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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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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군대
디모데후서 2:3-4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나의 군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 7:4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시각이요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군대로 재편성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은 일곱 족속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로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세상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싸워야 하며 전쟁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교회도 군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에스겔의 환상에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단순히 군중이 아니라 군대가 되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가 단순히 구원받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적의 성문을 부수고 진격해 들어가 많은 영혼들을 자유케 하고 구원하길 원하십니다(마 16:18).

지금 하나님은 도시와 나라와 열방을 취하기 위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계십니다. 빌 해몬 박사님은 “사도들 선지자들과 앞으로 올 하나님의 운동들”이라는 추천할만한 책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항복시키는 무적의, 막을 수 없는, 정복할 수 없는, 이기는 여호와의 군대가 되도록 준비시키고 계시다. 그의 군대가 하나님께서 영원히 목적하셨던 바대로 되어지며 또 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활성화시키도록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한 회복적 운동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군대를 인도하게 될 장군들은 모든 회복적인 진리를 그들의 삶과 사역에 혼합시킴으로서 점차적으로 준비해왔던 사람들이다.”




또 릭 조이너는 “추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앞으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강력한 군대가 소집될 것이다. 이 군대는 총이나 칼로 무장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늘이나 땅의 어떤 권세도 이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 군대의 지휘관들은 평범해 보이며 어떤 경우에는 눈에 띠지도 않을 것이나 군기와 사기에 있어서는 이에 비견할만한 어떤 인간 조직도 일찍이 존재한 일이 없다. 이 군대는 주님 자신이 소집하셨다. 주님이 훈련하시며 지휘도 하실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병사들은 완벽한 대열을 짓고 진로에서 벗어나거나 서로 거칠 것이 없이 일사불란하게 불굴의 결의로 전진해 나갈 것이며 그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라도 적의 가장 큰 자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들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군대인데 곧 그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최근 타드 벤트리는 “요엘의 군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젊은이 운동(요엘의 군대)




저는 다가오는 젊은이 부흥에 관한 다음의 새로운 예언 내용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이 내용을 보내세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강한 군대와 같이, 하늘의 소리와 광경으로부터 곧바로 들려오는 새로운 음악 소리와 같이, 새롭게 품고 계시던 젊은 군사들을 풀어내고 계십니다. 이 젊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영의 생기가 있습니다.

