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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에 취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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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에 취한 사람들 행 2:5-13
오순절 날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다 방언 곧 외국어를 말하는 크고 기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 자체만 해도 크고 기이한 일인데, 이 사건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로 기가 막히고 경악할 일이었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5)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세계 각국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세계 각국”이란 좀 과장된 말입니다. 그들 중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1세기 경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이 히브리어보다는 그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고 헬라 문화에 젖어있는 유대인들 곧 헬라 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고장의 말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현대 선교학자들은 전도 대상자들을 크게 E-1, E-2, E-3 이렇게 셋으로 구분합니다. E는 영어의 전도를 뜻하는 Evangelism을 말하고 숫자 1, 2, 3은 전도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장벽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E-1은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외국어를 배울 필요도 없고, 생소한 음식을 먹어야 하며 새로운 행동이나 예절들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E-2나 E-3 공히 교차 문화적 전도입니다. E-2는 E-1에 비해 약간의 언어적,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이민 1세들은 같은 이민 1세들에게 전도할 때 E-1이 되지만, 2세들에게 전도할 때 그것은 E-2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필리핀 사람들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그것은 언어나 문화가 완전히 다른 대상이기 때문에 E-3가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세계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선교학적으로 보면 E-2요, 사도행전 2장은 그들에게 최초로 E-2 전도가 이뤄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본문 9절부터 11절까지에 15개 나라의 말들이 기록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 전체의 말들을 다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이상의 말들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그곳에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 있는 점은 그들 중에 이방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다 이 소식을 듣고 그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놀라운 일을 보고 들으면서 보였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그 두 가지 반응은 크게 엇갈리는 각기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똑같은 두 개의 상반된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수용 (Receptivity)
첫째로, 복음을 잘 수용하는 반응입니다. 대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이는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거부합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립니다. 물도 잘 공급하고 거름도 줍니다. 결국 추수 때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뿌려진 대로 곡식 낱알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거두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때로는 새들이 와서 쪼아 먹기도 하고, 어떤 것은 물과 거름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 죽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잡초나 가라지 때문에 제대로 결실치 못해 모양은 그럴듯한데 알곡이 되지 못한 쭉정이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 많은 유대인들 중 복음을 잘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120명의 제자들이 각기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고장의 말들을 하는 기적을 보고 들을 때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이를 하나님의 일로 인정했습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은 신기하고 놀라와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도 그토록 교육이 없는 갈릴리 사람들이 애굽 말과 아랍 말과 페르시아 말을 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잘 알았습니다. 이는 오직 초자연적인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요, 따라서 이 기적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그들 모두에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요?”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특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들이 전도하는 대상 중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잘 수용하는지 분별하도록 해줍니다.
1. 기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120명의 제자들이 각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잘 수용하는 사람들은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역사를 있는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 주위에 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알고 그 체험에 대해 더 알고자 합니다.
2. 복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복음을 잘 수용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접할 때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본문에서 그들은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요?” 하고 긍정적인 호기심으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에 민감하고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지금처럼 전쟁의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복음에 좀 더 수용적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혹은 중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은 보다 복음에 수용적이 됩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건강에 적신호가 왔을 때 사람들은 복음에 훨씬 더 수용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 복음을 전하면 훨씬 더 효과적인 전도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거부 (Resistance)
둘째로, 복음을 거부하는 반응입니다. 복음을 접할 때 잘 수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기적의 역사를 분명히 눈앞에서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차 없이 거부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비롯하여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고 각국의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13)고 빈정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역사를 술 취한 사람들이 지껄이는 말 곧 하나의 코미디 (comedy)로 격하시켰습니다. 오늘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의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마치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복음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치유의 기적도 인정하지 않고 방언도 부정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몇 가지 특장들이 있습니다.
1. 복음 자체와 성령의 역사를 조롱합니다. 복음을 듣고 자신이 믿기 싫으면 그대로 안 믿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진리가 아니라고, 진리는 다른 데 있다고 하면서 진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무서운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고 침 뱉으며 조롱했던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하나의 강도로 격하시켜 조롱했습니다.
2.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육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바꾸어 해석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각국 외국어로 말하고 있는 기적을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 사람들, 해도 너무 한데... 지금 이 한 낮에 무슨 술을 먹어서 저렇게 취했지?” 하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성령에 취한 사람들을 보고 대낮에 술에 취한 사람들로 몰아갔습니다. 지금도 성령 충만한 예배, 성령 충만한 찬양, 성령 충만한 기도 모임을 보고 “저 사람들, 광신자인가 보다. 저질이다. 어떻게 저런 예배, 찬양, 기도도 다 있지?” 하며 비웃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에 항상 거부적인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 하고 구원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공들이고 시간을 많이 허비하는 것보다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들에게로 가서 전도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오실 날, 마지막 추수 때가 아주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더, 한 영혼이라도 더 전도하여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최완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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