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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우리 집에 계시니(2) (막 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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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우리 집에 계시니(2) (막 1:29-31)

어느 날 아브라함이 집 앞에 앉아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집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황급히 그를 자기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자신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집에 들어오시려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셨던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집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더욱 노골적으로 백성들의 집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시고 들어 가셨습니다.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특히 세리나 창기의 집에까지 들어가셔서 교제를 하고 음식을 나누시니
바리새인들이 비판하기를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지난 주 부터는 또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베드로의 처갓집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의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셨나요?
첫째로는 백성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문제는 아들이 없는 것인데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와 그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서 들어 가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고 형편없는 마리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 가겼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집에 들어오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들 합니다.
(무엇이 좋은가요)
실제로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은 먼저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을 받고 체험한 사람이 사랑을 줄줄 압니다.
넘치는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받아 본적이 있나요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이런 사랑을 받게 되며 이런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지난 주에 예수님이 계시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씀을 들였습니다.
문제가 해결 되었지요
꼭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보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한다는 것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일회성 일수 있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이런 일회성 문제해결 위한 약속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무당에게 간다면 무당하고 계속 관계를 가지려고 가는 건 아녜요.
그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푸닥거리하든지, 부적을 지니든지 무슨 방책을 세우든지
그 문제만 해결되면 돌아옵니다.
해결도 잘 안되지만 어째든 되든 안 되든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님 앞에 오라고 초청하실 때
혹은 우리에게 들어오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에게 닥친 문제 한두 개만을 해결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아니,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우리와 맺기를 원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가 아니에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내 품에서 영원히 계속해서 쉬게 하리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문제의 응답을 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혹은 복음을 수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문제도 해결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고,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한 구세주요,
그 분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 분인가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과 나 사이에 사랑이 싹터서 거룩한 연애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보다 더 좋은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장면을 보면,
바로 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31절을 보겠어요.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그런데 이 구절만 딱 읽으면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고치셨을까?
우리가 이런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러니까
아파서 누워 있는 이 시몬의 장모를 일어날찌어다!
이렇게 잡아 일으키셨을까요? 그렇게 생각되세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8장 15절을 찾아보세요.
마태복음 8장 15절을 보시면, 같은 사건의 이야기를 마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그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똑같은 사건을 마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잡아 일으키시니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뭐라 그랬습니까?
그의 손을 만지시더라. 만지시더라.
여기서 만진다는 말은 희랍어로는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만짐”을 표현해 주고 있는 단어에요.
그녀의 손을 만지셨다. Touch했다. 혹은 사랑스럽게 스킨쉽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열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손을 쓰다듬으시면서
“많이 아파 보이시네요?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드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고쳐드릴께요. 저를 믿으세요. 제 손을 잡고 한 번 일어나 보시지요?
그리고 열병은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저는 복음서를 보면서 주님이 병자들을 고칠 때,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고치십니다.
한 가지 방법이 아녜요.
어떤 때는 만지지도 않고 뭐예요? 말씀만 하세요.
고침 받을지어다. 가서 제사장에게 보여라
또 어떤 때는 좀 지저분한 방법을 쓰시기도 하십니다.
침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기도 하십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에요.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이 여인의 경우, 시몬의 장모의 경우,
말씀으로만 고칠 수도 있는 이 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혹은 명령할 수도 있어요.
특별히 귀신과 대결할 때 , 그럴 때는 예수께서 단호한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물러갈지어다 뭐 이런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거 하나만 보고 병 고치는 기도하는 분들이
꼭 한 가지 방법만 쓰시는 분들이 있어요.
어떤 분은 항상 두들겨 패면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어요.
나갈지어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네.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오늘은 조용히 어루만지셨습니다.
뭘 느꼈을까요? 시몬의 장모가.
아! 이분이 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사랑하시는구나.
참으로 가슴 설레는 체험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한다는 것, 그분이 나를 이렇게 다정하게 아니
이렇게 절절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 때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생활 하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계기가 병 때문에,
혹은 문제를 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는 분들 많아요.
병이 낫기 위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 영접하고 어떤 분들은 기도하자마자 병 나음을 얻어요.
실제로.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 병 때문에 교회 나왔고, 병 때문에 기도 시작했고,
어떤 문제 때문에 예수 이름을 부르는데도 병이 났질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아, 그러면 믿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데도 계속 나와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더욱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면, 그는 기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예수님의 더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자기 병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깨닫고,
예수님이 죄에서부터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 영접하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체험해요.
결국 그 분은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이기더라구요, 승리하더라구요.
이것이 더 놀라운 축복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손님 대접이나 받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내 가족 한 사람 한사람을 사랑으로 만져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밖에서 힘들고 어려워 어깨가 축 쳐진 내 남편의 어깨를 사랑으로 토닥거려 줄 것입니다.
병들어 누워있는 부모님의 손을 잡아 주실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일로 힘들어 하는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실 것입니다.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허전해 하는 바로 당신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실 것입니다.

이 사랑을 주실려고 우리 집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셨고 우리 집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이 세상에서 받았던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주님은 여전히 사랑을 하시는 사랑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여전히 한없는 은혜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분을 미워하고 그가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하여도
여전히 나를 긍휼하게 여기며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아니 어떤 때는 배신을 하고 저주를 하여도 한 결 같이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밥 한끼 사주고, 옷 한 벌 사주고, 자동차 한 대 사주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죽을 나를 사망에서 건지셔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여 주신 그런 사랑입니다.

바울은 한 평생을 지배하던 놀라운 사랑으로 감격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 이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 집에 들어오시면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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