야곱이라 불리는 세대가 있을 것이라(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시편 24:6). 이 젊은이들은 시편 24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것이며 그 결과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세대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젊은 세대 중에 12세 이하의 아이들이 사무엘과 같이 될 것이며 주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 계시와 환상과 꿈들로 그들을 방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의 군대를 요엘 2:1-1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학자들이 Y세대라고 부르는 그 세대에 관하여 기도하였을 때, 저는 주님께서 ‘그들 세대의 운명은 무엇이 될까?’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며 또한 ‘그들은 기적의 세대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지고, 성령께서는 종말의 군사들을 모으고 계십니다. 이 마지막 세대는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가운데서 걷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전에도 전혀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로 없을 세대입니다. 이 젊은 세대들은 부흥사들이나 개혁가들 그리고 지난 역사의 인물들보다도 더 위대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기름 부으심이(이 젊은 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61:4은 하나님께서 이전 세대에서 황폐하게 된 모든 것들을 회복할 것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와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에게 있었던 치유를 위한 기름 부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찰스 피니와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위대한 부흥사들과... 존 낙스 같은 개혁가들에게 있었던 권능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들의 영향력과 위임사역과 기름 부으심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인가요? 그들이 받았던 기름 부으심의 영향력은 다 사라져 버린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지난날들의 부흥에 있었던 기름 부으심을 마지막 한 세대에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황폐케 되고 폐허가 된 옛것들을 재건하고 세울 것이며, 파괴된 성들과 여러 세대의 황폐한 것들을 고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까요? 요엘 2장의 맥락으로 보면 그것은 마지막 세대의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질 때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교회에는 특별히 청년들이 많이 등록합니다. 청년들이 곳곳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이곳에 보내고 계실까요? 그것은 그들을 요엘의 군대로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이기도 하지만 군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군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도시와 나라들을 변화시키는 데 쓰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그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대가 싸우는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근본적으로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싸우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이 군대의 참된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쳐서 쓰러뜨리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전체 군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강한 용사가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주의 군대의 강한 용사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바울처럼 자기와 싸우십시오. 이것이 강한 용사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러면 군인이 적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자기와 싸우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것을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의 군대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찰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소집되어 광야를 행군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치르며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이 광야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광야에 엎드러진 것은 전쟁에서 패배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 10:1-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형제들아”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불신자나 명목상의 신자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 즉 진정으로 구원 받은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한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광야에서 엎드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우리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1) 그들이 우리의 거울이라면 그들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즉 그들의 얘기가 우리의 얘기라야 합니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통해 출애굽하고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어도 광야에 엎드러져 멸망한 것처럼 우리도 어린 양 예수의 피로 구원받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지만 얼마든지 버림받고 멸망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우리에게는 멸망 받을 위험이 전혀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그들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고 멸망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2) 그들이 우리의 거울이라면 그들을 멸망케 한 죄가 우리도 멸망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 간음, 주를 시험함, 원망과 같은 죄들 때문에 광야에 엎드러지고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이런 죄를 지어도 멸망치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의 거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에게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중요시하거나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몸으로 간음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마음으로 짓는 간음죄 역시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심상히 여기므로 주의 경고의 말씀들을 시험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고질적인 원망 불평의 죄에서 벗어나야 하며 하나님이나 주의 종이나 환경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죄를 회개하고 끊어버리지 않고 계속 이런 죄 가운데 산다면 우리는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죄들 때문에 멸망했고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적만 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일곱 족속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우상 숭배, 간음, 주를 시험하는 것, 그리고 원망 불평하는 죄였습니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적은 바로 죕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도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워야할 선한 싸움은 근본적으로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한두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 아이 성의 전쟁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승패를 무엇이 결정지었습니까? 군사력입니까? 아닙니다. 탐욕의 유무였습니다. 아이 성과의 싸움은 탐욕 즉 죄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면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 더 지적해보면 모압 왕 발락과의 싸움입니다.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에게 돈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언듯 보면 이것이 주술과 하나님의 능력과의 싸움 같습니다. 즉 능력 대결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싸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색욕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고 온 사람의 말을 들으면 모압 여자들은 아주 매혹적이고 뛰어난 미모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모는 뭔가 묘하고 아주 유혹적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미모에 굴복하여 죄를 범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우리의 대적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이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대적이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끝장입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릭 조이너가 쓴 “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이라는 책에 보면 그가 이상 중에 본 세 종류의 군대가 나옵니다. 하나는 가장 수가 많은 데 형편없는 오합지졸이고, 또 하나는 그보다 조금 수도 많고 나은데 부분적으로만 무장하고 있고, 가장 수가 적은 마지막 군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잘 훈련된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는 미래에 나타날 군대이고 현재 교회의 상태는 첫째와 둘째 상태라고 했습니다.

이 환상에서 예수님은 무서운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지금 주님은 교회에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데 누구든지 거룩해지지 않으면 서지 못할 것이요, 제하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최근에 출간된 저의 신간 “하늘나라에서 온 이메일”에 소개하고 있는 하이디 베이커의 “불꽃의 전차”라는 간증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하늘로 끌어올려져 지구위에 머물게 됐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구를 둘러싼 수천의 전차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나르는 불꽃의 전차대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각 전차에는 하나님의 두 명의 성도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투명했으며, 그들 내부엔 아무것도 감추인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어둠도 없었습니다. 위장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그들을 덮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투명했고 영광으로 가득했고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손에 칼을 가졌습니다. 각자 백금으로 된 빛나는 검을 들고 있었습니다. 칼에서는 불길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기 위해서는 두 손, 거룩한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와의 싸움에 열심을 내야하며 승리함으로써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2.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딤후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주님께 온전히 자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자녀를 군대에 보낸 분들도 있을 터인데 군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자기의 몸을 군복무 기간 동안 나라에 바쳤습니다. 시간도 바쳤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하고 하기 싫어도 하라면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낮예배나 참석하거나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절대로 주의 군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실질적인 자기의 주님으로 모셔들어야 합니다. 주님께 자신의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물을 드리고 재능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사람들의 생각에는 자기가 자기 삶의 중심인 것 같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지 누구를 위해 산단 말인가? 자기와 가족과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교를 갖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 갖는 것이므로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싫어합니다. 그런 가르침에 강한 반감을 드러냅니다. 그런 것은 목사들이 자신들을 이용해 먹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인 것처럼 아무리 우리가 우리 삶의 중심인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이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왜 당연한 것인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잘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 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만약 하나님이 우리들처럼 이기적이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모두 지옥에 던져졌을 것이고 그것으로 세상은 끝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을 것이고 인류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어야 하며 우리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그들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2) 자기중심적인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옳은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타락했다는 증거이며 타락의 부산물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에덴동산은 이름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 될 수 있었습니다(갈5:22).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아담과 하와는 변했습니다.




