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복과 누리는 복
본문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히 4: 1~1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제칠 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받은 복과 누리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종종 듣던 말입니다. ‘아, 그 사람 고생 고생하여 돈 좀 벌어 새집 짓고 살만하니 그만 죽었네. 헐복한 사람 같으니…’ 또 하는 말인데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부모가 애써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돈을 벌어 놓으면 자식이 흥청망청 다 써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받은 복과 누리는 복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지라도 누리지 못하면 그 복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1세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1세대가 그와 같았습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집안 식구 70명을 거느리고 내려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로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식사대접을 받고 고센 땅에 안주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살아온 세월이 430년, 요셉을 모르는 왕이 일어나자 이스라엘이 너무나 창대해지니까 애굽에 위협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역에 처하게 하고 괴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자식이 태어나면 여아는 살려놓아도 남자애들은 다 죽이라고 해서 씨를 말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 고통과 괴로움에 처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성경 출 2: 24에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라고 말씀하셨고, 출12:40~41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끝나는 그 날에 야훼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되어서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이 이스라엘로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가자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슴속에 부푼 꿈을 안았습니다. 젖이 흐르고 꿀이 넘치는 가나안 땅으로 가자. 모세를 따라 광야에 나왔으나 광야의 생활은 정말로 험했습니다. 광야는 문자 그대로 광야였습니다. 물도 없고 메마르고 나무도 풀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불 뱀이 있고 전갈이 있어 사람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밤에는 추워 바위가 터지는 소리가 뻥뻥 났습니다. 낮에는 작렬하는 태양빛에 산천이 다 불탈 듯 같았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40년의 광야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1세대를 다 광야에서 멸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 받았으나 누리지 못하고 이세대가 젖과 꿀이 흐르는 광야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신 8:15~16에 보면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광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며 그들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사는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의 시험에 낙제하고 말았습니다. 복과 은혜를 약속 받았으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않았습니다. 모세를 따라 나왔으나 사사건건이 하나님을 불신임하고 불신앙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반역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이 반역하고 목이 굳은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시고 광야에서 다 멸한 것입니다. 약속을 받았으나 누리지 못했습니다.
민14:22~23에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 후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광야로 들어가고 그것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을 받았으나 누리지 못한다. 복을 받았으나 누리지 못한다. 얼마나 비극적인 것입니까? 그들은 큰 약속을 받고 꿈과 희망에 차서 나왔으나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순종하지 않고 불신앙하고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복은 받았으나 누리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스라엘백성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고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값없이 하나님이 주신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나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복을 감히 상상도 못할 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필하고 나가면 연필 한 자루씩 주겠다고 하면 여러분 다 허허 웃고 아무 부담 없이 그 연필을 받아갑니다. 그러나 예배를 필하고 나가는 사람에게 아파트 한 채씩 주겠다고 하면 여러분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마음속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연필 한 자루는 값이 안 나가지만 아파트 한 채는 얼마나 값이 나가는 것입니까? 너무나 값이 나가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 한일이 없는데 어떻게 공짜로 값없이 선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데도 아무 우리의 행위 없이 공짜로 용서와 의로움과 영광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죄 덩어리입니다.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냥 값없이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고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만들어 주시겠다. 은혜의 선물이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할 것 없이 모두다 자격이 있다. 믿기만 하면 은혜의 선물로 주시겠다. 너무나 큰 축복이기 때문에 머리를 갸우뚱합니다. 