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마26:36~46/2007년 7월 8일 설교 > 설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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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 마태복음26:36~46 2007년 7월 8일 주일낮예배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설교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설교: 제가 유머감각이 별로 없다고 해서 요즘 유머감각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천적인 기질이 있어야 하나봅니다. 저희 집안은 좀 점잔은 집안 문화라 그런지 좀처럼 유머를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어쩌다 유머를 하면 좀 썰렁합니다. 오늘 유머도 좀 썰렁해도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설교 카페를 운영합니다. 회원이 490명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목사님도 교회 카페를 운영하고 계셨답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 광고시간에 목사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교회 카페에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들어오셔서 자꾸 도배를 하시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광고를 들은 두 집사님의 대화내용입니다. 한분은 컴맹 집사님이고 한분은 좀 젊은 집사님입니다.  A:집사님~~우리교회 카페도 있었어요? B:네…….모르셨어요? A:그럼 목사님께서 직접 운영하시는 거예요? B:아 그럼요. 목사님이 주인이구요, 따로 운영자도 있다던데요. A:에이 참, 교회 일도 바쁘실 텐데. 목사님은 왜 카페까지 하고 그러실까? B:요즘 까페하는게 추세죠. 다른 교회도 다 하는걸요. A:그래요? 그럼 나도 가봐야 하겠네요. 어디 있어요? 어떻게 가면 되나요? B:음~, 다음에 가서 교회 이름을 .... A:에이~ 다음에 가긴 뭘 다음에 가요, 말 나온 겸에 오늘 같이 가 봐요. B:교회이름 댈 것도 없이 그냥 돈 내고 차 한 잔 팔아 주자고요. 그리고 누가 도배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서 다 뜯어내요. 요즘 누가 촌스럽게 카페에 도배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돈 좀 들이더라도 실내장식을 멋지게 해서 이왕이면 손님도 끌고 매상 많이 올려서 교회 헌금도 하고 그래야죠~~ 결국 옆에 있던 집사는 그날 쓸어졌답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뭔 소린지 모르는 분은 없겠지요? 아마 우리 교회도 몇 분은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카페에 커피 마시러 오신다고 카페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제 카페에 못 들어오시나 봅니다. 하하하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인터넷으로 카페도 만들고 제 설교를 수백명의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이 함께 은혜를 나누니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일상생활도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자분들 빨래하고 밥하는 것 간단해서 좋지요? 스위치만 한번 누르면 다 알아서 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하고 좋은 세상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 바빠졌습니다. 좀 살만한데, 좀 여유를 가지고 살면 좋겠는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옛날에 비하면 정말 편하고 넉넉하여 이젠 좀 여유 있게 설면 좋을 텐데 왜들 그리 바쁘게 사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 있으나 가장 큰 원인은 욕심과 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가득하여 만족할 줄 모르게 하고 여유 있게 살게 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경건생활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너무 바쁘다 보니 주일도 듬성듬성 빼먹고 저녁예배 빠지는 것은 당연한 세태가 되어가고 있고 기도생활은 좀처럼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 중직자 여러분! 왜 새벽예배에 나오지 못합니까? 힘들어서 지요? 뭔가 그리 힘들지요? 너무 바빠서 정신없이 살다보니 저녁 11시 넘어 잠을 자니 새벽에 4시 반에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지요. 그러니 힘든 것은 당연하지요.  어떤 성도님이 주일에 교회를 못 나오셔서 전화를 했습니다. “요즘 뵙기가 힘드네요” 했더니 “목사님 요즘 정신없이 바쁩니다. 요 일만 정리해 놓고 가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그러나 저는 그 말을 안 믿습니다. 이번 일만 정리 되면 나온다고요? 천만에요. 다음에 또 누가 일해 달라면 또 못 오십니다. 왜요? 예배에 대한 가치가 일에 대한 가치보다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교회는 시간 나면 나오고 바쁘면 못나오는 여가 생활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것을 아시나요?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부지런한 사람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예배드릴 시간도 없이 주일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마귀의 고단수의 계략이라는 사실을 하시나요? 현대에 와서 마귀는 아주 고단수로 우리를 넘어 트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하는 전략으로 바쁘게 사는 것을 이용한답니다. 그래서 예배도 제끼고, 저녁예배 수요예배는 당연히 건너뛰고, 새벽기도도 바쁘다는 미명하에 당연히 제껴도 되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성은 식어지고 은혜도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은 재미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멀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모르게 세상사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삶을 심각하게 되돌아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좀 더 좀 더 하면서 움켜잡으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사람 되지 마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가를 점검하시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육체건강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민감하게 반응을 하여 건강 체크를 하듯이 여러분의 영적 건강을 잘 점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세요. 주님이 공생애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하신 마지막 사역이 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역에 많은 사간을 기도에 할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십자가를 지는 중차대한 문제 앞에 마지막을 기도로 시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사실 그때 주님은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이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피할 방법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그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을 잘 단속하고 헤어질 준비하고 해야 할 터인데 그 바쁘신 와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을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를 하러 가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기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어떻게 기도사역을 감당하셨는가? 그 기도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시기를 축원합니다.