창 3:8-13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처럼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류는 갑자기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만 살아보겠다고 서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 이후 이러한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이 온 지구상에 퍼져나가고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당연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 상태가 아니고 타락을 통해 망가지고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잘못된 것이며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종이 자기를 위해 살아야 마땅할까요? 아니면 주인을 위해 살아야 마땅할까요? 주인을 위해 살아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유인이 아니고 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주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 것입니다.




롬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공로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것이 아닌데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 17:7-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따라서 우리는 폐일언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지 말고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시간표가 조정되고 삶이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이렇게 헌신된 사람들이 아니면 누구도 주의 군대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들 자신을 주님께 아낌없이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이쯤에서 여러분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큰믿음교회에서 제일 좋은 군사들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식당 봉사자와 중보기도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언 사역팀과 찬양팀 그리고 영상팀들도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들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입니다. 그러나 식당 봉사자들이나 중보기도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물론 이분들은 직장이나 학교에 매어있지 않고 시간을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있다고 누구나 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분들은 매일 교회에 와서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그리고 눈물로 기도합니다. 제가 볼 때 목회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사례비를 받는 것이 죄송할 정도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이분들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모든 시간에 있어서 주님께 헌신이 되어야 하고 철저히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 6:10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이 말씀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기치를 벌인 군대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용사가 되려면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는 약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합니다. 왜냐하면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강해집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강한 용사가 됩니다.

그 증거로, 다윗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소년으로서 거인 골리앗을 쳐서 넘어뜨렸습니다. 그럼 이런 용맹과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삼상 17:45-46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이러한 다윗의 말들에 무엇이 나타납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같은 용사가 되려면 다윗이 주님을 사랑했던 것 같이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단순히 지혜나 은사나 능력을 통해 강한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과 친밀해야 하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강해지는 비결이며 용사가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한편,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짝을 이룹니다. 이 둘은 결혼한 부부처럼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군대와 그리스도의 군대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군대는 파괴하는 군대가 아니고 살리는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군에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까지도 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여자들도 사병으로 입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헌법소원이 있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 군대는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군대에는 정말 여군들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군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뛰어난 용사와 장군들의 상당수가 여성입니다.

일예로, 하이디 베이커를 생각해보십시오. 하이디 베이커는 말 그대로 여 전사입니다. 그리고 장군입니다. 그는 파이브 스타에 비교할 수 있는 그리스도 군대의 장군들 중의 장군입니다. 지금 이 한 여인으로 인해 실로 엄청난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고 회교국 12개 나라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이디 베이커가 이렇게 강한 용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녀의 입신 간증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전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다가오셔서 열쇠 하나를 건네셨습니다. 전 저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냥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열쇠를 가지고 모든 방으로 통할 수가 있단다.’

처음 찾았던 방은 거대하게 큰 방이었습니다. 음식으로 가득한 그 방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쌀, 옥수수가루, 콩과 기름, 제가 볼 수 있는 한도 없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몹시 흥분이 되었습니다. 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충분한 음식들이라니.

그분이 절 데리고 가신 옆방은 아주 이상한 방이었습니다. 각 신체의 부위들로 꽉 들어찬 방이었습니다. 심장이 있었고요. 다리와 눈, 귀, 그리고 위장과 이빨, 무릎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네게 말할 때 너는 이 방으로 와도 좋아. 네가 원하는 신체의 부위들을 취해서 치료하는데 사용하렴.’