내가 한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을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세상과 마귀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거룩하지도 못한 날을 거룩하고 성결하다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아직까지 나는 세상에 죄도 짓고 더럽고 추한 것을 천하가 다 아는데 예수 믿었다고 해서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시니 도대체 왠말이야, 왠일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믿기만 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너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고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나오면 하나님이 온갖 병에서 고쳐서 건강을 주시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공짜로 선물로 주는 은혜니까 믿음을 받아 들여라. 사람들은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 내가 중병에 걸렸는데 의사와 약으로도 치료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공짜로 하나님이 고쳐 주시겠다고 하겠는가. 머리를 갸우뚱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에게 나오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우리가 상속받은 저주의 생활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게 하겠다. 가시 엉겅퀴 길을 떠나서 아브라함의 축복의 길로 옮겨 주겠다. 어떻게 내가 갑자기 하나님의 축복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삶이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피 흘리며 살아왔는데 고생고생하고 살아왔는데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복을 주셔서 들에 가도 복을 받고 집에 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짐승의 새끼조차 복을 받겠다고 하니 도대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 공짜로 주실 수 있습니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머리를 갸우뚱합니다. 또 나아가서 우리가 죽으면 부활, 승천, 영생을 얻고 주님과 함께 예비한 영원한 천국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가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이 영생낙원 천국에 내 집을 마련해 주시고 그곳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했을까. 모두다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고 믿을 수가 없는 일을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복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하시고 용서와 의를 값없이 주시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값없이 주시고 치료와 건강을 값없이 주시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도 값없이 주시고 영생부활 천국을 값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난 것도 아니요, 나의 행위의 결과로 온 것도 아닌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속에 당황합니다. 어떻게 이런 큰 은혜를 내가 받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자격이 없는데요. 우리는 자꾸 자격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 자격을 말하지 말라. 무자격해도 내가 너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오중복음을 받으면 내 운명이 달라집니다.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도 받은 것은 삼대재앙입니다. 영원히 죄짓고 죽고 생활이 가시와 엉겅퀴와 저주가 넘쳐나고 우리는 병들고 육체도 죽고 영도 죽게 되었는데 이 삼대재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겠다니 이 놀라운 자화상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공짜로 주어지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야! 정말일까? 그냥 종교적으로 하는 말이겠지. 사실일까?’ 우리는 머리를 갸우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지위가 달라집니다. 성경에는 벧전 2: 9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만들어 주시고 왕이요,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시고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주시고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기에 감히 나를 택해 주시고 왕이요, 제사장으로 만들어서 마귀와 흑암의 세력을 지배하는 왕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이 와서 다스리는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가슴에 품은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다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꿈같은 말인 것입니다. 도저히 나에게 소속하지 않은 말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식을 듣고 이것을 믿고 순종하므로 누려야 될 것인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나 그 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하고 나왔으나 제일세대 3백 만 명은 광야에서 살다가 다 죽어 버리고 복은 받았으나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 후손들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그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이 엄청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과 사중지위를 받았으니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히 4: 1~ 3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3. 복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가 이 복을 누리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이 조건을 구비만 하면 이미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가 있어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복을 그들은 들어가서 누릴 수가 있는데 못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안 들어 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신 복을 우리가 누려야 되겠는데 많은 사람이 못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믿음은 환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꾸 환경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우뚱 거립니다. 환경이 그렇지 않는데, 사람들은 감각을 의지합니다. 내가 느낌이 그렇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여러분 하나님의 복은 환경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감각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내 믿음대로 될 찌어다. 나는 믿음이 없는데요. 