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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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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시편 136편 1-26절
석기현 목사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제목의, 짧지만 감동 깊은 그림동화가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어떤 나무 한 그루와 같이 놀면서 자랍니다.
그 소년은 매일같이 그 나무를 찾아와서 기어오르기도 하고 그네도 타기도 하면서 놀다가, 지치게 되면 그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곤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년이 나이가 들면서부터 그 나무를 찾아와서 놀다 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 대신에 자기가 무언가 필요한 것이 생길 때마다 그 나무를 가끔 찾아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 나무는 자기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소년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줍니다.
소년이 돈이 필요할 때에는 자기 열매를 따 가서 팔아 돈을 벌게 해주고, 소년이 집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자기 가지를 몽땅 베어서 목재로 쓰게 해주고, 나중에 소년이 먼 나라로 여행 가고 싶다고 하니까 자기 둥치까지 완전히 잘라서 배를 만들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장면에 가면, 다 늙어버린 소년이 다시 자기를 찾아오니까 그 나무는 이제 자기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밑둥을 그 소년이 앉아 쉴 수 있는 자리로 제공한다는 스토리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 절로 생기는 의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과연 그 소년이 그 나무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무 편에서는 소년을 향하여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었고 그 때문에 행복해했지만, 그 소년 편에서는 과연 그 나무를 얼마나 사랑하고 감사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동화 내내 한 마디도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자는 일부러 독자들로 하여금 그런 궁금증이 들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도 그 소년의 경우처럼 누군가 자기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있지나 않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절부터 3절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이 시편 기자가 노래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여호와께 감사해야 할 이유를 종합적으로 모아서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인자'라고 번역된 말은 '헤세드'라는 히브리어로서 헬라어 '아가페'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유명한 단어입니다.
단지 '아가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반면에 이 '헤세드'는 '하나님의 한없이 깊고 넓은 사랑'을 가리킵니다.
다시 표현한다면, '아가페'는 하나님 사랑의 질적인 특징을 강조한다고 한다면, '헤세드'는 하나님 사랑의 양적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좋은 것들을 베풀어주시는 일에 그 사랑과 능력을 동시에 발휘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감히 비길 수 있는 다른 신이나 세상의 통치자는 전무후무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시편 기자는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고 연이어서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지극히 '깊고 넓은' 인자하심, 즉 양적으로 한이 없는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늘 너무나 풍성하게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를 잊어버리기 쉬운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아낌없이 베풀어주고 계시는 사랑이 어떤 것들인지를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은 우리에게 우주와 세상이라는 시공계를 만들어주심으로써 나타났습니다.

4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문단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제일 먼저 베풀어주신 큰 일이 바로 창조사역이라고 일깨워줍니다.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라는 뜻이 바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상이나 사람이 결코 행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뜻인데, 바로 천지만물의 창조입니다.

5절에서 그 창조주를 가리켜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라고 했듯이, 우주는 옛날 사람이나 현대 사람에게나 영원히 신기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지식과 과학이 발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만들어놓으신 저 무한한 공간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라는 말씀은, 천지창조 제3일에 물과 뭍을 분리시키신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은 발을 디디고 살 수 있는 땅이라는 공간을 오늘까지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7절에서 "큰 빛들을 지으신 이"라고 할 때, 이 '큰 빛'들이란 바로 그 다음 8절 이하에 나오는 해와 달과 별들과는 구별되는 빛으로서, 바로 천지창조 첫날에 만드신 빛, 즉 우주라는 시공계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셔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심으로써, 사람에게는 일자와 연한이 생기게 되고 사물을 판단하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만물을 먼저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신 후에야 비로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자연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위하여 미리 예비해 주신 적합한 생존환경으로 예비되었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자연 속에서 우연히 더 잘 진화되어서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며 그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서 당신께 영광을 돌릴 존재로 애초에 계획하시고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하나님의 한없이 인자하심을 제일 먼저 보여준 사건입니다.
사람이 기식하며 살고 있는 공간계, 사람이 수한을 누리며 살고 있는 시간계,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거지와 배경이 되는 이 세계를 바로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두 발을 대지에 딛고 공기를 호흡하면서 사시사철과 주야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집이라는 기본 환경이 없으면 아무리 선남선녀가 만나고 서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되어도 가정이라는 것을 꾸밀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학생이 똑똑하고 훌륭한 선생까지 있다 하더라도 학교라는 가르침과 배움의 기본 터전이 없으면 교육이라는 것이 시작도 될 수 없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이 우주와 지구라는 시공계가 먼저 준비되고 매순간마다 유지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제 아무리 살고 싶어 하고 일하고 싶어 하고 생명의 낙을 누리고 싶어 하고 자신의 지식과 힘을 다 발휘하면서 생존하고 싶어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누가 주신 것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하늘이라는, 무너지지 아니하는 지붕을 주시고, 땅이라는, 꺼지지 아니하는 바닥을 주셨습니까?