옆방으로 가게 된 건 몇 달 후였습니다. 그곳엔 왕들과 대통령이 있었는데요. 제게 이 방을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머물고 싶은 방은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 비밀의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의 문은 매우 낮았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그 문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그 문을 연 후 방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사랑스런 미소를 띠고 서 계셨습니다. 그분의 품으로 달려가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습니다. 제 귀에 예수님의 심장박동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 방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습니다. 전‘하나님! 이 방을 떠나지 않겠어요.’전 어디든 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전도하러 가고 싶지도 않았고요. 구제활동을 하러 가고 싶지도 않았고요. 가난한 자들 돌보는 것도, 아픈 이들을 돌아보는 것도 정말이지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전 그저‘싫어요. 전 여기에서 그냥 살 거예요. 다른 어떤 곳도 갈 수가 없어요. 이 장소를 떠날 수가 없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하늘로 끌어올려져 지구위에 머물게 됐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구를 둘러싼 수천의 전차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나르는 불꽃의 전차대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각 성도 안에는 단 한가지의 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크고 한없는 심장이었습니다. 그 심장이 양 어깨에 닿았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붉은 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분의 눈은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분이 사랑의 눈으로 위에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눈은 저를 녹이고 저의 심장이 훨씬 커지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심장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두근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근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각 심장들이, 각각의 거대한 심장들이, 각각의 사람의 거대한 심장들이 예수님의 심장 박동소리에 박자를 맞춰 두근거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교회로 가서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탈 것인가? 누가 영광의 전차대에 탈 것인가? 누가 거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심장을 가지고 갈 것인가?’”




이것이 바로 비결입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군대의 용사가 되고 나아가서 그 군대의 장군이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4. 권위 아래 거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이 주의 종들에 대하여 좋은 응답을 받고 주의 종들을 깊이 존경하고 따르면 사람을 우상화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우상화는 아닙니다. 우상이란 단순히 무엇을 사랑하거나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이 우상이 될 것이며 우리는 아무 것도 사랑하거나 귀중히 여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정말 살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은 우리가 주님보다 무엇인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주의 종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는 하나 주님보다 주의 종들을 더 사랑하지 않는데 그것을 보고 우상화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상화로 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으며 할 수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서 주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하고 제사를 드리려 할 때는 옷을 찢으며 만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히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바울은 이것은 우상화이니 중지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여겼으며 오히려 그런 마음이 사라진 것을 탄식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후서 10:15절에서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피터 와그너 박사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인도한 신사도적교회부흥세미나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사도적인 교회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목회자의 카리스마 즉 강렬한 영적인 권위입니다.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한 개인에게 집중된 왕권에 비교될 수 있는 강력한 권위, 이것이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부흥하고 있는 교회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하나님이 현재 일으키고 계시는 사도적인 교회들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 계신 일로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요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받으며 그들의 영적 권위가 분명하게 세워지는 것을 우상화로 몰아붙이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며 참소하는 자인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한편, 교회 안에서의 영적 질서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가정이기도 하지만 군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군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입니다. 상명하복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군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저는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지 못하고 오합지졸인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라오디게아교회처럼 민주주의적인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장로교가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장로들과 회중들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군대가 되려면 영적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군대로써 기능할 수 있게 됩니다.




마 8:5-9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직업군인입니다. 그는 군대의 생리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군인은 명령 체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군인으로서 가장 큰 죄는 항명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군대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반드시 권위를 인정하고 권위 아래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10-11)




이를 통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철저히 권위 아래 거하는 것이 최고의 믿음이고 그런 사람이 최고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최고의 신앙인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권위 아래 거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성도들을 볼 때에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도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갖춘 자라도 권위 아래 철저히 거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져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의 크기가 곧 우리 그릇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그릇은 지혜 있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좋은 조건과 장점들을 가지고 있어도 겸손하지 않은 사람들은 2류나 3류로 생각합니다.



그럼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겸손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권위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벧전 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러면 겸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자기 위에 세우신 권위(장로들)에 철저히 순복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영적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을 대할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진정한 겸손은 반드시 자기 위에 있는 권위를 인정하고 거기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위에 도전하거나 반항한 것을 회개하고 철저히 권위 아래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아주 중요한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권위에 굴복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위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릭 조이너는 “우리가 얼마나 권위를 가지게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해 결정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고 최고의 권위의 자리에 오른 것은 사울의 권위에 철저히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잘 섬기지 못하는 자는 잘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권위 아래 거하지 않는 자에게 권위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권위를 갖게 될 것인가는 우리가 우리 위에 있는 권위에 얼마나 굴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지도자든 그런 사람에게 라야 안심하고 권위를 위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섬기고자 하는 자는 큰 자가 될 것입니다.