1. 주님은 기도하실 때 기도동역자를 데려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공식적으로는 12명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제자들과 여자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중 12명만을 데리고 성찬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가롯 유다는 그 자리를 떠났고 11명만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8명은 산 아래에 떼어 놓고 3명만 데리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을 구별하셔서 올라가시고는 그들에게 당신의 심정을 털어놓고 기도에 동참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37~38절을 보세요.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이들 세 명만 구별하여 데려가셨을까요? 이 세 명은 좀 특별한 특혜를 누리는 것일까요? 그들만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그 이유를 찾아보아도 알 수 없으나 한두 곳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 예수님이 변화 산에 올라 가셨을 때도 주님은 이 세 사람을 따로 구별하여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마17:1~2를 보세요.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거기서 그들은 주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죽을 것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던 그들에게 기도에 동참하라고 데리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적어도 주님이 누군지는 알아야 기도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3년씩이나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이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 산에 올라갔던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만을 특별히 기도의 동역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찾고 계시는 기도의 동역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겟세마네에서만 아닌 지금도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기도할 기도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겟세마네 동산, 그곳에서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주님은 주님의 영혼 구원 사역에 동참할 기도의 동역자를 찾고 계신단 말입니다.
누가 그 기도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까요? 1)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이고 2)주님의 소원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3)주님이 뭘 귀하게 여기고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누굽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12명의 제자중 3명을 구별하십니다. 25%입니다. 우리교회 성도 중 25%는 몇 명일까요? 새벽기도가 그정도는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절대부족입니다. 왜요? 전부 마귀의 바쁘게 만들기 작전에 넘어간 것입니다. 기도가 중요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는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믿음 좋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는 사람이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삶속에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 과목입니다. 기도할 시간과 여유를 마귀에게 빼앗기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정상 부근에 올라가셔서 3명의 제자들에게 간절히 기도 부탁을 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소리를 하셨겠습니까? 그리고는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부탁하시고는 조금 더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39절을 보세요.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주님의 기도 자세를 보세요. 얼굴을 땅에 댑니다. 그리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저는 여기서 은혜를 받습니다. 땅에 얼굴을 대셨습니다. 보통 때는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시며 기도하셨는데 오늘 본문에는 얼굴을 땅에 대십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아마도 죽을 지경이신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기도가 뭡니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이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그것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하려는 기도 아닙니까? 우리 기도는 내 뜻대로 해 주옵소서가 아니냐고요? 십중팔구는 내 뜻대로 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 앞서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뜻은 가만히 있어도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뭘 그렇게 간절히 기도합니까? 우리가 잘 알듯이 오늘 본문의 기도가 주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한 사건이잖습니까? 그런데 뭘 그렇게까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잘 아시는데 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의 몸이, 주님이 입으신 그 인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너무 감당키 힘드니 그것을 감당케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육신을 입으셨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신성이 없는 육신을 입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까요? 주님은 앞날을 내다보실 수 있는 예지의 능력도 있으신데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 됨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두려워 제자들이 어떤 짓을 할지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다 버리고 도망을 치잖습니까?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십자가를 지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속히 내 뜻을 접어야 기도가 이루어짐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뜻을 앞세우고 아무리 주시옵소서. 기도해도 응답이 어렵습니다. 간혹 이루어주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고집이 쎕니다. 특히 최씨는 고집이 쎄고 강씨도 또 안씨도 고집이 쎕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하나님 고집은 더 쎕니다. 그러기에 속히 주님의 기도를 따르시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합시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큰소리로 하세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내 자식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하시고 내 사업도, 내가정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 기도가 잘 안 나옵니까? 얼굴을 땅바닥에 대시기 바랍니다. 죽으란 말입니다. 뻣뻣하게 고개 쳐들지 말고 죽을 것 같이 기도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다 아버지의 뜻대로가 나오게 됩니다. 아직 덜 맞고 덜 죽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어서 내 뜻이 나오는 것입니다. 
3.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기도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기도를 하시다가 중단하시고 내려와 보시니 꼴이 가간이 아닙니다. 세 명의 제자들이 코를 드르렁 드르렁 거리며 쿨쿨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12명중에 선발된 제자들인데…….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재가 주님 같았으면 얘라 하고 엉덩이를 한번 걷어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점잖게 타이릅니다. 40절~41절을 보세요.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성도 여러분! 주님의 아주 무서운 경고를 하나 하십니다. 41절을 다시 보세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구절이 문제입니다. 이 말을 잘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기도 안하면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안하면 육신이 약하기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말은 기도하면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찾아오는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는 왜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기도는 문제 해결의 방법도 되지만 문제예방의 방법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크게 아멘을 해야 정상입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도 아멘을 안하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다시 말합니다. 기도는 문제해결의 열쇠도 되지만 그러나 사전에 기도를 많이 하면 아예 문제가 찾아와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문제를 예방한다는 것입니다.
왜 작은 시험에 펑펑 넘어집니까? 그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험을 견디어 낼 영성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평상시 기도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 기도해야 하고 건강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닥치고 나서 기도하는 것은 下手고요. 일이 닥치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이 高手입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 닥칠 시험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아시기에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세 번씩 간절히 기도합니다.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핏방울이 떨어지듯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그 기도에서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알았고 그것을 감당하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겟세마네기도 후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을 때는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기도 후에는 당당하게 일어서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45절 46절을 보세요.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특별히 46절을 보세요.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은 참으로 당당하게 고난을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절대로 도망가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못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엄청난 시험에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십자가를 지신 후에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승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판이 난 것입니다. 기도하시면서 이미 승리하신 것입니다. 기도에 승리하시니 십자가에서도 당당하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하질 않습니다.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바쁘게 만들기 전략에 넘어가질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으라 일하고 노력해야 부자 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좀 여유 있게 살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잠도 제대로 안자면서 죽으라 일하는 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너희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승리의 비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일하게 하시는 비법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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