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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먼저 살피는 신앙인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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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먼저 살피는 신앙인 (요 8:1-11)


동물 중에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동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 지혜를 선한 일에 사용해야하는데 그 반대로 악한 일을 하는데 훨씬 더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밤을 새우는 일은 드물지만 도둑질을 위해서 밤을 새우는 사람은 많다고 합니다. 특히 도박하는 사람들을 보면 며칠씩 계속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죄 짓는 데는 초인적인 지혜를 발휘하는 이상한 동물이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나를 돌아보는 지혜보다 남을 비판하는 지혜가 더 발달되었다는 사실도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어찌 그리 상상력도 좋고 말도 유창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자기를 돌아보는 지혜에는 무딥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랍비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나이가 자기 집안의 돌을 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는“왜 그런 짓을 하시오?”하고 물었으나 사나이는 웃기만 합니다. 그렇게 2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이 사나이는 자기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가려고 첫발을 떼는 순간 전에 자기가 버렸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앞길을 생각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사람의 지혜란 나로 인해 남이 기뻐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부부지간에도 그렇습니다. 서로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를 생각하는 게 부부입니다. 그래서 부부지간에도 말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에 행복하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하는 것이 부부관계이거든요.

아내들의 경우 남편으로부터 가장 행복을 느끼는 말이 무엇인가를 조사해 보았더니 1위가“여보 사랑해”라는 말이었습니다. 2위는“여보 고마워” 3위가“여보 고생했지” 4위는“당신이 제일이야” 5위로“당신 오늘 예쁜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진한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의 경우는 아내가“여보, 사랑해요”할 때 역시 가장 행복을 느끼고 두 번째는“당신만 믿어요.”하는 말이고 세 번째로는“결혼 참 잘했어요.”라는 말이고 4위가“당신 정말 남자다워요”그리고 다섯 번째가“얘가 당신 닮아 똑똑하고 대견해요”라는 말을 했을 때 행복을 만끽한다는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시민적인 표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녀가 함께 느끼는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는 모두가 사랑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역시 인간은 사랑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 없어서 불평합니다. 사랑이 없어서 부정적입니다. 사랑이 없어서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거나 상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유형도 여러 가지입니다. 말을 하면 무엇이든지 옳다하며 흡수하려고 하는 스펀지형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실컷 이야기를 해도 이 귀로 듣고 저쪽 귀로 흘려버리며 무관심한 터널형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중히 들으면서 역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체로 쳐서 걸러내듯 유익한 것만을 취하는 선택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유익한 쪽을 택해서 듣는 자세입니다. 이런 유형도 있을 수 있겠고 저런 유형의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것을 상관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대화를 하고 상담을 하고나서 지혜를 얻었으면 그 지혜대로 선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선한데 보다 더 나쁜 데에 더 지혜를 쏟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어떤 분에게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시다.“십일조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지름길이자 복의 통로입니다. 십일조를 진실 되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말씀입니다”하고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혜가 되어서‘아하 내가 그동안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지 못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했구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겠다.’하고 다짐하면 그야말로 지혜가 선한 일에 사용 된 것이지만 ‘성경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가 먹고 살아야지 무슨 소리야’하면서 ‘무슨 교회가 헌금을 강조 하는구나 헌금은 자기신앙대로 하는 것이지 뭐 하라 마라야! 헌금 안하고 조용히 왔다 갔다 하는 교회나 찾아보는 게 상책이겠다.’이러면 문제입니다. 사람이 이상하게도 이런 악한데 지혜가 더 잘 돌아간단 말입니다. 이게 문제죠.