여러분 거짓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목구비를 가지고 태어나고 사지백체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믿음을 하나님은 예수 믿을 때 이미 주신 것입니다. 믿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환경을 바라보고 믿음을 포기합니다. 감각을 의지하고 믿음을 포기합니다. 마음에 느낌을 바라보고 믿음을 포기합니다. 운명과 환경이 달라져서 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복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밤바다를 지나가는데 파도가 치고 바람소리가 진동하고 물보라가 나르고 배가 갸우뚱 거리니 두려움에 처했는데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신다. 하얀빛을 내면서 오르락내리락 물위로 걸어오니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유령이다. 뱃사람들은 다 압니다. 밤에 바다에 유령을 보면 배가 파선한다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유령이라고 고함을 칠 때, “내니 두려워 말라.”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시어든 나로 물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참 베드로 용감한 분입니다.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캄캄한 밤바다에 바람은 불고 파도는 치고 배는 울렁거리는데 주님께서 하얀빛을 내면서 걸어오는데 그것이 주님인지 유령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나 주님이 내니 두려워말라고 하는데 유령도 그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도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듣고 믿고 “주시어든 나로 물위로 걸어오게 하십시오.” 주님이 오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고 믿고서 바다로 나갔습니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를 밟고 낮은 파도를 밟으면서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물위를 걷습니까? 환경이 물위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아니올시다. 감각이 물위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아니올시다. 느낌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니올시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걸어간 것입니다. 믿음이 그로 하여금 물위로 걸어가는 최초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우주선타고 달나라에 간 사람이 인류 처음으로 달을 밟은 것처럼 베드로는 인류 처음으로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눈을 돌아 바람을 바라보고 파도를 바라보았습니다. 물보라가 치는 것을 바라보고 믿음을 놓쳐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로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환경이 달라진 것 아닙니다. 여전히 그 바다요, 그 바람이요, 그 파도요 감각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느낌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바다 위를 걸어가던 그가 이제는 빠졌습니까? 믿음을 놓쳐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베드로를 건지시면서 하시는 말이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간 것은 오로지 믿음 하나 때문에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길은 오로지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이 좋아져서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느낌으로 그렇게 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주신 믿음을 활용하므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과 사중지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합니다. 믿음이란 환경이 아닙니다. 감각이 아닙니다. 느낌이 아닙니다. 말씀위에 서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위에 서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주님을 따라갔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것인데 광야를 바라보고 늘 원망, 불평하고 생활의 고통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불신앙했었습니다. 그 결과로 못 들어갔습니다. 믿기만 했으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능히 들어갔지요.
그 다음 우리가 광야에 살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과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를 갖고 주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 여러분 살면서 하루에 1초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세상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려면 세상과 죄를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죄 속에 살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내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겼기 때문에 이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를 끼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어요. 세상과 죄악 속에는 우상숭배가 꽉 들어찼습니다. 세상에는 모두 우상이 꽉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케 하여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믿고 돈을 믿고 권력을 믿고 쾌락을 믿고 혹은 나무나 돌로 빚은 우상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일본에 선교를 오랫동안 했는데 가장 일본에 가서 가슴이 아픈 것은 우상천지라는 것입니다. 6백만 우상이 있습니다. 우상이 6백만 개나 있어서 온 가정이나 회사에나 어디가도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올 발자취가 드러누울 자리가 없어요. 우상은 하나님이 지극히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우상은 하나님이 몸서리나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수24:14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는 야훼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야훼만 섬기라”
