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류의 사람
본문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은 “이 세상에는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요, 둘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며, 셋째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은 늘 남에게 피해만 주며 사는 사람이어서 거미와 같은 사람이요, 수학 공식으로 따지면 마이너스(minus) 인생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 곧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남에게 피해도 유익도 안 주는 자기 위주의 사람이어서 개미와 같은 사람이요, 이콜(equal)인생입니다. 마지막 부류의 사람, 곧 꼭 있어야 할 사람은 남을 도우며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어서 벌과 같은 사람이요, 플러스(plus) 인생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역시 세 부류의 신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철저하게 남의 도움만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2. 그저 뜻 없이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사람들이요, 남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3. 요한과 베드로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떤 부류의 신자인가 자가 진단을 하고 고쳐야 할 사람들이 고침을 받은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앉은뱅이 신자
첫째로, 앉은뱅이 신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라면서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 비관하고 열등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고, 호구 대책으로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동정으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나중에는 모든 사람에게 두통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영적으로 이 사람처럼 앉은뱅이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오랫동안 다녔으면서도 남을 도와주는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피해만 주는 신자들입니다.
이 사람은 또한 나면서부터 계속 수십 년 동안 성전 가까이 그것도 입구에서 살았으면서도 결코 한 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교회당 뜰은 늘 밟고 다니면서도, 예배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도, 교회 행사들은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 보지 못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교회 출석은 십 년 이십 년 되었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만남의 체험, 성령의 능력을 받는 체험과는 무관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또한 이 사람은 세상적인 목적으로 성전에 나간 사람입니다. 그가 성전에 나간 유일한 목적은 구걸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과 구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세상을, 내세보다 현세를, 구원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그런 것들에 더 관심이 많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가 한 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앉은뱅이 신자가 아닌가?’ 하고 자가 진단을 해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형제자매들에게 피해만 주고 교회에 문제만 일으키는 신자는 아닌지 재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으면서도 은혜를 받지 못해 교회당만 왔다 갔다 하는 ‘처치 고어’(church goer)는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오로지 나의 세상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뜻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신자
둘째로, 그냥 뜻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안으로 들어가려면 꼭 이 미문을 통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 앉은뱅이의 문제를 보고도 자기들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만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관습적인 교인들입니다. 미국에 ‘썬데이 크리스챤’ (Sunday Christia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일 예배만 참석하고 그것만으로 만족해 전혀 신앙이 자라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목사님께 미안해서 주일은 꼭 나오는 신자, 부모님의 강권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주일만은 지키는 신자, 주일을 안 지키면 혹시 하나님께 매를 맞을까봐 두려워 마지못해 나오는 신자들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된 것이 마치 인텔리나 된 것처럼 생각되어 기독교 신앙을 악세사리처럼 여기고 주일만 간신히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미국에 ‘이티씨 크리스챤’ (E. T. C. 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부활절(Easter), 감사절(Thanksgiving), 성탄절(Christmas) 이렇게 중요한 세 절기만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닌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형식상의 신자, 명목상의 신자일 뿐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자기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여 남의 문제에 눈을 돌릴 수 없는 신자들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참다운 성도의 삶을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는 성도의 삶은 부요한 삶, 차고 넘치는 삶이어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메말라 남을 도울 수도 없고 전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자들이 오히려 앉은뱅이 신자보다 더 은혜 받기가 힘들다는 점입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6절을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입에서 너를 토해 내리라”고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경험적으로 보면 이렇게 관습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이 은혜 받는 일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에 잘 적응이 되어 더 이상 도전도 없고 바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셋째로, 베드로와 요한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처럼 성전으로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들과 크게 다른 점은 그들이 앉은뱅이를 보았을 때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1. 그들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오후 세시 기도의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남을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가정을 변화시키고, 직장을 변화시키며, 교회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말틴 루터 (Martin Luther)는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한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은 마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배후에는 강력한 기도의 힘이 있었습니다. 19세기의 대 각성운동 뒤에는 요한 웨슬리 (John Wesley)의 성신 클럽 (Holy club)의 기도 운동이 있었습니다. 성령강림과 초대교회의 탄생의 배후에도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10일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도에 힘썼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평소에 정기적인 기도로 능력을 저축해 놓았기 때문에 그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평소에 정기적인 기도로 능력을 저축하여 우리의 이웃 중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년 반이라는 기간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다 목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오순절 날 성령 세례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예수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남을 진정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에게 돈을 주면 그를 도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이요 일시적으로만 돕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돈을 주는 대신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6)고 했습니다. 그들은 돈은 없었지만 자기들에게 있는 것, 곧 예수와 성령의 능력을 그 앉은뱅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앉은뱅이에게 육신적인 문제만 해결해 준 것이 아니라, 가장 궁극적인 문제인 영혼 구원까지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누구인가?” 하고 솔직히 질문하고 내가 어떤 부류의 신자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앉은뱅이 같은 신자라면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앉은뱅이 상태에서 일어나 걸으며 기뻐 뛰는 역사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성전 뜰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신자라면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노를 저어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나를 만나는 사람들을 도와주되 영육 간에 도와줄 수 있는 창조적인 사람,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