누가 오늘도 '바닷물의 경계를 정하사 뭍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켜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저 광활한 천체, 저 수많은 항성과 행성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리시면서 사람의 존재를 위하여 시공세계라는 이 부동의 근거지를 유지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 '큰 기사'를 행하실 수 있는 분은 진실로 오직 참 신, 전지전능하신 절대자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도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공 세계가 그저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혹은 원인도 알 수 없게 존재해 왔다고만 간주하는 것은 자연계에 대한 가장 큰 무지일 뿐 아니라 또한 창조주에 대한 중대한 배은망덕이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우주와 세상을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들을 오늘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완벽하게 제공하며 누리게 해 주시는 이 하나님, 실로 '모든 신에 뛰어나신' 여호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신 구원을 통하여 증거되었습니다.

계속해서 10절부터 15절에서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감사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이 시편 기자는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감사제목을 노래하고 있는데, 바로 출애굽의 구원이었습니다.
10절에서 말하는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라는 표현은, 그 출애굽 구원의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사건을 강조합니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재앙들이 많지만, 한 민족의 장자들만 몽땅 다 죽는다는 것은 역사상 비슷한 유례조차 찾을 수 없는 최대의 재앙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그 종 되었던 땅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아낌없이 동원하시던 중에 바로 이 재앙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원수에게 치명타를 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시기" 위하여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을 애굽과 섞어놓아 둘 수가 없으셨고 반드시 완전히 구별해내셔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시는"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홍해를 가르신 이"와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를 감사하는 것이 그 사건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일단 출애굽한 이후에 곧 맞이하게 된 홍해는 그들을 순식간에 완전절망 상태로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전무후무한 기적, 바다를 가르시고 그 사이에 마른 땅의 길을 내시는 기적을 베푸셔서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 기적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사회생의 구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연쇄효과, 즉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다시는 쫓아올 엄두도 못 내게 만드시는 최후의 일격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저주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헤어날 길이 없는 절망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망 가운데 꽁꽁 묶여서 세상의 임금 노릇하는 사단의 손아귀에서 영원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으리라'는 일대역전승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구원 작전, 십자가 대속이라는 경천동지할 사역을 통하여 원수 사단의 정수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망성 밖으로 끌어내어 주신 성도를 또한 끝까지 보존해주시는 일에도 변함없는 사랑과 능력을 발휘해 주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함을 받은 성도까지도 미혹하여 넘어뜨리려고 끝까지 쫓아오는 사단의 집요한 추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셔서라도' 한번 십자가로 대속해 놓으신 성도는 절대로 놓치지 아니하시고 계속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 가운데서 장망성 세상에 사로잡힌 종으로 절망적으로 살 수밖에 없던 우리들을 그 곳으로부터 나오라고 불러내어주시는 '소명'부터가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음성입니다.
구원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죄사함을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이루어줄 수 있으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희생제물로 삼으시는 기상천외의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주신 것은, 사실상 무슨 '사랑'이나 '인자'니 '헤세드'니 '아가페'니 하는, 사람의 그 어떤 언어나 단어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중생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의 연약과 실족에도 불구하고,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해 놓으신 사람은 끝까지 견인(堅忍)하게 힘주시면서 끝내 영화(榮化)의 자리에 도달하게 하고야 마시는 것은 너무나도 믿음직한 인자하심의 발로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사랑, 자기 백성을 끌어내시고 당신의 품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이 위대한 사랑의 힘을 끊을 존재가 하늘 위에도 땅 아래에도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돈을 쓴다든지,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라든지, 혹은 시간을 내어주거나 노력을 동원해 줌으로써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듯이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죽어 마땅했던 죄인을 당신의 친구라고 불러주시면서 베풀어주신 이 최대최고의 사랑을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런 배은망덕을 저지르는 자를 장차 지옥의 영벌로 심판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가장 강한 손'이 동원된 십자가 사역,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가장 넓게 펴신 팔'이 펼쳐진 독생자 대속,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베풀어주신 이 구원의 은혜 앞에서, 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자하심을 뜨겁게 감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인자하심은 우리의 국가안보와 생존보장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6절 이하 25절에서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영원한 사랑은 천지창조와 출애굽 구원에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하게" 하시는 일을 통하여서 계속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생활 중에 무엇보다도 주변 이방민족들의 위협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7절과 18절에서 노래하듯이 "큰 왕들"과 "유명한 왕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가장 시급한 현안문제였습니다.
물론 그것 역시 19절과 20절에서 대표적으로 예를 들고 있듯이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같은 가나안의 강력한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심"으로써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위협을 제거해주셨습니다.