하나님과만 동행해야지 하나님과 함께 세상과 죄도 더불어서 살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 나라가 예비한 꿀과 젖이 흐르는 동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몸은 애굽에서 나왔는데 마음은 늘 애굽에 있었어요. 애굽에 우상과 사신을 광야에서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또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늘 약간만 불편하면 몸은 광야에 있으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몸은 결혼했는데 마음은 다른데 있으면 부인이 그 사람 데리고 살겠습니까? 부인이 데리고 못살겠지요. 남편이 아내와 결혼했는데 그 아내가 몸은 결혼했으나 마음은 다른 남자에게 있으면 징그러워서 어떻게 데리고 살겠습니까? 몸만 결혼하면 안돼요. 마음도 함께 결혼해야지. 우리 하나님을 몸만 가지고 교회 나와서 아무 소용이 없어요. 마음도 영도 하나님과 같이 해야지. 하나님은 우리 영도 하나님의 것이요, 마음도 하나님의 것이요, 몸도 하나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세상이 우리를 끌고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도 털털 털어버리고 세상도 훨훨 털어버리고 보혈로 씻고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따라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나님이 예비한 젖과 꿀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 세상과 죄성이 드러납니다. 아주 더러운 옷을 입고 누더기를 입고 쥐똥이 가득 묻은 옷을 입어서 햇빛이 안 들어오면 그 옷 좋다고 입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창문을 확 열고 햇빛이 확 비춰서 자기 옷을 보면 옷이 더럽고 누더기고 쥐똥이 묻어있고 쥐 오줌이 묻어 있으면 그 옷을 입고 부끄러워서 사람들 앞에 설수가 없지요. 어두울 때는 괜찮은데 밝아지니까 옷의 더러움이 보입니다. 우리가 세상 어두움에 살 때는 우리 죄악이 안 드러나니까 안보이지만 하나님 은혜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빛이 비취므로 죄악이 드러나므로 우리 마음이 고통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 사람이 죄 회개하라면 “내가 무슨 죄지었어? 내가 살인을 했나, 도둑질을 했나, 내가 간음을 했나. 내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러나 교회 나와서 하나님 은혜를 받고나면 “아버지 나는 죄 덩어리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죄가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배를 빌려드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깊은데 들어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저어서 호수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니까 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대낮에 호수 가운데 그물을 던져 고기가 잡히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을 본 베드로는 “와! 보통분이 아니구나! 하나님이시구나!” 제일먼저 느낀 것은 죄를 느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 모시고 배를 저어 바다 가운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기 까지는 아무 느낌도 없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은 선한 선생으로만 생각했는데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자 아! 이분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인 것을 알자마자 베드로가 엎드려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이 곁에 오시면 우리 죄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세속적이고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되지요.
도날드 휘트니가 쓴 「당신의 영적 건강을 진단하라」라는 책에 보면 죄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 고백이 나와 있습니다. 1725년, 당시 23세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의 목사였던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떠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즘 나는 과거 내가 회심하기 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자신의 사악함과 마음의 악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나의 사악함을 볼 때, 그것은 마치 지옥보다 더 깊은 나락처럼 보인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을 뒤흔드는 위대한 주의 종이 되었는데 그런 주의 종도 하나님께 가까이 올수록 자기의 마음에 악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마음속에 있는 사악함을 볼 때 마치 지옥을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 책의 저자인 휘트니는 “우리가 죄에 대해 더욱 더 예민해진다는 것은 성장의 표시로 우리가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영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증거”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 신자 때는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어린 아이들 보세요.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런닝 하나만 입고 다 본전 내놓고도 돌아다닙니다. 부끄러운 것을 모릅니다. 어린아이 때니까. 그러나 나이가 자라면 부끄러운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런닝만 입지 않고 팬츠도 내놓으라고 하고 바지도 내놓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자기가 부끄러운 줄을 몰라요. 철없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돌아다니지만 신앙에 철이 들고 은혜를 받으면 점점 언어심사 행동에 부끄러움이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통회, 자복하는 사람 그 사람 신앙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랐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통회, 자복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지 못한 사람은 회개할 것이 뭐가 있어. “내가 무슨 죄인이냐. 다른 사람 다 기도할 때 눈뜨고 두리번두리번 살피면서 와! 죄인들 많구나!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신앙으로 자리지 못하고 하나님 곁에 와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19세기의 성경학자 토마스 버나드는 “죄의식이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에 정비례한다.”고 말했습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죄에 대해 더 많이 애통하게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 1세대들은 애굽에서 몸은 나왔으나 마음은 나오지 못해서 결국 받은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마음 가운데 세상과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를 함께 끼고 살겠다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최자실 목사님은 황해도 출신인데 황해도 아낙에서 큰 부자가 사는데 그 아들을 동경에까지 보내서 학교 공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너무 가난해서 동경까지 공부를 못했으나 굉장히 머리가 좋고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모으고 가산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느 한집안의 절세미인의 딸을 두었습니다. 