어가는 교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개인 신앙 파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과 가족과 교우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사단과 직접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적 장정,' 오늘도 주님께서 당신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찾고 계시는 이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로 계수함을 입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역자는 예배를 위시한 특별사명을 책임 있게 수행할 직분자로 계수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인구조사에 유독 특별예외가 된 레위 지파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었습니다.
1장 47절로부터 53절에 "오직 레위인은 그 조상의 지파대로 그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 레위 지파만은 너는 계수치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 그들로 증거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장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장막 사면에 진을 칠지며 /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 이스라엘 자손은 막을 치되 그 군대대로 각각 그 진과 기 곁에 칠 것이나 /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계수에 넣지 말라"는 말은 일반 전투를 위한 군사의 수자에 넣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은 다른 특수 임무를 위해 부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성막에 관계되는 모든 직무들이었습니다.
레위인이 성막을 위해 섬기는 제반 업무는 본문 50절과 51절에 간략하게 나타나 있지만 나중에 3장과 4장에서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는 레위인이 자기 직무에 대하여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서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키라"는 말씀이 뚜렷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증거막 즉 성막을 섬기는 일에 책임을 지키라.'는 말씀은 우선 그 일이 자기들에게만 주어진 고유의 직분임을 레위인들 스스로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레위인 고유의 직분이었는고 하면, 만일 "외인" 즉 다른 지파 사람이 "가까이 오면" 즉 그 레위인이 성막 일을 하는 근처에 접근해 오면 그 외인을 "죽일"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증거막에 대한 레위인의 둘째 책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증거막에 대하여 지켜야 할 자세를 철저히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곳에 함부로 가까이 다가오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레위인은 진을 칠 때에도 증거막 사면을 둘러싸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백성들의 잘못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꾸어 말한다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 앞으로 올 때 준비되지 못한 불경한 자세로 나아오는 일이 호리라도 없도록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증거막을 책임 있게 섬기게 하기 위하여 레위인만을 특별히 계수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아까 "싸움에 나갈만한 자"는 평신도를 주요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 두 번째 말씀은 오늘날의 교역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레위인으로 계수함을 입었다면 정말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키는' 목사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이 얼마나 신성한 고유의 직분인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성례를 실시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이 사명은 목사가 정말이지 자기 목숨을 걸고서 책임지고 완벽하게 지켜나가야 할 직무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고유의 직분'인 것입니다.
왜 오늘날 목사가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왜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라는 직분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고귀한 직분이라는 사실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목사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교인 쪽의 문제보다도 먼저 목사 자신이 자기의 직분을 정말 책임 있게 바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자기에게 주어진 영적 고유 영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요 또한 교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목사는 또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오는 법을 지키도록 가르치며 인도해야만 할 책임이 있는 것을 단 한 순간에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교인들이 목사의 직분을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침범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제멋대로 불경스럽게 출입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자기 몸을 바쳐서 바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약간의 실례를 범하는 교인에게는 당장 화를 벌컥 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그저 무심하게 넘기기만 하는 목사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그 얼마나 악한 청지기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가만 내버려 두는 목사는 결코 '사람 좋은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회중에게 임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정말 뻔뻔스러운 거짓 선지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신 고귀한 직분을 위하여, 그리고 맡은 양무리들을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로 나오도록 이끌기 위하여 정말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씨앗의 각오가 되어 있는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 이 부족한 종을 위시한 경향제단의 모든 교역자들이 이처럼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키는' 자들로 주님 앞에서 계수함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3. 모든 신자는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진치고 진행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계수함을 입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싸움에 나갈만한 자'나 '증거막을 책임질 자'에게나 공통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곧 2장에 기록된 사실, 곧 '회막을 중심으로 진치기도 하고 진행하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장 1절과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행군을 멈추고 어느 지점에 진을 칠 때 회막 즉 성막을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세 지파씩 사면을 둘러싸는 방형진(方形陳)을 치라는 말씀입니다.
또 2장 17절에 보면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과 함께 모든 진의 중앙에 있어 진행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그 위치에서 그 기를 따라 앞으로 행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행진할 때의 대형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세 지파씩 한 대(隊)를 이루어서 일대, 이대, 삼대, 사대로 나뉘어 종대로 진행하는데, 성막은 이대와 삼대 사이 즉 행진하는 "진의 중앙"에 위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2장 3절부터 16절과 18절부터 31절까지는 이상과 같은 진 배치와 진행 배치를 각 지파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2장 마지막 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가족과 종족을 따르며 그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진행하기도 하였더라"고 기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2장 말씀의 요점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칠 때나 진행할 때나, 잠잘 때나 행동할 때나 할 것 없이 항상 회막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족적으로나, 종족을 따르거나 지파를 따르거나를 막론하고 항상 궁극적으로는 모든 삶의 구심점을 오직 성막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워 있을 때에든지 걸어갈 때든지 항상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증거막 중심의 배치와 대열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살아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이처럼 성막 중심으로 똘똘 뭉치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진짜 오합지졸의 무리로 전락했을 것은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 아니었겠습니까?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바로 철저한 '교회 중심'을 삶을 가르치는 말씀임에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싸울만한 힘 있는 평신도와 증거막을 책임지는 목회자가 오직 교회를 같이 붙잡고 그것을 중심으로 뭉쳐서 둘이 함께 이 광야 같은 세상을 통과해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자신의 생활 터전을 오직 교회를 중심하고 진을 치고 살아야 합니까?
