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 아버지! / 롬8:12-17
본문
얼마 전 신문에선 본 글이 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마시는 술잔의 절반은 눈물과 한숨이다”
물론 술을 마시지 않는 이 자리에 계신 아버지들에게는 다른 표현을 써야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우울합니다.
집안의 권위로 상징되던 아버지는 찾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아버지는 위축되고 고립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버지들은 나이 40이 넘으면 ‘불혹’이 아니라 별 볼일 없는 책의 ‘부록’ 같은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 아닌 ‘가족 신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영업을 하는 김모 씨는 요즘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서글픈 상실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안방에서 TV를 보거나 전화를 하고, 12시가 다 되어 돌아온 아이들과는 눈이 마주쳐도 대화가 두 마디 이상 이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그대로 따뜻하게 반기는 것은 강아지 뿐입니다.
가족과의 단절 속에서 집 속의 또 다른 집에 사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장이 불안해진 것 또한 우리 시대 아버지를 더욱 주눅 들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삼팔선, 사오정 이야기는 이제 감동이 없습니다.
애들 공부 마칠 때까지 만이라도 직장생활을 하고 싶다는 한 40대 가장은 이렇게 넋두리합니다.
“사교육비로 허리가 휘고 정년 보장도 없고…. 삶의 희망이 없어요.
오죽하면 요즘은 3D에 ‘꿈이 없는’이란 뜻의 ‘드림리스(dreamless)’를 하나 더 추가한 ‘4D’란 말이 나왔겠어요.
정년 보장해 주고 사교육비 잡는다는 사람 있으면 대통령으로 뽑아 줄 겁니다.”
아버지의 위기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슬로건을 내 걸고 아버지학교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요, 가정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요, 교회의 위기는 바로 사회의 위기가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힘과 권위를 잃어버리고 어깨가 쳐진 이 시대의 아버지들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야 할 때입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버지의 권위가 떨어지고, 약해진 이 시대 상황 속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육신의 아버지는 강한 것 같지만 한없이 약한 존재이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기둥이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기둥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연약한 육신의 아버지도 든든한 기둥이 될진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시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아바’는 아람어 ‘아빠’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전에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가슴이 찡한 적이 있습니다.
한 중년의 남성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끌어안고 웁니다.
“아빠! 아빠! 내가 얼마나 아빠를 불러보고 싶었는지 알아!”
중년의 나이에 아빠라는 단어가 얼마나 어색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빠라고 큰 소리로 목 놓아 불렀습니다.
아들은 평생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아버지를 그리워했습니다.
남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아버지를 반세기만에 만나서 그는 그 동안의 한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풀었습니다.
50년 만에 만난 남북의 아들과 아버지가 ‘아빠’라는 단어 하나로 어색함 없이 하나되는 것을 보면서 ‘아빠’ ‘아버지’라는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것인지를 느꼈습니다.
육신의 아빠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복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신비로운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않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전도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버지인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가 기도를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님!” 무슨 조폭도 아니고 하나님이 형님이 뭡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자 “네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나에게는 촌수가 형님이 아니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Father in Heaven)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의 종, 마귀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2장 2~3에는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해 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여기서 ‘특권’은 ‘신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셔드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얻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영접할 때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로얄 패밀리(Royal Family)가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시고 보증해 주십니다(고후1:22)
오늘 본문 14~16에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들은 무서운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비록 고아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양자를 삼아 자기 호적에 올리면 법적 아들이 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후사가 됩니다.
이것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입니다.
그는 원래 노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왕위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옥타비아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위를 양자인 네로에게 넘겨주면서 딸 옥타비아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결혼하는 데는 절차가 복잡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법적으로는 분명한 남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나라에서는 그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특별 조치법을 제정하여 통과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남남이었을지라도 양자가 된 이상 아들 딸과 똑같은 신분을 갖게 되어 상속권까지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공동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권리입니다.
양자가 무엇입니까? 피가 섞였습니까?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권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라는 동화를 아시죠?
어린 백조가 자신의 신분을 모르고 오리 새끼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구박 받고 삽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합니까? 미운 오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나중에 자신이 백조인 것을 깨닫고 창공을 향해 날아갑니다.
본래부터 백조였지만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이 열린 것입니다.
자기의 신분을 확인하는 순간 미운 오리가 아닌 진정한 백조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자녀라는 분명한 고백이 없으면 미운 오리새끼처럼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미운 오리새끼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분명한 신분 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빚진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시지만 우리는 항상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 종이 되면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자는 행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종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섬기는 종이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스스로 종의 마음으로 섬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세상 속에서 사랑의 빚진자로서의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종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도, 건강도, 재물도, 심지어 자식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나의 모든 소유권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 빚진자의 태도입니다.
빚진 자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주인의 지시에 순종하고, 주인의 기쁨이 되기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섬길 때 종이 아닌 자유자로, 친구로 높여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둘째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를 아빠로 부르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의 인도를 받으면 마귀의 종이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일을 합니다.
결국 자신의 삶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의의 병기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삶을 삽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비결은 바로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그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열매 맺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고난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들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걸어가는 길은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요, 가시밭길입니다.
세상의 길은 넓고 편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나게 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 길입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좁고 험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좇다가 당하는 고난은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나 성령을 좇다가 당하는 고난은 기쁨이 있습니다. 찬송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밤 중에 그들은 찬송과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능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크게 기뻐했습니다.
나같은 죄인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게 하시는가!!!
오히려 감격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고난은 변장하시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입니다.
혹시 주님 때문에 고난당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18절)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런 기업을 허락하십니다.
이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대법관 가운데 김홍섭 판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워낙 인품이 훌륭하고, 겸손하고, 청빈한 분이었습니다.
또한 믿음도 독실하셔서 시간만 있으면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돌아보며 위로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법관’ 이란 별명도 얻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시외버스를 타고서 강원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탄 버스가 검문소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경찰이 올라와서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아무래도 그의 행색이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그의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오?"
그는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대법원 판사입니다."
그러자 경찰은 그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화를 벌컥 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습니다.
"당신 지금 누구를 놀리는거요? 무슨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오? 어디 신분증 한 번 내보세요!"
그는 자기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경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공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순경이 그의 신분증을 보니까 대법원 판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거의 기절할 뻔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그 자리에 탔습니다.
경찰이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순경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쳇! 예수쟁이구먼."
아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시한 듯이 우리를 쳐다보지는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과연 시시한 분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시한 삶을 살아가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마치 시시한 분이신 것처럼 평가절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어떤 거지아이가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 아이를 이끌고 가까운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 시켜주었습니다.
아이는 정신없이 국밥을 퍼먹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그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계면쩍은 듯이 아주머니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하나님과 친척이시지요?"
아주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하나님의 친척이 아니야. 하나님의 딸이란다!"
그 소리를 듣고서 거지아이는 자기 짐작이 맞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제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르게 처신할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빠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신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빚진 자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기를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영원한 ‘아바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진리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양인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