그 절세미인의 딸을 두었는데 이 딸을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 부잣집 동경대학을 나온 사람도 이 딸을 데리고 살면 좋겠다. 자수성가한 청년도 이 딸을 데리고 살면 좋겠다. 그런데 그 딸은 둘이가 다 데리고 살고 싶거든요. 동경대학을 나온 사람도 데리고 살고 싶고 자수성가한 사람도 데리고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야,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 그러니까 “엄마, 내가 이렇게 하면 어때? 시집은 동경대학 나온 사람에게 시집가고 살기는 자수성가 부자인 그 사람과 살고 두 사람 다 데리고 살면 어때?” 그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를 최자실 목사님이 제게 늘 하면서 “어리석은 소리 아니냐?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다. 왜냐하면 살기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데리고 놀기는 세상하고 놀겠다.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 그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를 못합니다. 마귀와 하나님을 겸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귀와 세상을 등지고 단호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시면 우리 세상과 죄악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세상과 죄악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꾸 한 꺼풀 벗어 버리고 또 한 꺼풀 또 한 꺼풀 풀고 자꾸 세상과 마귀를 벗어 버리고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책을 느끼는 것을 이상한일 생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신령하기 때문에 죄책을 느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않고 신령하지 못하면 죄책을 느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가 위해서는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고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과 세계를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에덴동산도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도 다스리며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올라갔을 때 마귀를 섬겼습니다. 인간은 섬기도록 만들어 놓았지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을 그릇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릇은 그 체에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을 담아놓기 위해서만 그릇입니다. 하나님을 담아 놓든지 마귀를 담아 놓든지. 성전은 이 건물 자체가 없습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시든지 마귀가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인노릇 못합니다. 사라들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마귀을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섬겨야지 세상과 마귀를 섬겨서는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이 세상과 마귀인 것입니다. 내 옆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우상과 사신을 겸하여 섬기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집에 가서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만 섬기고 살다가 이 세상에 굶어 죽잖아요. 세상에 살자면 세상과 함께 짝을 지어야 세상살이 하지요.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살 때는 떡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노동해서 월급 받고 농사짓고 그래서 만든 떡으로써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떡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만 그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직업도 없고 농사지을 밭도 논도 물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광야입니다. 아무데도 먹을 양식을 구할 곳이 없습니다. 그곳은 양식도 없고 물도 없고 의사도 없고 의복을 살 곳도 없고 신발 살 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무엇을 가지고 사나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서 나갈 때 하나님이 양식도 주시고 고기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병도 고쳐 주시고 옷도 떨어지고 신발도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애굽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았지만 광야에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살 때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살았지만 예수 믿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떡도 더하여 주시고 물도 더하여 주시고 옷도 건강도 생활도 다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덤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 사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혼돈합니다. 하나님도 믿고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세상적으로 죄와 더불어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하나님의 예비한 축복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신분이 불확실하면 담대하게 살수 없잖아요.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어 살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오늘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면 어떻게 대한민국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 자기를 모르고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살 수 있어요? 정체가 확실해야지.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옛날 사람은 다 지나가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입니까? 용서받은 의인들이 새사람인 것입니다.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치료받고 건강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받은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을 얻은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옛사람이 아닙니다. 새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여러분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를 보는 눈이 다릅니다.