왜 기독신자는 개인의 인생 설계를 오직 교회를 한가운데에 놓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삼고 계획하며 진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가 우리 생활과 인생에 참 생명과 힘을 공급해 주는 기지요 본부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애굽의 전쟁사에 보면 애굽 군대는 왕을 가운데에 모시고 그 주위로 소위 방형진(方形陳)을 쳤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옛날 전쟁에서는 왕이 죽으면 그 순간 지는 전쟁이 되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왕을 보호하고자 함이 그와 같은 진형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미 해군은 기동함대를 조직할 때 항공모함을 중심에 배치하고 그 주위를 전함과 순양함과 구축함과 잠수함들이 둥글게 호위하는 이른바 윤형진(輪形陣)을 펼쳤읍니다.
아무리 다른 배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만일 아군의 항공모함이 침몰당하면 그 나머지 함대 전체는 오로지 적군 함재기의 밥이 될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모양의 진을 치고서 행군하며 항해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왕이 살아야 나도 살 수 있고 일단 항공모함이 건재해야 우리 편이 이길 수 있다는 바로 그 한 가지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중심의 생활이란 것도 꼭 같은 원리 때문입니다.
교회가 잘되어야 내 신앙이 살고 교회가 힘을 발휘해야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축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목사나 교인이나 할 것 없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까닭에, 저나 여러분이나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일단 교회부터 지켜놓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이라 하면서도 교회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늘 진 밖으로 떠도는 교인, 목사라 하면서도 자기가 먼저 교회중심으로 사는 본을 보이기는커녕 사욕만 챙기는 목사 - 이런 꼴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세상 불신자가 볼 때에도 기본적인 오와 열도 맞출 줄 모르는 실로 무질서하고도 무능력한 집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중심으로 진치고 진행하도록 가르치는 목사와 그렇게 살아가는 교인, 이 땅에 이름뿐인 하고 많은 교인들 중에서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진을 치기도 하며 진행하기도 하는' 참된 신자로 확실하게 계수함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출애굽의 구원과 시내산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광야교회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총을 받고 성경 말씀의 명령을 받은 성도들은 이제 지상교회를 통하여 그 남은 신앙생활의 행진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와 의를 위한 선한 싸움에 쓰일만한 장정들만 세어 보신다면 이 자리에 모인 교우들 중에서 과연 몇 명이 계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목사, 전도사 이름 가진 사람들은 부지기수이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이루고 계시는 이 위대한 구속사에서도 어떤 특수한 임무를 위하여 특별한 팀을 구성하신다면 우리 경향의 교역자들 중에서 과연 몇 명이 뽑힐 수 있겠습니까?
이 민족이 원수의 손에 넘어가려 하는 위기 상황을 맞이하면서도 더욱 교회중심으로 주님께 대한 신앙을 파수하고 성도에 대한 신의를 지키면서, 죽을 때 같이 죽더라도 이 경향의 진과 경향의 대오에서 낙오하지 아니할 '끝까지 남은 자'의 수자에 저와 여러분들 중에 과연 얼마나 계수될 수 있겠습니까?
기왕에 뽑힐 것이라면 일찍 뽑히는 것이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마지막 호명에 간신이 불리는 것은, 물론 그래도 팀에는 들어가니까 다행스러운 것이지만, 역시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또 뽑히더라도 아무나 다 뽑히는 명단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 자랑스러운 일도 못될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구원 받을 명단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이름 불리는 것은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이"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이지만,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형제 성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할만한 소수의 특수 부대에 뽑히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최상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목사들은 교인 등록 수자에, 출석 수자에 매주일 온 신경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광야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그저 주일날 교회당에 앉아 있는 머리수자만 세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수하시는 법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충분히 팀에 들어가 있겠지.'하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단에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지 않으시든지 혹은 부르시더라도 맨 꽁지로 불러 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큰일이고 창피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비록 적은 수자의 모임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계수하시는 수자에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저와 여러분은 정말 긍지를 가진 신자로서 자랑할 만한 교회를 함께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남에게 신세만 지는 노약자에서 벗어나서, 이제부터는 자기도 싸움에 나가 힘을 도울 수 있는 장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 좋기만 한 목사는 오히려 자기 영혼을 죽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삯군인 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엄히 가르치는 교역자들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오산인지를 깨닫고,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살며 기동하는 은혜와 축복을 꼭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전투력 있는 신자로, 책임감 있는 교역자로서 하나님 앞에 계수함을 입어서 다 함께 이 교회를 중심으로 저 가나안 복지에 이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