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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 (눅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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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I.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은 기도에 관한 기사와 가르침을 많이 싣고 있습니다. 신약의 네 복음서에는 기도의 사건을 담고 있는 이야기가 51회나 등장하는데 그중 22회가 이 누가복음에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가복음을 기도의 복음서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본문이 실린 11장은 18장과 함께 기도에 관한 황금과 같은 교훈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나타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이 장면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 기도하시는 장면을 계기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기도하시는 예수님께로 맞춰져 있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 말씀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기도의 모본을 보이신 그분의 뒤를 따라 보다 깊은 기도에의 도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II. 몸소 기도하심

첫째, 주님은 ‘몸소’ 기도하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자기 제자들에게 나름대로의 특별한 기도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마침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뵈오니 제자들도 평소에 자신들이 품었던 기도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기도를 중요시하면서도 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도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대해 희랍어 성경은 분사를 써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기도하시고(proseuco,menon)···” 이는 그분의 기도가 진행 중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용건은 있었지만 그 기도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고 거룩하게 느껴졌기에,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외심을 자아냈기에 주님을 부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자신을 모두 쏟아 붓는 진지한 기도를 몸소 드렸던 것입니다.

기도는 겨울철 땅을 파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메마른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추운 겨울 언 땅을 파는 것처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인부들은 땅을 파기 몇 시간 전부터 모닥불을 피워 땅을 녹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써 얻게 된 따뜻한 은혜의 온기가 우리의 마음을 녹인 후, 우리는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도 기도의 일부입니다. 기도에 관해, 기도를 더 잘하기 위해 좋은 책을 읽는 것도 기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곧 기도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몸소 실천하는 그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부여 받은 분이셨고, 더욱이 죄가 없으신 순결한 분으로서 죄를 지으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데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한량없이 많으시고 죄 없으신 순결하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기도생활에 마음을 기울이시는 것은 왜일까요?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이런 기도생활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셨듯이, 이처럼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기도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새벽 벌판 한적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아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신 전능한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친근하게 살기를 원하고 어린아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붙든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아기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당신의 낮아지신 생애를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이신 아버지께 간절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며 일평생을 사셨습니다. 주님의 고난 받으시는 생애는 기도 속에서 더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수많은 능력과 그 순결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일평생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앞에 눈물로 살았다면, 죄 많고 불완전한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겠습니까?

둘째로, 주님의 간절한 기도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모든 힘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얘들아, 내가 비록 성자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 능력이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로 주셔야만 한단다. 나는 오직 그분의 능력으로 여기서 고난도 이기고 너희를 위해 십자가도 질 수 있단다.” 우리 주님의 이러한 기도생활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님이 남기신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도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의 기도는 일평생을 살아오시는 동안 기도가 그분의 인격적 특징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를 사모했던 영혼들은 영혼을 건지는 그 일에 있어서 미련하고 무능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아파했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쓴 모든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와 더러움으로 인해서 처절하도록 절망해본 적이 모두 있을 것입니다. 이 치열한 영적 전투의 한복판에서 주님이 주신 믿음을 순전히 붙들고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합당치 않고, 얼마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은 날마다 젖은 눈을 가지고 하늘을 응시합니다.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오늘의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강함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지위도 주님을 머리 숙이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며 지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예수님처럼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도 미루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이 특권을 몸소 실천하여 세상도 이기고 자기 자신도 이기는 승리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III. 환경에 영향 받지 않는 기도

둘째, 주님은 환경에 의해 전혀 방해받지 않았던 기도생활을 하셨습니다. 희랍어 성경은 예수님께서 ‘한 곳(to,pw| tini)’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자면, ‘어떤 곳에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님이 기도하고 계신 장소는 아마도 항상 고정해 놓고 기도하러 다니시는 특별한 기도처소가 아님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정착된 삶을 사실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잃어버린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나그네와 같기를 자처하신 삶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섬기셨는가 하면,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을 전하셨고, 유대에서 가르치셨는가 하면, 두로와 시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시고 또 묵으셨습니다. 사면에 흩어져 있는 곤고하고 상한 영혼들을 몸소 찾아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고백처럼 주님의 생애는 머리 둘 곳 없는 생애였습니다(마8:20). 그러나 그의 복음 전하시는 동리는 항상 바뀌고, 그분의 기거하시는 처소는 늘 변해도 변하지 않는 생활이 있었으니, 그것은 ‘변함없는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시든지, 또 어떤 어려움에 마주하시든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계시든지 주님의 기도생활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견고히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분의 생애는 땀과 수고로 얼룩진 섬김과 희생의 생애였고, 그분이 처하셨던 환경은 결코 기도하시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묻혀서 한가로이 수도하시는 그런 수도자적인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 하나님을 등진 패역한 인생들을 향한 연민으로 눈물을 머금으신 채 이 동리와 저 동네를 다니시며 많은 노동과 수고로운 섬김으로써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신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환경도 넘볼 수 없는 고요 속에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을 뵙고 계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주님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기도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환경들과 부단히 싸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의 사정 중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사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결코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우리의 형편 안에서, 눈을 들어 기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고자 할 때 우리의 환경은 기도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줍니다. 육신의 연약함도 우리로 하여금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해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것도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직장에서 쫓기는 일과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는 육체의 힘을 남김없이 앗아가기도 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과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고자 하는 에너지를 빼앗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도 기도하시는 생애를 살아가시기 위해서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들을 동일하게 싸우고 견디고 이겨야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연약함을 가지신 예수님도 이 기도생활은 언제나 노고를 요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기도하시는 것보다 평안하고 안락한 쉼을 그분의 육체는 더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전투적인 심정을 가지지 않고서는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남기신 기도의 본을 따라,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에 항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태하고 아무렇게나 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끊임없이 애를 써야 합니다. 건강한 젊은이들은 새벽잠과 싸워야 하고, 이 세상의 우수(憂愁) 속에서 살아가는 나이 드신 분들은 마음에 가득 찬 염려와 근심과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정욕에 쉽게 흔들리는 젊은이들은 자신의 마음과 육체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투쟁해야만 하며, 가사와 그리고 직장에서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성년이 된 세대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매일매일 자기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분투하는 은혜생활이 필요합니다.