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은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새로운 신분과 내 자화상과 내 지위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귀의 협박과 공갈과 꼬임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마귀가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나는 새사람이다. 나는 죄를 이긴 사람이다. 세상과 마귀를 이긴 사람이다. 병을 이긴 사람이다. 저주와 가난을 이긴 사람이다. 지옥과 멸망을 이긴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 유혹에 너희 협박과 너희 공갈에 넘어가지 아니한다.’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보고 물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세상과 마귀의 속삭이는 말을 듣고 신앙에서 넘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여러분 항상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다. 나는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거룩하고 성령이 같이 계신 사람이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고 건강한 사람이다. 어떻게 병이 와도 어떻게 느끼더라도 그것은 거짓된 것이다. 물러가면 안 됩니다. 나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가시와 엉겅퀴에서 벗어났다. 나는 고난의 길에서 축복의 길로 들어섰다. 축복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죽음이 겁나지 않다. 나는 이미 천국에 주님이 영원히 있을 곳을 예비해 놓았다.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이다.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그러한 사람이 되었다. 버림받은 쓰레기가 아니다. 택한 족속이요, 마귀와 세상을 이기는 왕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이 소유한 백성이 되었다. 자기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우면 백번 이긴다. 우리 아무리 마귀가 소리쳐 와도 나를 알면 내가 마귀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고후 5:17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된 자기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 정원사가 도랑에 심겨진 가시나무 한 그루를 뽑아다가 자신의 정원에 옮겨 심었습니다. 가시나무는 자신처럼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가시만 뾰족한 쓸모없는 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 옮겨진 것이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나는 가시나무인데 내가 장미꽃 동산에 옮겨지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장미꽃 나무가 아닌데…”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내가 나의 손에 의해서 달라질 것이다.” 가시나무를 “싹 뚝!” 잘라서 장미꽃 나무를 접붙였습니다. 가시나무가 “아이고 나는 가시나무인데요? 장미꽃 나무를 내게 접붙이면 어떻게 해요?” “있어봐라. 시간이 지나면 알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봄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가시나무인데 싹이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웠습니다. “와! 희한하네요. 나는 가시나무인데 장미꽃이 피었네요.” “이놈아, 이제는 가시나무가 아니라 장미꽃으로 접붙였기 때문에 장미꽃이다. 너는… 너는 장미의 나무가 되었다. 가시나무가 아니다. 가시나무라고 하지 말라. 이제는 가시나무 꽃이 아니라 장미꽃을 피우게 되었다.” 사람들마다 “아! 장미나무 아름다운 꽃을 피웠네.” 여러분 우리는 옛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접붙임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 새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예수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나는 옛사람이에요. 아담의 후예인데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꽃과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의의 열매를 맺고 거룩의 열매를 맺고 치료와 건강의 열매를 맺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열매를 맺고 천국 영생복락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알아야 됩니다. 가시나무가 아닙니다. 장미나무입니다. 가시의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장미꽃을 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장미나무요, 장미꽃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변화 받았습니다. 변화 받은 내 자신을 알아야 됩니다. 자나 깨나 내 자신을 알아야 되고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을 믿고 내 자신을 입으로 시인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아직 가시나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접붙여 주시므로 신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1912년 보스턴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비록 내가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지만 하나님을 먼저 섬기며 살겠다.’고 철저히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작은 돈이었지만 벌어서 꼬박꼬박 십일조를 드리고 철저히 성수 주일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 주셔서 10대에 이미 사업가로써의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에는 얼음을 팔아서 돈을 벌고 공장이나 건설노동자에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팔아서 제법 돈을 모은 후 30세에는 점심을 배달해 주는 ‘모빌 런치 서비스’라는 회사를 세워서 성공했습니다. 후에는 잘 알려져 있는 ‘던킨 도너츠’라는 세계적인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바로 이 소년이 던킨 도너츠의 창업주인 로젠버그입니다. 현재 로젠버그는 던킨 도너츠를 세워서 미국에만 1,700개의 지점이 있고 세계의 100개 나라에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72세를 맞이하는 생일 축하자리에서 기자가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못 배웠어요. 초등학교도 못나온데 다가 그리 좋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제 짐을 맡아 주셨습니다. 제가 성공한 것은 제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써 내가 성공을 했습니다. 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은 내게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지식이 성공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가 우리를 성공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못나왔습니다. 