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얻기 위하여
본문
야고보서 1:1-8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의 즉각적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은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런 것이기 때문에 “시험을 기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롬5:3-5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시험이 가져올 궁극적인 어떤 소망을 기대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1.시험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우리는 누구나 다 학교생활에 추억과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학교 다니실 때, 시험을 즐기신 분이 계십니까?
아마 누구도 시험을 좋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험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시험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시험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통해서 자기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나의 어디가 부족한가를 알게 되어 시험을 치를 때마다 실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용하신 진짜 이유는, 그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믿음의 실력이 증가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귀한 선물이 있습니다.
엡2: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은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믿음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이 좀더 견고한 믿음이 되고, 강력한 믿음이 되고, 성숙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시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세기에 살던 성도들도 시험을 겪었습니다.
1절에 보면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했고, 벧전1:1절에도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한다”라고 시작합니다.
교회사가들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별명 가운데 하나가 “흩어져 있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어쩌다가 운명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단순히 흩어졌다”라는 지리적인 흩어짐만을 뜻하는 표현이 아니라 “그들이 고난을 위해서 흩어져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벧전1:6-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치 불을 통과한 금이 더 아름다운 금으로 재련되는 것처럼, 우리 믿음이 보배롭고, 더 순결하고, 더 아름다운 믿음으로 나타나 주님이 오시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도록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부르시면서 “네 자손이 하늘이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될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브라함이 자식을 쉽게 얻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은 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백살이 가까워지도록 자식에 대한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적의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아들을 얻었을 때 얼마나 흥분을 했을까요?
아마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라볼 때마다 그것이 기쁨이요, 자랑이요, 자신의 모든 것이 그 아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삭의 성장 과정이 평탄했습니까?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서 나에게 제물로 바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번뇌와 고민했을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깊은 고뇌와 방황 끝에 드디어 결단을 합니다.
어떤 결단을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할 수 없는 자기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하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그 모리아의 제단에 올려놓는 그 순간, 하나님은 “내가 네 마음을 알았다. 이제 시험은 끝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서 다른 것을 예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다른 제물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해 놓고 왜 이렇게 그를 힘들게 했을 것이라고 느끼십니까?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한가지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상식과 내 이성을 초월해서 생명의 근원이요, 창조주요, 그리고 역사의 섭리자이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아픈 것이지만 시험을 통해서 내 믿음이 순결해지고, 내 믿음이 아름다워지고, 내 믿음이 더 강력해지고, 또 내 믿음이 더 고상하게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시험은 우리를 인내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래 “인내”라는 단어는 희랍어 “휘포 메네”라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인데, 휘포는 “무엇 무엇 아래에서” 메네는 “머문다”는 뜻으로서 “정말 어려운 환경 아래서 우리가 계속 성실하게 머물러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내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 사람들이 인내합니까?
인내하지 못하죠.
그래서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무언가를 좀 해봐야지 하고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쳐서 나중에는 더 큰 고통, 더 큰 재앙을 초래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자식을 쉽게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 아브라함은 끝까지 참았습니까?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신의 경수도 끊어졌고, 자기는 아이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아브라함의 동의를 얻어 자기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누굽니까?
이스마엘입니다.
열심히 자기가 꾀를 써서 낳은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부인 사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얼마나 길고 긴 고통이 계속됩니까?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아랍민족과 이스라엘민족의 역사적 갈등의 시초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다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참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마침내 참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래 참을 때,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기쁨의 열매인 것입니다.
3.시험은 우리를 지혜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가 수지 맞았던 솔로몬을 기억하십니까?
오늘 만약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한가지만 구해 보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솔로몬은 “하나님, 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이 백성을 겸허하게 잘 섬기고 싶어요”라고 소원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셔서 내가 “너에게 지혜만 줄 것이 아니라 명성도 권위도 부귀도 네 삶의 평안함도 다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가 지혜 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지혜란 무엇입니까?
지식은 책에서 얻는 것이지만 지혜는 책에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는 오직 삶을 통해 얻는 일종의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하지 않아도 올바른 판단력, 올바른 센스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 이웃들과 나 자신에게 함께 유익이 될 수 있는 올바른 판단력을 실행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저자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야고보서를 쓴 사람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 자기 형님이었던 예수님에 관해서 다소간 불신을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진실한 신자가 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를 많이 했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그에게 “낙타의 무릎을 가지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아마 야고보가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의 동생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폼잡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1절에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가 기도를 통해 지혜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궁극적인 유익과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험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 시험을 통해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고, 인내의 사람이 되고, 지혜의 사람이 되어 주 앞에 서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헨리 나우엔의 책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중세기 어떤 수도사의 얘기를 인용한 내용인데, 아주 노련한 존경받는 수도사 한사람이 아직은 좀 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있는 젊은 수도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아주 견고하고 딱딱한 흙을 만지면서 “여보게, 여기 물 좀 붓지”라고 하자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물은 딱딱한 흙 옆으로 다 흘러내려 갔습니다. 그러자 노련한 수도사는 “이 딱딱한 흙은 물을 받지 못하는 구만. 그렇지?” 그러면서 옆에 있는 망치를 집어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보게 다시 물을 부어보게”라고 말했고, 젊은 수도사가 부드러워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자 그 물이 흙을 응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노련한 수도사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여기다가 말이야, 씨를 뿌리면 틀림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겠나? 이것을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의 법칙이라고 말한다네”
그렇습니다.
내가 깨어지고 내가 부서질 때, 하나님의 기뻐하는 꽃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위하여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깨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 깨뜨리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 정말 참을 줄 아는 인내의 사람이 되고, 지혜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창훈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