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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응목사 [성경본문] 누가복음10:25-37

할렐루야!!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의 몸 된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제 그제가 일 년 중에서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였습니다. 요즘 해 뜨는 시간은 5시 10분이고 해지는 시간은 7시 20분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낮의 길이가 14시간이 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농촌에 사는 우리네들은 참으로 고단하고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에 나와 함께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성도들을 볼 때 참으로 감사하기도 하고 또 목사인 저는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반면에 꼭 나와야 할 교회의 중직들이 나태와 게으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우리 민족이 쓰라린 고통을 당했던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7년 전 1950년 6월 25일은 그날이 마침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때의 고난을 되새겨 보면서 다시는 이 나라에 이와 같은 불행이 발생되지 않도록 다짐을 새롭게 하는「6.25상기주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짐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삼상17:47절 말씀에는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시는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지 않고 평화와 평안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려면 먼저 이 민족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4,800만 모두가 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함당한 사람이 된다면 이 나라는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소돔성은 의인 10명만 있었으면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 목사님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예,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자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 목사님? 저 아무래도 권사를 못하겠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일도 많고 너무 바쁘고 해서 집사하고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사는 못하고 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네 가만히 보니까 집사는 심방도 하지 않고, 또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창정교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몇 일전 어느 성도로부터 참으로 가슴 아픈 말을 들었습니다. 왜 새벽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왜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까?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축복을 받습니다. 라고 권면을 하였더니 그 성도가 하는 말이 ‘권사도 새벽기도 안하고 저녁예배도 나오지 않는데 왜 집사인 내가 새벽기도를 하고 저녁예배를 나가야 합니까?’ ‘아무개 권사는 십일조도 하지 않고 감사헌금도 하지 않아도 하는 일들이 잘만 되는데 집사인 내가 왜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기사 우리 교인들 중에는 권사라고 해도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속장이라고 해도 속회 심방 한번 하지 않는 속장도 있습니다.
집사, 권사라고 해도 새벽기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에 감사헌금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안 한다고 내가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신앙도 믿음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주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합니다.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들어 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나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 행하여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남에게 믿음의 상처를 준다거나 실족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못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도둑놈 따라가면 결국 도둑놈 됩니다. 노름꾼 따라다니면 결국 노름꾼 됩니다. 게으름뱅이를 따라가면 결국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민수기 16: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조직하고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이때 고라를 추종하는 사람이 25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고 추종하던 250명은 제단에서 불이 나와 모두 타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를 먼저 묶어 지옥 불에 던져 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9-30)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한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지고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믿음 있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계22:10-15)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완악 하여져서 바른 교훈이나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권면을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여야 하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여 주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마이동풍이고 권면을 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사, 권사, 속장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그 직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도 그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6:59)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겔18: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통상 말하기를 ‘선한(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도 이야기하는 이 본문 말씀의 해석은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사장은 종교 지도자들이고 레위인은 정치인들이며 사마리아 사람은 평민(급진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라고도 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제사장은 불교의 석가모니이고, 레위인은 유교의 공자이며, 사마리아 사람은 기독교의 예수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제사장은 오늘의 교회의 목사요, 레위인은 교회의 장로나 임원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평신도이므로 정말로 천국 갈 사람은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평신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이비 이단 종파에서는 말하기를 제사장과 레위인은 기성 기독교를 뜻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자기들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가르쳐 줄 때에도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이라서 교회를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은 강도와 같은 사탄을 만난다고 하였고, 제사장은 불교의 석가모니이고, 레위인은 유교의 공자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님인데 그가 기름으로 상처를 씻은 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고, 주막으로 데려갔다고 하였는데 주막은 교회이며, 치료비로 두 데나리온을 준 것은 신약과 구약이고, 부비가 더 들면 다시 와서 그때 계산해 준다고 하였으니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 방법을 알레고리(Allegory)식 해석이라고 합니다.

또 19세기의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Lev Nicolaevich Tolstoi 1828-1910)의 인생론 중에「사람 살려!」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이 오늘 말씀인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살아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사람 살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가사 장삼(袈裟 長衫)을 걸치고 목탁을 치는 석가모니가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하는 말이 ‘나무 관세음보살!, 인생의 모든 일들이 인과응보(因果應報)니 당신은 악한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그 벌을 받는 것이요 그곳에서 참선하시오’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 살려!! 하고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그 때 이번에는 도포 자락을 날리면서 공자님이 오셔서 웅덩이를 드려다 보고 혀를 쯧쯧 차시더니 하는 말이 ‘인생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조심하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다음부터는 조심하시오’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있는 힘을 다하여 사람 살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때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웅덩이를 드려다 보시더니 그 십자가를 웅덩이 아래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간신히 올라오는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웅덩이 밖으로 건져내어 다친 상처를 싸매 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 비유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유를 들려주는 목적이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 할 목적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당시 율법사라면 대단한 지위와 명예를 지닌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강론하고 가르치며 보존 관리도 하며 때로는 유권해석을 내리기도 하는 사람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며 예수라는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온 자신을 믿고 따르는 길이라고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도전을 해 온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율법을 가르치면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라고 반문하시고 이에 능수능란하게 대답하는 율법사에게 “이를 행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사는 율법에 대하여 잘 알고 또 가르치기도 잘 하고 하였지만 자신의 생활에 반영되지를 못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행함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약2:17절 말씀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사가 그냥 돌아갔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묻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마지막에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 결정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의미보다 그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더욱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율법사에게 지식이나 말로써의 외식적인 믿음보다 행함의 믿음이 얼마나 더욱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 멘>

