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通)의 교차로 :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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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순목사 [성경본문] 행2:1-13
/ 행2:1-13 / 070527(성령강림주일)
지난 주 미국 일간지 USA Today가 창간 25주년을 맞아 지난 25년간 미국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25가지 발명품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1위는 휴대전화, 2위는 노트북 컴퓨터, 3위는 이동 중에도 e-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블랙베리 단말기, 4위는 직불카드, 5위는 전화를 골라서 받을 수 있게 해준 전화 발신자 표시장치입니다.
이런 발명품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강의 IT 국가인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은 노키아에 이어 세계 제2의 휴대폰 생산국가입니다.
처음 휴대폰이 등장했을 때는 거의 무기 수준이었습니다.
가격도 3-400만원이나 했고, 돈 있는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전화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린 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능을 갖춘 휴대폰을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휴대폰은 우리의 일상을 엄청나게 바꾸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애인 없이는 살아도 휴대폰 없이는 못삽니다.
휴대폰은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 수준이 아니라 문자 메시지는 기본이고, 모든 주문과 결제, 그리고 동영상 촬영을 하여 인터넷에 올리고, 모든 삶을 휴대폰과 함께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시편 23편의 첫 구절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휴대폰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도다”
휴대폰은 우리의 삶을 참 편리하게 만들어줍니다.
산 꼭대기에서도, 바다 한 가운데서도, 심지어 외국에서도 집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합니다.
시골 농부들도 논두렁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중국집에 자장면 배달을 시킵니다.
위험상황을 동시에 연락하여 위험으로부터 신속하게 도피하게 합니다.
그러나 휴대폰이 삶의 편리함을 주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도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휴대폰 소리는 거의 소음 수준입니다.
예배 시간에도 휴대폰 소리는 울려댑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빨리 끄는 것이 아니라 의자 밑에 머리를 대고 전화를 받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공교롭게도 한참 톤을 높여 설교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순간 교인들도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으시더니, “하나님이 예배 잘 드리고 있는지 확인 전화하셨답니다.” 이렇게 재치 있게 넘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휴대폰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길거리 신호등 앞에서 실험을 했는데 휴대폰 소리를 들려주자 모든 사람들이 자기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하더랍니다.
어떤 분은 휴대폰을 샀는데 아무도 전화를 해주지 않아서 우울증에 걸렸답니다.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려서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해서 받고 보니 060-전화, 땅 사라는 전화였답니다.
휴대폰의 등장으로 인한 가장 큰 부작용 중의 하나는 대화가 대절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방에 있는 대학 룸메이트끼리도 문자나 메신저로 이야기합니다.
방에 있는 아이가 주방에 있는 엄마에게 식사준비 됐느냐고 문자를 날립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친구를 만나도 문자로 날립니다. “너 어디가니?”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은 놀랍도록 발전하고 있지만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점점 어렵습니다.
휴대폰의 디자인과 기능은 날로 다양해지고 새로워지건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진실한 의사소통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교회 미래학자이자 신세대 영성작가인 레너드 스위트(Leonard Sweet)는 21세기 교회의 키 워드(Key Word)로 “통(通)”을 말합니다.
“통(通)”은 ‘전체, 조화, 연결, 궁극적 관계 형성’을 뜻합니다.
“통(通)”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지향합니다.
“통(通)”은 대립이나 갈등이 아닌 조화와 협력을 말합니다.
“통(通)”은 단절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는 것이요 연결되는 것입니다.
“통(通)”은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의 형성을 지향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한 마디로 말하면 ‘불통의 시대’입니다.
인간과 자연과 관계가 불통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보존하는 데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엄청난 자연재앙으로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야 할 “통(通)”의 대상임을 망각한 결과입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불통입니다.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기도 바쁜 시대입니다.
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하셨지만 사랑의 대상이기 보다는 경쟁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내가 상대방을 넘어서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자기 친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하기만 합니다.
직장에서도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전투에 임하는 군인처럼 차갑기만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불통입니다.
이성에 길들여진 우리의 가슴은 너무나 작아져 있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목이 터져라 불러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제발 내버려 두세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불통(不通)”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불행합니다.
자기가 쌓아놓은 울타리에 갇혀서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나 관심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정신없이 달립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목표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허망합니다.
자기 보기에는 바른 길 같았는데 결국은 파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이 불통의 시대를 단절하고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바벨탑을 쌓고자 할 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십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민족을 흩으십니다.
그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회복되는 사건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선물로 약속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50일 되는 날,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빠르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했습니다.
