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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 능력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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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 능력세례 행 1:5-8
영국의 존 러스킨 (John Ruskin) 경은 “나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꼭 잡아야 할 것을 놓칠 때 종종 경악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전혀 신앙적인 의미가 내포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합당한 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그들이 가졌던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는 멋지고 훌륭한 예배당과 세련된 예배의식과 홍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는 많은 자료들과 정보들 그리고 잘 교육받은 교역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와는 달리 인쇄술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든지 손쉽게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성경 연구 자료들도 원하면 언제든지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외형적인 면에서 본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것들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고, 현대 교회처럼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비싼 피아노나 잘 훈련된 성가대도 없이 아주 초라한 환경 속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현대 교회 목회자들처럼 대학과 대학원 과정의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도 아주 귀해서 교회에 한 권 비치해 놓으면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처럼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면에서는 현대 교회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달랐습니다. 현대 교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나타난 결과도 우리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초대교회와 당시의 성도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 (히 13:9)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의 체험이 우리들의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시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도 그의 나라를 더 크게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는 한 가지 필연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세례’ 곧 ‘능력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처럼 중요한 주제인 ‘성령세례’ 곧 ‘능력세례’라는 주제로 같이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성령세례란?
첫째로, ‘성령세례’가 무엇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세례’의 체험에 대해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눅 24:49; 행 1:4), “성령의 선물” (행 2:35), “성령세례” (요 1:33; 행 1:5; 11:16), “성령을 받는 것” (행 8:17; 10:47; 19:2), “성령충만” (행 2:4; 9:17) 등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성경의 표현들이 다 “성령세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체험을 “성령세례”라고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사람들이 “성령세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령세례”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성령세례”는 중생이 아닙니다. 의외로 많은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 영접하여 거듭나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을 한 번 보십시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주로 믿고 확실하게 고백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마 16:16)라고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또한 제자들 중 의심이 많았던 도마조차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고 나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요 20:28)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불어 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요 20:22)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시제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께서 “후” 하고 숨을 불어 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하신 것은 미래에 될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 시간에 “성령의 내주”를 체험했습니다. 이미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모두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후에 마다 요한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성령 받기를 기도했을 때 결국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로 내려가 예수를 증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수많은 기적과 이사들이 나타났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그의 말을 믿고서 세례를 받았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빌립 집사가 증거한 복음을 믿고 중생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귀에까지 들어가 결국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오게 되었는데 15절과 16절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두 사도가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이미 중생하여 세례까지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세례”를 받도록 도와주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이 사건에서도 분명히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세례”의 체험은 중생과는 별개의 후속적인 사건인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2. “성령세례”는 물세례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세례가 곧 “성령세례”라고 주장합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곧 “성령세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마리아 성도들은 빌립 집사를 통해 물세례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또 다른 세례 곧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그의 온 집안과 친구들이 다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 있는 점은 그들이 먼저 물세례를 받고 나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거꾸로 “성령세례”를 먼저 받고 곧바로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다 성령을 받는 것을 본 베드로는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행 10:47) 하며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세례”는 물세례와는 다른 세례입니다. 이는 중생과도 다른 별개의 체험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
둘째로, 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예수 믿고 중생하여 구원받으면 됐지 왜 성령을 또 받으라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왜 우리들 모두가 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그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그 이유와 목적이 적어도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능력을 받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증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1. “성령세례”를 받으면 큰 능력을 받습니다. 헬라어로 ‘능력’이란 ‘뒤나미스’인데 이는 마치 폭탄 같은 폭발력이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폭탄을 의미하는 ‘다이너마이트’ (dynamite)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힘, 전에는 체험하지 못했던 힘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찬송을 해도 힘이 없었고, 기도를 해도 힘이 없었으며, 말씀도 건성으로 듣는 현식적인 신앙생활이었는데, “성령세례”를 받고 나니까 능력이 생겨 찬송도 기도도 말씀도 모두 힘과 활력이 넘쳐나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그 역동적이고 활기에 찬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들은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던 것이 바로 여기에서 풀어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쁨이 넘치고 믿음이 충만하며 늘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삶의 원동력이 바로 “성령세례”라는 영적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세례”를 “능력세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 신부 마이클 하퍼 (Michael Harper)는 켐브릿지 (Cambridge) 대학에서 법을 공부할 때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소명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영국 성공회에서 신부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교회를 맡아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기쁨도 활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봄 판함 (Farnham)이라는 한 도시에서 에베소서를 주제로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준비하고 기차로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다시 에베소서의 중심 메시지를 묵상할 때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바울의 기도가 두 군데 나오는데, 하나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 (1:15-19)을 기도하는 내용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가져야 할 것” (3:14-19)을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과연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고 있는가, 또한 “가져야 할 것”을 다 가지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집회를 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그의 부인도 몇 년 전부터 똑같은 것을 느껴왔던 차라 그때부터 그들은 이 문제를 놓고 같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주간 목요일에 둘 다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영국과 전 세계에 성령운동 지도자로 큰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2. “성령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증인이 됩니다. 헬라어로 ‘증인’이란 ‘말튀스’인데 이는 ‘목격자’ ‘증인’ ‘순교자’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증인으로 그분에 대해 먼저 확신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구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나 두려움 없이 부끄럼 없이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증인됨의 참의미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을 때 가능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보고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이 곧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예고하시자,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불과 몇 시간 만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옛 직업을 찾아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비겁하고 나약하며 용기 없었던 베드로의 모습이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은 후로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에게 그날 이후로 큰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메시지에 힘이 생겼고, 그의 믿음의 행보에 힘이 생겻습니다. 그의 한 번 설교에 3천명이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어떤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살다가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란 먼저 나 자신의 신앙생활이 보다 능력이 있고 활기가 넘치게 하는 “능력세례”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효과적인 중인이 되도록 하는 “증거의 세례”입니다. 우리 모두 이 놀랍고 복된 영적 체험을 해야 합니다. 큰 능력을 받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효과적인 증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최완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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