5.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에는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3가지 비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 위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보혈을 사용하여 원수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둘째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검이요 무기입니다. 기름 부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이 말한바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그 자체입니다.

셋째는, 일사각오의 신앙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백했던 에스더와 같은 그리고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가지셨던 일사각오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에드 실보소는 “기도 전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단과 악한 세력과의 싸움이다(엡 6:10-18). 그러므로 우리가 사단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요한계시록 12:11절은 세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공식을 소개한다. 양의 피, 증거하는 말, 믿음을 위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셨기에 예수님의 피의 부분은 이미 충족되었다. 증거하는 말은 우리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일과 관련 있지만 그다지 힘든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정말 힘든 것은 우리의 죽음과 관련된 바로 세 번째 요소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싸움의 결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움츠러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고 고통과 아픔과 연계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세 번째 요소 없이는 사단과의 싸움을 이길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원수인 사단을 이기려고 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가장 강한 두려움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두려움이다. 히브리서 2:14, 15절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우리에게 악의 영과 맞서 싸우는 담대함이 없음을 사단은 알고 있다(엡 6:19, 20). 이 두려움은 이생에서의 우리의 삶을 너무 소중히 여기게 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강한 영적 용사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훼방할 때 다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가서 싸웠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사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릅니다.

다윗의 세 용사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베들레헴 성채에 있는 우물물을 다윗 왕을 위해 길어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보십시오. 성경에서 그는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라고 불리웁니다. 바울이 받은 핍박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만약 박해나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그토록 많고 큰 승리를 연속적으로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고 두려움을 극복했듯이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무장하고 두려움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6. 기도로 악한 영들과 접전을 벌여야 합니다.

릭 조이너는 지금 미국에서 베니 힌 이상으로 떠오르고 있고 그의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참된 영적 지도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가 쓴 “마지막 추구”(우리 나라 책명 : 빛과 어두움의 영적 전쟁)라는 책은 “지옥의 군대가 진군해 오고 있다”라는 제목의 환상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충격 자체입니다.




“마귀의 군대는 엄청난 규모로 내 시야 끝까지 뻗쳐 있었다. 그것은 각기 다른 군기를 들고 있는 부대들로 나뉘어 있었다. 맨 앞에 있는 부대들은 교만, 자기 의, 존엄, 야욕, 불의한 판단, 그리고 질투와 같은 깃발들 아래서 진군하였다.

나의 시야 너머에도 훨씬 더 많은 악의 군대들이 있었지만, 지옥에서 나온 이 끔직한 선봉대가 가장 강력해 보였다. 이 군대의 대장은 바로 '형제들의 참소자'였다. 이 군대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칼의 이름은 협박이었고, 창은 배반, 그리고 화살들은 참소, 험담, 중상, 흠잡기 등이었다. 이 군대의 주공격을 준비하기 위하여 전초대로 거절, 앙심, 조급, 용서하지 못함, 정욕 등의 이름을 가진 마귀들의 중대들이 앞서 나가 있었다...

이 군대의 일차 전략은 가능한 대로 모든 관계, 즉 각 교회들의 상호관계, 성도들과 목사들, 부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 서로간의 모든 관계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 정찰병들은 교회들과 가정들 그리고 각 개인들 안에 있는 틈새를 찾아내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면 거절, 앙심, 정욕과 같은 것들이 이를 이용하고 틈새를 더욱 벌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뒤따라 온 수많은 부대들이 이 틈새를 통해 밀어닥치고 희생자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다.

이 환상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군대들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리스도인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대부분은 옷을 잘 차려입고, 존경받을 만하고 또한 세련된 데다 교육도 잘 받은 듯이 보였으며, 사회 각 계층을 고루 대표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 이상의 귀신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 마귀 중 하나가 지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히 보였다...