또 오늘 본문 말씀과 유사한 내용의 말씀이 다른 곳에도 있는데 눅18:18-23에 보면 그곳에도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율법사와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계명을 지켜라” 고 하시자 이 관원은 말하기를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고 하시자 그 부자 관원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예수님은 똑같이 “율법을 지켜라” 고 말씀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모두 행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도, 계명도, 주님을 따르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것 모두가 말로만이 아니고, 또 생각만이 아니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행함의 종교입니다. 사랑을 말로만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의 믿음은 은혜로써 꽃피우고,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고 말씀하셨고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2;17) 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서로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구원의 교리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완성은 곧 행함입니다.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을「완전한 믿음」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천과 행함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기까지는 많은 갈등과 또한 오류가 있습니다. 오늘도 이 시간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얼마나 갈등하고 망설이기도 하였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행함과 실천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두 가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지배란 ‘성령의 지배와, 악령의 지배’ 입니다. 이 두 가지의 마음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서로 싸웁니다.
이 두 가지의 영은 우리들의 영과 육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씀하기를 (롬7:21-2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마음의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우리 인간은 어느 쪽으로든지 치우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치우치면 성령의 사람이 되고, 악령으로 치우치게 되면 악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는 자기의 의지와 하나님께 의뢰하고 신뢰하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13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중에 가시 떨기에 뿌려진 씨는 싹은 났지만 가시 떨기가 가려서 결실치 못했는데 이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막혀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결심도 잘 하고 다짐도 잘 합니다. 그러나 행하려고 하면 이런 저런 장애물들이 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생각은 했는데 그만 염려와 재리에 얽매어서, 또는 가족 중에 누가 반대해서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변의 다른 교인들을 보니까 열심히 안 해도 되는 것 갔고, 십일조 안 해도 되는 것 갔고, 저녁예배 안나와도 되는 것 갔고, 새벽기도 안 해도 되는 것 같아서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잖아도 늘 마음에 찜찜했는데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 보니까 안 해도 잘만 되더라. 하고 스스로 위로 받고(?)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기왕이면 믿음 좋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그런 성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이웃도 잘 만나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에 있으면 은연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가게 됩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결심을 하였다가도 또 쓰러지고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가도 또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도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18:1-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 이와 같은 두 가지 생각이 우리를 괴롭힐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판단을 잘 해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고력, 바로 이것이 이성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의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재빨리 판단을 내려서 결정을 하여야 합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또 어느 것이 사탄의 뜻인지를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판단을 바로 내리지 못하면 혼란이 옵니다.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잘못 결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던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쫓으라” 는 말을 듣고 두 가지의 마음에서 근심하다가 성령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3. 올바른 판단을 내렸으면 실천을 하여야 합니다.

바로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결정을 하고서 행함으로 실천을 하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판단까지는 잘 하는데 꼭 이 실천의 단계에서 실패를 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중에 나오는 율법사도 이 실천의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알기만 하였지 실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행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도 말로는 율법을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하였지만 구체적인 실천의 단계에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 실천이라고 하는 행함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지금까지 불신자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고 하는 말이 “예수쟁이들 말은 잘 한다” 라고 들 하여왔습니다. 이는 곳 말만 풍성하지 실천이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눅19:1-10절의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토색한 것은 4배를 갚겠다고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성령 받고 은혜의 생활을 할 때에 그들은 이론적으로가 아니고 실제적으로 매일 모여서 기도하고 헌금을 하여 가난한자들을 돕는 실천의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 아니고, 실제적이며 체험적이며 행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창정교회의 성도들은 더욱 더 열심히 몸으로 행하는 열매 맺는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습관과 관념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이고도 모험적인 신앙의 열매를 맺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만이 아니고 행함으로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갈6:7), 행한 대로 갚아주시며(마16:27), 믿음대로 이루어주시는(마9:29)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이 귀한 은혜와 은총과 축복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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