좋은 가정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유산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직 가진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통하여 넘치는 은혜를 예비해 놓으시고 공짜로 선물로 주시는데 그는 믿음과 순종으로 나가니까 비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유산을 받지 못하고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도 하나님은 세계적인 기업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삶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과 사중지위를 값없이 선물로 주어 놓은 것입니다. 주어진 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새 말,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제는 아들의 나라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살면 한국말 하지요. 일본가면 일본말해야 됩니다. 미국으로 가면 미국말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 말을 해야 그 나라에 살 수 있지요. 우리는 흑암의 나라 세상에 살다가 하늘나라에 들어왔으니 하늘나라 말을 해야지. 하늘나라 말을 어떻게 합니까? 성경이 바로 하늘나라 지식을 주고 하늘나라 말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하지 않고 성경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약속의 말씀에 따라 말을 사용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말을 하고 하늘나라 말을 쓰지 않습니다.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하늘나라 말을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잠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 6: 2에는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롬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4:17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성공학으로 유명한 나폴레온 힐은 “마음은 무엇을 믿든지 그 믿음 그대로 해 낸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마크 빅터 한센과 잭 캔필드는 책을 내면서 “150만 부 이상 팔릴 것이다.”라고 입술로 계속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이 책은 1년 만에 미국에서만 150만 부가 팔렸습니다. 시카고의 이안 그룹 회장 W. 클레먼트 스톤은 매일 아침 직원들에게 “난 오늘 기분이 좋다. 난 오늘 건강하다. 난 오늘 너무 멋있다.”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이 세문장의 말로 수십만 명의 사원들을 훈련시켜 대그룹으로 성장 시켰습니다.
‘난 오늘 기분이 좋다. 난 오늘 건강하다. 난 오늘 멋있다.’ 별 수 없는 말 같지요? 그러나 이 말을 계속 직원들에게 하게 하므로 이안 그룹 회장 W. 클레먼트 스톤은 큰 회사를 설립하고 거부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실수할 때」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웨인 다이어 박사 역시 책을 출판하기 오래 전부터 동료교수들에게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그 말을 듣고 비웃었지만 현재 그는 명실공의 5천 8백만 부의 판매부수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입니다. 인디아나 주 노틀담 팀의 명감독 루 홀츠는 자신의 선수들을 항상 ‘너 챔피온, 우리 챔피온, 우리 챔피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꼴찌였던 그 팀이 2년 만에 챔피온 우승팀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말의 위력은 이처럼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놀라운 말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세상 말을 하면 세상이 생겨오고 하늘나라 말을 하면 하늘나라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 스프링필드 근처에는 지형이 높고 아주 험한 고갯길이 있습니다. 어찌나 길이 위험해 보이는지 이곳을 지나가는 차들은 그 지형만 보고도 지레 겁을 먹고 돌아갑니다. 이 고갯길은 도시를 잇는 요충지였지만 사람들이 왕래를 꺼리는 탓에 나중에는 폐쇄위기까지 처했습니다. 그래서 시에서 그 고갯길에 들어가는 입구에 팻말을 크게 붙였습니다. “Yes, You Can!”, “예, 당신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 팻말을 붙이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 고갯길을 피해가고 고갯길을 지나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수많은 사고가 나고 사람이 죽었는데 “Yes, You Can!”이라는 이 팻말을 붙이고 난 다음에는 그 고갯길에 사고가 없어졌습니다. 떨어지는 차도 없고 죽는 사람도 없고 사람들은 그 고갯길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해서 그 후에 길이 어렵게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갯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반드시 그 간판을 보고 입으로 외웁니다. “Yes, You Can!” “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나도 할 수 있지.’ 그러니까 할 수 있다는 능력에 사로잡혀서 고갯길을 편안히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옛날에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사고가 난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이 말은 우리에게 위대한 능력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축복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론]
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일생을 광야에서 살다 죽은 자들이 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 같은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예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목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믿고 구원은 받았어도 일평생 광야생활을 하다가 턱걸이로 천당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성도 개개인에게 있습니다. 복은 이미 하나님이 주셨는데 누리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신 복을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하신 데로 여러분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강하고 담대한 자기의 정체성을 알고 고백하며 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다 들어가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498장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오중복음, 삼중축복, 사중지위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고도 못 들어가는 우리들 되게 말게 하여 주옵시고 들어가 누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