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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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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 1:9-14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명령에 순종해 성령세례를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사도행전 2장을 보니 120명의 제자들이 다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약속이니까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당연하지만, 그 외에 다른 요인은 없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다른 요인은 바로 기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개역성경은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고, 새 공동번역 성경은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만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막연하게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면 성령세례를 받겠지 하고 그냥 앉아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면 “기도에 힘썼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함께 모이기에 힘씀
첫째로, 그들은 함께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일 때 일어납니다. 우리 속담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힘보다는 많은 사라들의 합쳐진 힘이 더 강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기도보다는 여러 사람의 합한 기도가 더 강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혼자서 하는 개인기도도 필요하지만 합심기도도 중요합니다. 일찍이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이는 “성도들이 왜 함께 신앙생활 하여야 하는가?” 그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교회주의가 허무맹랑한 주장이요, 비성경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홀로 신앙생활 한다면, 혹 시험을 당해 낙심하고 주저앉을 때 누가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기를 힘쓸 때 혹 한 사람이 넘어지고 쓰러진다 해도 다른 사람이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이기를 힘쓸 때 믿음이 약한 형제, 자매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이유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적인 이유로 성도들 간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인 이유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 연합할 때 보다 더 큰 힘이 축적되고 큰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는 말씀은 절대 진리입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막바지 전쟁이 있었던 때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전쟁의 승패가 절대적으로 공군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의 공군력이 막강했고, 공중전을 하면 추락하는 비행기가 독일군보다 연합군에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연합군 쪽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를 잘 믿는 한 공군 고위 지휘관이 성경을 읽다가 전도서 4장 12절 말씀 곧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는 구절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작전 명령을 내렸습니다. 공중전이 발생할 경우 무조건 적기 한 대에 아군기 2대씩 대항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거의 10대 1의 비율로 공중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연합군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원칙은 우리의 영적 전투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한 사람이 원수 마귀와 홀로 싸우면 쉽게 패하지만 두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연합하면 능히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제부터 두 사람 단위로 짝을 지어 서로 돌보고 권면하며 격려하는 운동을 올 해부터 전개해 나가려고 합니다. 한 가정이주일 예배에 빠지면 다른 가정이 전화하고 심방하며, 한 사람이 시험을 당하면 다른 사람이 그를 격려하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영혼, 한 가정도 넘어지거나 시험 들어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이유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0:2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깝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더욱 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도 그들처럼 능력도 받을 수 있고, 우리 가운데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한 마음을 가지기에 힘씀
둘째로, 그들은 한 마음을 가지기에 힘썼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성도들의 특징은 모두 한 마음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성도들이 한 마음을 가집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폭풍우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한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1. 같은 목적을 갖고 모였다는 말입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갖고 모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해 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모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6절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12제자와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오직 120명만 모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약 400명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함께 모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탈하는 제자들의 수가 더해갔습니다.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의 이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생업 때문에 그 자리를 일찍 떠난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간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믿음이 적어 기도하다 중간에 살며시 사라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 마음을 갖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세례라는 목적보다 돈이 더 중요했고, 능력을 받는 것보다 생업이 더 중요했으며,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보다 선약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20명의 제자들은 같은 목적 곧 성령세례를 받고 큰 능력을 부여받아 그의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 한 마음으로 모였고 기도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모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라” (빌 2:5)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전의 제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서로 “누가 크냐?” 하면서 싸우고 경쟁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계급도 없었고 아무런 차별도 없었습니다. 남여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구별 없이 예수의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교회는 문턱이 낮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도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마음을 갖고 모일 때,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와서 은혜 받고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처럼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3. 믿음으로 모였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이 모인 제자들은 다 중간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120명의 제자들은 다 믿음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물론 불신자도 죄인도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인 성도들의 삶과 행동을 통해 그런 사람들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예수의 동생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전에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믿음으로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더구나 그 동생들 중에 야고보는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모일 때마다 믿음으로 모여야 합니다. 세상 지식, 경험, 지혜보다 믿음이 우선하는 역사가 있을 때, 우리 안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열중하기에 힘씀
셋째로, 그들은 기도에 열중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새 공동 번역은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사용된 단어는 ‘프로스카르테론토스’인데, 이는 “충실하게 계속하다” (continue faithfully), "계속 남아있다“ (remain constantly) 등의 뜻이 있습니다. 또 어떤 영어 성경 번역 (NIV)은 "계속 자신들을 기도에 헌신했다“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prayer)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이는 생사결단의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의 약속 곧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는 그 다락방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단의 기도였습니다. 창세기 33장에 나오는 약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드렸던 야곱의 기도처럼 아주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26)라고 기도했고, 결국 그의 끈질긴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 생활에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개인의 기도 제목뿐만 아니라 중보 기도의 제목들을 놓고도 이런 생사결단의 기도, 끈질긴 기도가 필요합니다.
2.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 500여 명의 제자들 중 다수가 중도에서 이탈했습니다. 아마도 하루나 이틀 정도 기도하다가 힘이 들어 그만 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닷새 정도 기도하다가 기다리던 성령세례가 임하지 않아 그 자리를 실망 가운데 떠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고 더 참고 기다리지 못해 기도하기를 그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우리가 목표를 놓고 기도하면 응답받을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야이로 회당장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많이 간구하는” 지속적이며 끈질긴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교회 안에는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주의 백성들이 많을 때 교회 안에 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교회가 부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 오시는 날까지 모이기에 힘쓰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한 마음을 가지도록 힘쓰십시다.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기도하도록 힘쓰십시다.[최완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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