내가 멀리 이 군대의 후위를 바라보니 바로 ‘참소자’의 측근들이 보였다. 나는 그의 전략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이 너무 단순함에 놀랐다. 그는 분쟁이 난 집은 온전히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군대는 교회에 분열을 가져와 교회가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획책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형제들 간에 싸움을 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방 사단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임수에 빠진 신자들이 ‘고소자’에게 복종하여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을 지배하는 그의 힘은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군대가 전진해 나가면서, 그의 확신과 그의 모든 지휘관들의 확신은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이 군대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방식에 얼마만큼 동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사 내내 있었던 일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적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아닙니다. 사탄과 그의 졸개인 귀신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귀신들과 싸우는 것은 투명인간과 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과 어떻게 싸운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간질하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과 싸워서 이기는 비결입니다.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입니다. 몇 달 전 짐 골이 우리나라에 와서 컨퍼런스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약속 위에 무릎 꿇고”라는 책에 보면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미첼 앤과 집회에 막 참석하려고 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영적인 환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 내가 보았던 환상은 이러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군대가 다가오는 장면으로 전사들이 하나가 되어 행진하고 있었다. 전사들이 작심한 듯 언덕을 올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길들여진 병기들이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벨벳 용사들 혹은 벨벳 군대'라고 지칭하시는 것 같았다. 기도의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시자, 그들은 주님의 위대한 이름으로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미첼 앤과 나는 어느새 이 군대가 대적을 어떻게 공격하는지를 묘사하는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 찬양하게 되었다. 전사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속도보다는 더욱 느리게 움직이며 행진하고 있었다. 환상에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행진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구주 하나님의 약속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군대는 놀랄만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이 모인 힘은 그들 가운데 있지 않다. 하나님 가운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군대이며 전투하는 군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의지하는 군사를 찾고 계신다.”




다윗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영적 전쟁에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가장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이 사자처럼 포효하며 일어나시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친히 적과 싸우시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보다 강한 무기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만큼 강합니다. 기도는 전능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는 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함으로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기도가 전세를 좌우했습니다. 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모세뿐 만이 아닙니다. 사무엘도 기도로 쳐들어오는 적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바울이 영적 전쟁과 용사들이 입어야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서 말하고 유일한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한 후 이렇게 썼습니다.




엡 6:18-19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여러분 이것이 곧 영적 전쟁을 하는 비결이고 그리스도의 군대의 용사들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릎으로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릎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의 용사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대상 11:10-14, 26-47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두목은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윗의 힘을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세워 왕을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은 삼십 인의 두목이라. 저가 창을 들어 한 때에 삼백 인을 죽였고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세 용사 중 하나이라. 저가 바스담밈에서 다윗과 함께 하였더니 블레셋 사람이 그 곳에 모여 와서 치니 거기 보리가 많이 난 밭이 있더라.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희가 그 밭 가운데 서서 그 밭을 보호하여 블레셋 사람을 죽였으니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또 군중의 큰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하롤 사람 삼훗과 블론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십브개와 아호아 사람 일래와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렛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이대와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후래와 아르바 사람 아비엘과 바하룸 사람 아스마웹과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기손 사람 하셈의 아들들과 하랄 사람 사게의 아들 요나단과 하랄 사람 사갈의 아들 아히암과 울의 아들 엘리발과 므게랏 사람 헤벨과 블론 사람 아히야와 갈멜 사람 헤스로와 에스배의 아들 나아래와 나단의 아우 요엘과 하그리의 아들 밉할과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병기 잡은 자 베롯 사람 나하래와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헷 사람 우리아와 알래의 아들 사밧과 르우벤 자손 시사의 아들 곧 르우벤 자손의 두목 아디나와 그 종자 삼십 인과 마아가의 아들 하난과 미덴 사람 요사밧과 아스드랏 사람 웃시야와 아로엘 사람 호담의 아들 사마와 여이엘과 시므리의 아들 여디아엘과 그 아우 디스 사람 요하와 마하위 사람 엘리엘과 엘라암의 아들 여리배와 요사위야와 모압 사람 이드마와 엘리엘과 오벳과 므소바 사람 야아시엘이더라.”




다윗 왕에게 군대가 있었던 것처럼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도 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군대에 소속되어 있는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군대에 군인이 있고 용사가 있으며 사병이 있고 장군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대에도 특별히 뛰어난 용사들과 주님이 높이 들어 쓰시는 장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왕이면 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군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은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1. 자기와 싸우십시오.

2. 헌신된 자가 되십시오.

3.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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