기도생활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입니다.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살과 뼈가 찢어지고 깨어지는 십자가의 형벌 한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생각하며 우리도 주님의 그런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IV. 장시간의 깊은 기도

셋째, 주님은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가 언제 시작되었고,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계속된 기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여기서 ‘마치시매’라는 말은 희랍어로 ‘에파우사토(evpau,sato)’인데, ‘안식하다, 휴식을 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다시 풀이하자면,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쉬심에’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잠깐 드려진 짧은 기도가 아니라 상당히 긴 시간에 오래도록 드려진 기도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즉 기도를 마치자 피곤을 이기기 위해 안식을 취하셔야 할 정도로 수고로운 노동이 깃든 긴 기도였음을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의가 없지만 기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 자체는 매우 경박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충만히 받으셨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실 수 있으셨고, 짧은 한마디의 기도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며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새 삶을 나누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같이 짧은 기도 속에서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서 위엄을 나타내신 이 광경들은 정말 우리의 눈길을 끄는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짧은 기도로 상황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임박한 재난을 면하고, 마귀조차 물리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화려함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여러 시간 고민하지만 이런 능력 있는 사람들은 한마디의 기도로 그 문제를 해결합니다. 성경 속에는 이처럼 짧게 기도하면서도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끈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러했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불러오거나 놀라운 치료들을 가져온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은 사도들의 발자취도 이런 기도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능력을 발휘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아무리 진실 되게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위대한 응답과 놀라운 은혜의 역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이들은 평소에 장시간을 기도에 헌신하면서 일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이며, 이 때문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말을 타고 달리며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수 10;12)라고 외친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던 것은 모세를 이을 지도자로 그의 심성이 형성되어 오기까지 일평생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에 눈에 보이는 그 광경은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명쾌하고, 그리고 신나는 광경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한마디의 기도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문둥병이 떠나가는 것은 한 순간에 드려진 짧은 기도 때문이었습니까? 기도 응답으로 점철된 예수님의 이 놀라운 역사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섬김의 이 아름다운 생애의 이면에는 피와 땀과 눈물을 쏟는 개인 기도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오랜 동안 매일같이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의 노고를 짜서 드리는 그런 기도의 아름다운 헌신이 있었고, 그 장시간의 기도 속에서 이룬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친교, 그분과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함이 이 위대한 기도응답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짧은 기도 끝에 순간순간 응답해주시는 달콤한 열매는 좋아하지만, 그런 기도의 세계를 지니기 위해서 자신이 마음을 깨트리고,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피를 쏟는 처절한 자기 복종과 희생적인 기도의 헌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살다 간 기도의 용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실제로 그들처럼 그렇게 기도에 헌신하며 많은 시간들을 보내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의 짧은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도 있었고 주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뜨겁게 주님을 사랑해서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주님과 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런 진한 사랑을 느꼈을 때도 있고,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불행하게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대장정의 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완주하고 우리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신앙은 승리했다고, 믿음을 따라 온전히 살았노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했고,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던 때에는 대부분 주님보다는 이 세상살이에 관심이 더 많았던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제껏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주님과 홀로 대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말 주님의 은혜에 깊이 사로잡히고 나면 하나님 앞에 홀로 주님과 대면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긴 기도가 기도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기도의 목표는 장시간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긴 기도는 그런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기도의 한 결과인 것입니다. 또한 깊은 기도는 항상 긴 시간을 필요로 하고, 긴 시간을 헌신하는 것이 없이는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깊고 탄탄한 기도의 세계는 장시간동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드려지는 기도 속에서 영적으로 단련된 자들만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비밀을 맛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의 열렬한 기도는 마치 방향타가 망가진 채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처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 갑자기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갑자기’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또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섬기던 일이나 자기가 이제껏 붙들고 살았던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갑자기 미끄러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도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생애는 옹달샘과 같습니다. 오늘 가득 퍼먹고 내일 또 가도 그 샘의 물은 또 고여 있습니다. 개인적인 은혜의 세계, 경건의 세계는 그런 샘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의 샘은 기도에 의해서 잘 보존됩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능력 있게 움직여 온 하나님의 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은혜입니다. 칼날과 같이 번뜩이는 예리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간절한 기도, 바쳐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역사 해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불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능력 있는 삶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교회적으로는 그 교회를 옛 영광으로 회복시켜주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좀 더 집요하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본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그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의 길이를 필요로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내가 말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들을 내 마음에 아로새기실 수 있도록 자기를 개방하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영의 생각들을 새기시기까지 우리 마음의 육신적인 지각의 껍질들을 벗겨내고 거룩한 영적인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깊은 기도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순발력입니다. 회사 일로 늘 바쁘고, 집안 일로 늘 분주하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찬송 한 장을 부르고 나면 이 세상에 근심걱정들이 모두 사라지고 찬란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떠오르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내 마음이 고정되는 그런 영적인 순발력 말입니다.