성령충만한 은혜가 임하자 한 가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곳에는 약 15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각각 자기 나라의 언어로 들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는 당시의 공용어인 헬라말이 아니면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 사도가 설교할 때에 자기나라 언어로 동시통역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는 언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모든 불통의 언어가 소통의 언어로 회복됩니다.
죄의 결과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자기의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그런데 타 지역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 성령님 임하시는 순간 서로 통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불통의 관계가 소통의 관계로 회복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혼잡케 하고, 넘어지게 하는 대부분의 요소는 말입니다.
언어는 범죄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언어를 잘못 사용하면 죄의 도구로 이용당합니다.
사탄이 인간을 범죄의 길로 빠뜨릴 때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말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말로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말로 유혹하고 말로 시험에 빠지게 만듭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교묘하게 말로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너는 안돼, 너는 틀렸어’
자기 비하와 열등감의 언어를 불어 넣습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비하시키며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집니다.
서로를 미워하게 하는 중상과 비방의 말을 상대방에게 퍼뜨립니다.
그러면 서로의 관계가 악화되고 깨집니다.
공동체가 갈등과 분열에 빠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언어생활에 대해서 주의를 요구합니다.
잠언18: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야고보 장로는 사람의 혀는 불의 세계라고 지적합니다.(약2:6절 이하)
우리 지체 중에 작은 것이지만 큰 배를 움직이는 키와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기에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약2:8)고 지적합니다.
결국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실 때 올바른 언어생활이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남을 비방하고, 죽이는 독을 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입술의 언어가 축복의 언어로 바꾸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함을 날마다 구하십시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때만 우리는 천국의 언어, 축복의 언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입술을 지배하실 때만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오늘도 우리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축복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fellowship)하심을 강조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언어의 단절과 불통의 상태를 소통케 하시고, 교통케 하시는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언어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통으로 연결시키는 교차로입니다.
모든 길은 교차로를 통하여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단절과 아픔은 성령님을 통하여 서로 하나로 이어집니다.
성령님은 바로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는 바로 돕는자(Helper)이십니다.
보혜사는 바로 위로자(Comforter)이십니다.
보혜사는 바로 중보자(Mediator)이십니다.
보혜사는 바로 상담자(Counsellor)이십니다.
보혜사는 바로 가르치시는 교사(Teacher)이십니다.
따라서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에는 모든 것이 통하는 교차로가 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아직 불통한 부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도 불통의 관계로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성령님을 여러분 삶의 중심으로 모셔드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고 통제하는 순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희미하게 느껴졌던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하게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임이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기도하십시오.
성령님! 이 시간 내 안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보혜사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가슴을 터치하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삶 속에 가족간에, 이웃간에, 성도간에 불통한 부분이 있습니까?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인간의 방법과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미움의 문제를 극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위로 영, 치유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면 미움이 사랑으로 회복됩니다.
성령충만 하면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불통의 삶을 단절하고 “통(通)”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자연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으로 돌보아야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은 자연과의 “통(通)”이 이루어져야 정화가 됩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를 닦아도 자연이 주는 위대한 교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죽은 것 같았던 나뭇가지에 생명의 기운이 움터오는 모습을 어떻게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자연을 통해 생명의 숨결을 느끼고, 우주만물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깨닫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깨우쳐 주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通)”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웃과의 관계를 “통(通)”하게 만듭니다.
성령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상대방을 ‘그것(It)’으로 대합니다.
모든 인간을 하나의 상품으로, 경쟁상대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인간을 ‘인격’으로 대합니다.
인간을 상품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품으로 서로를 존귀하게 대합니다.
바로 성령의 사람이 될 때 자기의 이기심을 넘어, “통(通)”의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통(通)”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로 불통(不通)된 길을 새롭게 “통(通)”하게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불통의 세상을 온전한 소통의 세계로 열어주는 소통의 교차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하나님과 소통된 모든 백성들이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생명의 교차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교차로는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접속이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은 죄 많은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플러그 인(plug-in) 시켜주는 통의 교차로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성령님은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만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다가오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단절의 벽을 넘어 통의 교차로로 안내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내면의 관계가 불통되어 답답하십니까?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다가오시는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하게 될 수 있을까요?
R.A. Torrey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깊이 신뢰하십시오.
둘째로, 자신의 모든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회개하십시오.
셋째로, 그리스도 예수께 온전히 헌신하십시오.
넷째로,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구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식이 구하면 아비가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주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기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이 시간 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 했는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죄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나의 남은 삶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성령님이여 내 안에 임하셔 나를 새롭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가슴을 터치하시는 순간 모든 불통이 소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창조의 질서로 회복되고, 치유되는 은혜가 일어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불통의 삶을 소통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능력의 교차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막혔던 길이 뚫려지고, 새롭게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님을 사모하며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성령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임하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