나중에 23절과 24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듯이, 실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 즉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에도 '기념' 즉 기억해주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 즉 광야행군과 가나안 정착 이후 계속되는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도 안보해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정착하고 살 땅을 드디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21절과 22절에서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와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라고 감사찬양하고 있는 대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는 아모리인과 바산인들의 땅이었던 요단강 동편 지역을 자기 소유 기업으로 얻게 되었고, 나머지 지파는 가나안 본토에서 각각 고유의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은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라는 서러운 딱지를 비로소 떼고, 안정된 생활의 터전을 얻어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전부터도 오로지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 덕분에 광야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120만 명이라는 대집단이 무려 40년을 살면서도 매일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 왕'들과 '유명한 왕'들도 다 죽어버렸고 강대국들과 대제국들은 다 소멸하고 말았지만, 오직 그 작은 이스라엘만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보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망하지 않고 존속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대한민국이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이 한반도는 주위의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땅이었으며, 근대에 들어와서도 열강들이 서로 군침을 흘리던 요지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본제국주의의 사슬에 묶이기도 했었고 6.25사변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당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자주독립국가로 지켜지고 있으며, 저와 여러분이 자유와 평화를 공기처럼 마음껏 마시면서 살고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멀리 조상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시절에 '보릿고개'가 있었고 '이밥과 고깃국'을 꿈처럼 그리며 살았으며 자가용은커녕 '자동차' 자체가 신기하게 보였고 '아파트'라는 단어도 모르고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가 우리 부모님들의 평생소원이 되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내 자식은 꼭 학교 보내겠다.'는 것이 그분들의 가슴에 한처럼 맺혀 있던 적이 바로 엊그제였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이 발전된 대한민국을 보면서, 이처럼 급속도로 경제성장된 우리 사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뜨겁게 감사드리는 마음이 어떻게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나라의 백성이 이처럼 이념 혼란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이 지켜지고 있는 것은 그 철책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조국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어려운 때라 할지라도 그래도 옛날처럼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도 재경부가 잘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의 화염과 내전의 혼란에 휩싸여 있는 나라들이 온 세계에 수두룩하며, 우리는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강냉이죽 한 그릇을 못 먹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 지척의 북한에 수백만 명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저와 여러분이 오늘 평안히 누리고 있는 이 주일 하루와 오늘 점심때에도 아무 어려움 없이 먹게 될 식사 한 끼를 앞에 두고서도 어떻게 진심의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대적에게서 건져내어' 국가를 안보해주시고 우리의 '육체에 식물을 주셔서' 생존을 보장해주시는, 이 계속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꼭 기억하면서 뜨겁게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제일 마지막 절 26절에서 이 시편 기자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사람을 향하여' 발휘해주시는 최고최대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 이런 인자로우신 하나님께 사람 편에서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감사'인 것입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구속,' 그리고 나날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런 하나님의 인자하신 일들이 영원한 것처럼 성도의 감사 역시 금세와 내세에서 영원히 계속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 주는 사람, 평소에 아무 것도 안 주다가 어쩌다 하나 주는 사람에게는 잊지 않고 감사할 줄 알면서도, 늘 도와주고 매일 은근히 베풀어주는 사람, 진짜 중요한 것을 항상 제공해주는 사람에게는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일 선물 하나 주는 친구에게는 고맙다고 몇 번이나 호들갑을 떨고 사장이 보너스라도 한 봉투 주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날 때부터 지금까지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공부시켜주고 매일 사랑해주고 계시는 부모님에 대해서는 '의례히, 당연히 그런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도 바로 그런 배은망덕을 저지르고 살아갑니다.
마치 자기에게 그늘을 주고 열매를 주고 나뭇가지를 주고 마지막에는 밑둥까지도 제공해주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대해서도 전혀 감사할 줄 몰랐던 그 어떤 소년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도움이 어디서' 과연 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발을 딛고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 자연세계를 하나님이 아니면 도대체 어느 지혜롭고 재주 좋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금세에서 중생을 누리게 하고 내세를 영생으로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영적 구원을 이처럼 무조건적으로,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베풀어주신 신이 하나님 외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뿐 아니라,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의 육신생활을 위한 국가적 안보와 사회질서와 생존권보장까지도 잊지 않고 낱낱이 유지시켜주고 계시는 분이 저 하늘의 절대주권자가 아니고 이 세상 임금들과 방백들인 것 같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위인도, 선인도, 통치자도, 사람들이 손 비비고 머리 숙이고 있는 그 어떤 우상이나 추상적인 신도, 이처럼 완전무결한 인자를 자연계와 영계와 인간사회계에 걸쳐서 우리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을 동시에 보유할 길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그러니 그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외에 누가 우리에게 이처럼 완벽하고도 충만하게 베풀어주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지극히 근본적인 존재 환경, 지극히 차원 높고 깊은 영혼의 문제,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조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는 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영원히 함께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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