자, 우리도 이렇게 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마는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즉 지혜를 선한데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나쁜데 지혜를 짜내고 있습니다. 무엇에다 지혜를 쓰고 있습니까?‘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지만 악한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의 나쁜 지혜에 사람들이 동조해서 방법을 찾던 중에 간음하다 붙들린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팽개치고는“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거니와 당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며 상당히 간단한 문제인 것 같은데 깊이 들어 가보면 골치 아픈 난제입니다. 사실 질문자체에 모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해도 걸고 저렇게 대답해도 걸고넘어질 악한 의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도 비판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단 말입니다. 여러분 비판이라는 자체가 사실은 언제나 그 의도가 선하지 않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 가끔씩 비판을 요구 받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누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든지“무엇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보라”고 할 때는 그 의도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미 그 의도가 선한 것이 못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걸 알면 우리가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데 동조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이 여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온 것은 이 여자가 저지른 일이 세상에 처음 일어난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지은 죄 때문에 후회하며 울고 있는 여인이 측은해서 데리고 온 것입니까? 그들의 목적은 다만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계획이었고 그 못된 자기들의 지혜를 이루는데 이 여인의 죄를 미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순을 보십시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모세의 법이“돌로 치라”했으면 돌로 치면 되는 일을 왜 굳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옵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하셨으면 죄인의 친구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 사랑과 자비를 부르짖는 사람이 그토록 잔인 하냐 할 것이고“돌로 치지 말고 돌려보내라”고 하시면 하나님의 법을 반대한 원수로 고소할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총독이나 할 수 있는 사형집행권을 남용하게 되므로 로마법위반으로 고소당할 것이 뻔합니다. 그것을 모르시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듣고만 계시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최초의 행동이 땅에다가 무엇인가 글씨를 썼습니다. 이것은 민망해서혼자 긁적이는 단순한 낙서가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해서 썼다는 의미입니다. 봐야 될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을 썼느냐하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전통적인 해석으로 보자면 죄의 제목들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증거 등 죄목을 묵묵히 적어 내려갔다고 전승해 오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글을 쓰신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죄 없는 자”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문자대로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확한 의미는“죄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행동한 죄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의역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죄의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만 이 여자는 죄를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만이 너희와 다를 뿐이지 너희들의 마음속에는 간음하는 마음이 없었느냐 심지어는 살인하는 마음이 없었느냐 그러므로 죄에 대한 욕망까지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돌로 치라”는 뜨끔한 질책이 섞인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비록 이 여자와 같이 간음을 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했고, 남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고, 마음속으로 살인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이 여인과 똑같은 죄는 아닐지라도 다른 의미에서의 죄인이므로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비난할 때 그 사람과 똑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으로 아무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정죄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죄만 생각하고 그 죄가 나에게 없기 때문에 교만하고 남을 심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앞에 깊이 생각을 해보면 똑 같은 죄는 아닐지라도 어떤 의미에서나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때 그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들이나 누구도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도적질은 했지만 남이 저지른 도적질과 똑 같은 도적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 아닙니까? 나는 절대로 하지 않는 짓을 남이 했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아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죄의 욕망이 내 속에 있는 사람인데 남을 비판만 하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누가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들통이 나느냐, 나지 않느냐?”만 중요할 정도로 죄 속에 빠져 삽니다. 그래서 시쳇말로 재수 없는 사람만 감옥에 가고 운이 좋은 사람은 버젓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사람들도 예수님의“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있고 그 돌을 내려놓기 전까지 짧은 시간에 얼마나 복잡한 자기들의 죄 된 모습이 지나갔겠습니까? 죄 많은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가버렸습니다. 사실 이것도 어리석은 겁니다. 양심의 가책이 밀려와서 죄 된 자기의 모습이 발견되었으면 예수님 앞에 엎드릴 걸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훨씬 더 아름다운 끝맺음을 했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만 악한 사람이 끝까지 선한 마음을 가지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하는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자기를 먼저 살피라는 교훈입니다. 언제나 남을 향해 심판과 비판의 돌을 들고 던지기 전에 나 자신의 죄를 먼저 떠올려 보라는 것입니다. 대개 남의 허물을 많이 하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자기반성에 게으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자기반성을 많이 하는 사람이고 자기반성을 하고 나면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왜요? 내가 제일 큰 죄인이거든요.

성 프랜시스의 제자 한 사람이 꿈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는 높은 보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의자냐고 물어 보았더니 성 프랜시스의 의자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 소리를 듣고 꿈속에서도 은근히 질투가 났습니다. 꿈을 깬 후에 이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랬더니“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제자가 항의를 했습니다.“그런 위선적인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성자인 선생님이 악하다고 하면 살인자나 다른 사람들은 어찌합니까?”이때 성 프랜시스는 웃으면서 대답합니다.“그건 자네가 잘 몰라서 하는 얘길세. 만약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이 받았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걸세”하더랍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 같은 은혜를 받았다면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여기에 겸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에 비해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요, 제일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내가 제일이요, 내가 아니면 그 무엇도 안 된다는 착각 때문에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누가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의 손에 아직도 들고 있는 돌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큰 돌입니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할 것이며, 언제나 자기를 먼저 살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의 교제만 있을 뿐입니다. 한마음, 한 뜻으로 우리교회에 주신 큰일들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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