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 헌신이냐, 반쪽 헌신이냐?
본문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 구원받을 사람과 심판받을 사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신자의 경우에도 두 부류가 있음을 말합니다. 한 부류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같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부류는 에서, 사울, 유다 같이 겉으로는 주께 헌신하는 것 같지만 절반만 하고 다른 절반은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전자는 제자요, 성도로서의 삶을 살지만, 후자는 신자도 불신자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아도 이 두 부류의 구분이 확실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은 자신의 재물을 아까운 줄 모르고 주님께 다 바쳐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핍절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의 재물이 아까워 겉으로 헌신하는 시늉만 내다가 하나님의 성령을 속여 즉결 심판을 받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반쪽만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이 두 부류의 신자들을 잘 비교하여 보고 과연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반쪽만 헌신하고 있는 신자라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나바의 전적 헌신
첫째로, 바나바의 전적 헌신입니다. 바나바는 은혜 받은 성도의 모형입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밭을 더 이상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실 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기쁘게 바쳤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자’ 혹은 ‘권위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본문에서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가 자신의 재물과 물질을 주님께 드려 헌신하는 이 아름다운 기사는 시작에 불과하고, 후에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했습니다. 그는 오늘 어떤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행위, 선행, 헌신을 조금도 나팔을 불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자신이 마땅하게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후로는 자신의 몸과 인생 전체를 주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헌신은 자신이 가진 재물로 소나 양이나 염소 혹은 비둘기 등을 드리면 되었지만, 신약시대의 헌신은 재물은 물론 우리의 몸과 삶 전체까지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 헌신’ (total commitment)입니다. 그러면 ‘전적 헌신’의 사람 바나바의 삶은 어떤 것인가 살펴봅시다.
1.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를 의심하여 그와 사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솔선수범하여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했습니다(9:27). 이미 주안에 들어온 형제를 과거의 행적을 묻지 않고 형제로 받아주는 마음 곧 온유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2.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아 안디옥 교회로 갔습니다(11:22). 그의 사역을 통해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처럼 그는 성도들을 잘 권면했고(23), 좋은 인격을 가져 “착한 사람”이라 불렸고(24),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24).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사역이 이처럼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한 칭찬을 홀로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기보다 더 적합하고 훌륭한 사람, 바울을 안디옥 교회로 손수 소개해 모셨습니다(25, 26). 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기독교 신앙에 자신보다 늦게 입교하고 훨씬 늦게 예수를 믿었으며, 복음 사역에도 뒤늦게 뛰어든 후배인 바울을 높이고 자신은 제 2인자의 자리로 내려앉은 바나바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이 되는 행동입니다. 오늘날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며 다투고 치고 박고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르고 대조적인가 한 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헌신하면서도 분쟁과 다툼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비해 바나바는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답게 순수한 동기로 조금도 육적인 동기로 경쟁하지 않고 바울을 잘 도와 협력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와 바울의 사역을 통해 안디옥에서 양육된 그들의 제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 (Christian)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또한 이방에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선교하는 교회,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동기의 헌신, 철저한 헌신은 반드시 이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 바나바처럼 ‘전적 헌신’의 성도들이 되어 우리들을 통해 많은 영적인 열매들이 맺히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반쪽 헌신
둘째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반쪽 헌신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반쪽만 헌신하는 신자의 모형입니다. 나름대로 좋은 일을 하고도 끔찍한 비극을 맞은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5장 1절에는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바나바와 다른 제자들처럼 주의 일을 하기 위해, 주님께 헌신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주님께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려할만한 일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곧 2절에서 시작됩니다.
그 값의 얼마를 따로 떼어놓았는데 그의 아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떼어놓고 난 나머지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쉬운 말로 반은 감춰두고 반은 사도들 발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들 생각에는 두 부부만 아는 일이니 절반만 주님께 헌신하고 나머지는 다른 목적으로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일은 둘만 알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주 안심하고 사도들 앞에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을 보면 성령의 은사들 목록이 나옵니다. 그중에 “말씀의 지식의 은사”가 있습니다. 바로 이 초자연적인 역사가 “말씀의 지식의 은사”애 해당됩니다. 배우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알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를 알고 아나니아를 꾸중합니다. 그의 책망 가운데 “사단에게 홀려서”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것” (24, 25)이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반쪽 헌신은 자칫 잘못하면 사단에게 속아 성령과 하나님을 속이는 큰 죄로 발전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즉석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아까워서 땅을 팔지 않았으면 아무런 죄도 되지 않을 것을, 판만큼만 가져가서 “내가 가진 것 중에 이것만 가져 왔다”고 했으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고 다 헌신한 것처럼 성령과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그런 큰 비극을 만났던 것입니다. 오늘날 주를 위해 헌신한다고 하면서도 이같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즉각적으로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해서 그런 죄가 아주 심각한 것임에 불구하고 쉽게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런 죄를 범했으며 또 그런 심판을 받아야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세상 욕심 때문입니다. 이 부부는 다른 초대교회 성들처럼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며 성령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는 기쁨을 체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은혜 받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다른 성도들처럼 자신의 재물을 바쳐 구제와 전도 사업에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요, 특권인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일을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 그들은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문맥상 초대교회 바나바를 비롯해 성도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주님께 바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자기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은혜의 분위기 속에서는 쉽게 작정을 할 수 있었는데 막상 집에 돌아와 보니 제 정신이 들어 후회하고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장시간 상의한 결과 절반만 바치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초대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처럼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바나바처럼 나중 일은 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이 없어서 땅을 판 값 중에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눈에 당장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천성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듯해 보이는 돈을 더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땅 판 돈 일부를 감추어두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히 베드로가 그들을 책망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사단의 생각 곧 욕심과 탐욕이 가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3, 4). 천국도 가고 싶고 세상 것들도 누리고 싶은데 어느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어서 엉거주춤 반반씩 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대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었습니다(약 1:6-8).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순수하지 않은 동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너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땅을 팔았지만 막상 다 바치자니까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음모를 꾸몄습니다. 2절을 보면 “그의 아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보다도 사람들 앞에 더 인정을 받으려는 동기, 곧 체면의 동기로 꾸민 헌신을 하려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인정받겠다는 순수하고 신앙적인 동기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동기 위에서 일을 꾸몄습니다. 사람들의 눈만 잠간 속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깊은 곳까지 헤아리는 분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무슨 일을 할 때, 특히 주의 일을 할 때 그 동기가 다 순수해야 합니다. 은혜로 하고 기쁨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속이는 일은 가장 큰 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마12:31, 32).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0장 26절에 약간의 힌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뒤에도 짐짓 죄를 짓고 있으면 속죄의 제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즉 구원도 받고 내세의 기쁨도 다 체험한 신자가 짐짓 죄를 범하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짐짓”이란 말은 ‘의도적으로’ ‘기쁨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죄를 마지못해,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어서 짓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즉석에서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한 때 은혜도 받고 주님을 위해 헌신도 한다고 하던 사람들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경종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절대 헌신을 원하시지, 반쪽 헌신이나 더군다나 꾸민 헌신은 원치 않으신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최완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