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쇠망을 피하는 길 (왕상 16:29-34)
본문
우리는 앞서서 남왕국 유다의 세 번째 왕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사십일 년 동안 유다 왕국을 다스린 아사의 이야기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남북왕국의 왕들 가운데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몇 안 되는 왕 중의 하나인 아사 왕의 시대는 한마디로 태평성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아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백성에게 명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그의 마음을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하려 한 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시고 그에게 온 나라가 평안을 누리는 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남왕국 유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과 정의를 행하는 왕과 함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사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사가 남왕국 유다의 왕으로 있는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그 첫 왕 여로보암이 죽고 이어서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다섯 왕이 지나갔으며 일곱 번째 왕 아합이 등장했습니다. 즉 정정이 심히 불안했다는 말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왕이 되었지만 이 년 동안밖에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를 모반한 바아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왕상15:25-27). 바아사는 나답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될 때에 나답의 아버지 여로보암 집안의 모든 사람을 죽였습니다(왕상15:29).
그러나 바아사가 나답에게 행한 일은 그대로 그의 아들과 그의 친족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바아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엘라 또한 이 년 동안밖에 살지 못했습니다(왕상16:8). 그의 신하로서 병거 절반을 통솔하던 지휘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그를 쳐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왕상16:9-10).
시므리 또한 왕위에 오를 때에 엘라의 아버지 바아사의 온 집안 남자를 죽였으며 그의 친족이든지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습니다(왕상16:11).
그러나 그렇게 왕이 된 시므리는 단지 칠 일 동안 왕위에 있었을 뿐입니다(왕상16:15).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을 대적하여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왕상16:15-16). 오므리는 군사를 거느리고 시므리가 왕위에 오른 성읍으로 올라와 포위했습니다(왕상16:17).
시므리는 그의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왕상16:18). 그러나 오므리가 곧바로 북왕국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만 오므리를 따르고 다른 절반은 디브니라 하는 자를 따르며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해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이 둘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왕상16:21).
오므리가 북왕국 전체의 왕이 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 그를 따르던 백성이 디브니를 따르던 백성과 싸워 이기고 나서였습니다(왕상16:22). 오므리는 세멜이라 하는 사람에게서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했으며 그 성읍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명명했습니다(왕상16:24).
오므리는 자기가 건설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삼은 사마리아에서 왕권을 누리다가 죽고 거기에 장사되었으며 그의 아들 아합이 그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왕상16:27-28). 이것이 오늘 본문 직전까지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의 대략적 역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역대 이스라엘의 왕 중 가장 악명이 높은 아합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왕국 유다에서는 아사 한 사람이 왕으로 있는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섯 차례나 왕이 바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반과 살육이 있었고, 두 차례나 왕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참극이 일어났으며, 군대를 동원한 왕권탈취극이 벌어졌고 동족간의 분열과 전쟁을 겪는 등 격동하며 불안과 피로 얼룩진 역사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던 것과 너무나 대조가 되는 역사입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입니까? 열왕기는 곳곳에서 그 이유를 간단하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원죄는 그 첫 왕 여로보암에게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 벧엘과 최북단 도시 단에 하나씩 두고는 백성에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인도하여낸 신이라고 거짓으로 선전하며 그 백성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참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막는 죄를 범했습니다(왕상12:28-30).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으며 자기 마음대로 정한 날을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절기로 삼고 그가 만든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왕상12:31-33).
이 여로보암의 죄는 그 이후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죄의 전거(典據)로 언급되는 것을 봅니다. 왕상15:25-30을 예를 들어 봅니다: “유다의 아사 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유의하게 됩니다. 하나는 나답의 죄가 그 아버지 여로보암의 죄를 답습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답뿐 아니라 여로보암의 온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참극이 일어난 것은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바아사에 대한 기록도 봅니다: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왕상15:33-34),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16:2-4).
시므리에 관한 기록은 또 어떻습니까? “시므리가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었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왕상16:18-19).
오므리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16:25-26).
오늘 본문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아합에 관한 언급은 앞의 모든 언급과 같은 방향에서 그 최악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30-33절을 다시 봅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아합 왕 시대에 절정에 달한 우상숭배와 행악은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을 쇠망의 길로 줄달음치게 하고 말았습니다. 돌이킴이 없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수도 사마리아가 이방나라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고 백성이 앗수르로 사로잡혀 끌려가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결국 모든 왕들이 돌이키지 않고 그 첫 왕 여로보암의 죄를 이어받은 사실 때문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의 죄는 하나님 외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원하는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더 큰 것이나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 다른 신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종교의 관행과 악습을 따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따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좋은 대로 행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쇠망의 길로 이끌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한 민족에게서나 한 개인에게 있어서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특별한 은혜를 입은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 않고 그의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기를 게을리 하면 그 종말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힘쓰지 않고 그의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의 삶은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처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배신과 아귀다툼과 혼란과 분열과 불안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민족이나 쇠망의 길을 피하고 평안과 행복과 번영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 온갖 우상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과 정의를 행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맹세하게 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수6:26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고, 그 명령을 어기면 자식들을 잃으리라는 하나님의 엄한 경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 왕 때 히엘이라고 하는 한 벧엘 사람이 여리고를 다시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 때의 맹세대로 히엘이란 자가 여리고 성의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지 말라 하셨겠습니까?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성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를 건설하시고자 이방족속의 도성을 허무신 것입니다. 다시는 그 땅이 하나님을 알지도 섬기지도 않는 이방족속의 땅이 되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여리고성을 건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거부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는 도발이었습니다. 스스로 쇠망하는 길을 가기로 작정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크게 쓰시고자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복음이 들어온 지 120여년 되는 사이에 현대사에 그 어느 민족도 누려보지 못한 큰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먼저 천황이라는 우상을 모시고 살던 일본제국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현대판 태양신을 광적으로 섬기는 북한공산주의 세력의 무력적화통일의 위협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세계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경제발전과 함께 교회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발적 부흥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국가로서의 점진적인 성숙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무너뜨리신 여리고성을 이 땅에 다시 건축하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 세력들이 지금 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어서 남북한의 기차가 잠시 한 차례 서로 아래위로 왕래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소위 코드인사들을 태운 그 기차에 승차하는 영광(?)을 가졌던 인사 중에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이념적으로 오도하며 국가정체성을 뒤흔든 대표적인 친북좌익논객이 있습니다. 그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극찬하고 북한은 미화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나 우리 국민이 피땀 흘려 이룩한 그간의 성취를 부정해온 사람입니다.
기차에서 그를 본 한 북한 측 대표가 그에게 다가가서 칭송을 하자 그가 자랑스럽게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가 “20~30년 동안 길러낸 후배와 제자들이 남측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론과 주장은 다 틀려도 그 말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합 왕 때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려한 자가 그 성의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을 잃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세운 나라 허물고 하나님께서 무너뜨린 세력을 다시 일으키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 맏아들들과 막내아들들뿐 아니라 온 민족을 공멸시키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이 나라 이 민족은 방향전환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국가를 이루기 위해 돌아서야 합니다. 이제 감상적인 이념주장이나 위험천만한 체제실험은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쇠망의 길을 피하고 번영의 길을 가는 슬기로운 선택입니다. 민족의 쇠망과 공멸의 길을 계속 갈 것이냐 민족번영의 길을 향해 돌아설 것이냐 하는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민족의 위대한 승리를 선택하는 지혜로운 국민이 됩시다.(이수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