이런 깊은 기도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적인 요인, 건강상의 이유들, 그리고 다양한 심적인 원인들이 그러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요인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시간은 있지만 실제로 그 기도의 시간을 감당할 만큼 기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충분하게 기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기도에 합당하도록 잘 지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깊고 풍성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들어가는 문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도 진실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지어낸 열심이나 인위적인 기도가 아닌 보다 더 깊은 기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은 기도 시간에 진실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기도는 영적인 작용이기에 깊이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면 그 기도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긴 기도가 됩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자기 자신이 기도의 문을 두드리면서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지, 어느 한순간에 성령이 오셔서 나를 깊은 기도 속으로 밀어 넣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래 기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양식의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영과 기도의 영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V.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

넷째,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기도 그 자체도 강력한 영향력이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영향력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의 그 영향력에 대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봅시다.
첫째로, 기도는 배우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는 것은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당시 최고의 선지자로 존경을 받았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그 기도의 형태는 어쩌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형태보다도 훨씬 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많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기도를 가르쳐준 것을 보면서 오늘 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께 이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되는 즉시 완성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저주받고 진노 받은 자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든 신분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완성된 것보다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구원을 누린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고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즉시 하나님의 진리의 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거기서 자기가 붙들게 된 예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하나씩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가 지적했듯이 진리의 학교에 입학한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합니다. 전에는 구원을 받고 나면 거의 완전한 신자가 된 것처럼 교만했지만 순종의 학교에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아직도 극악한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신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치열한 삶의 여정 가운데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순종의 가치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고난 받은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거듭난 신자는 또 하나의 학교에 입학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의 학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에 있어서 기본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오랜 세월동안 주님을 믿은 자는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열렬한 기도 속에서 살았느냐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헌신된 삶이나 미래에 꿈꾸는 희생적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기도의 삶을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오늘 예수님께 나아와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기도를 전혀 몰랐다기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장시간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뵈면서, 자신들의 기도의 세계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도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어떤 위기 속에 있다 할지라도, 어떤 고통 가운데 거한다 할지라도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달라는 사람들은 여럿 만났으나 정작 기도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은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드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배운바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그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서 삶만큼이나 치열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러분의 본분을 잊지 마십시오. 진리의 학교와 순종의 학교에는 졸업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학교는 졸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 되신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더 이상의 지식이나 우리를 쳐서 복종시키는 순종이 필요 없게 되지만,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 예수님의 중보사역처럼 이 땅에서의 우리의 기도생활은 저 천국에서도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영향력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의 감화력입니다. 그에 앞서서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고,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으로부터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의 제자들에게 그 기도를 가르쳐 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는 것과 그의 생애를 생각해 본다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주 어린 나이에 광야로 보내어졌고, 평생을 그 빈들에서 자라나면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회개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광야의 고고한 외침으로써 잠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숨에 일깨우기까지 그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갔을 것이며, 주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교회들을 보며 아파했을 것입니다. 헤롯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의롭고 거룩한 자로 보았던 것도, 그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수 있기까지 그분이 사신 생애는 어떠했습니까? 안식도 없고 휴식도 없이 모두들 태만하게 잠들어 있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염려를 한 몸에 끌어안으시고 예루살렘을 위해서 가슴 저미는 기도를 드리신 생애가 아닙니까? 33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그분의 생애를 대면할 때면 우리의 마음은 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지니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기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쏟으신 주님의 모습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고 요한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줄 수 있는 기도의 스승이 되기까지 스승다운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매순간 힘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 의지했고, 하나님의 그 신령한 은혜를 더 많이 의지하며 일생을 사셨습니다.

VI. 맺는 말

주님이 몸소 기도의 모본을 보이셨던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고자 하는 불붙는 열망이 그분의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이 일을 위한 생애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 살든지 죽든지 그분이 존귀히 여김 받으시기를 바라는 믿음, 지금은 버려진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기를 바라는 소망이 이러한 기도의 희생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며, 무엇을 위해 이 공동체 가운데 있게 하실까요?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하셨으며,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 가운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시기를 바라며 십자가의 형벌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구하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기도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주님을 향한 이 사랑과 믿음은 도전해 오는 모든 환경의 위협으로부터 그 닻줄을 끊고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견고한 기도생활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환경의 어려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식어진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을 열어 환경의 위협과 육체의 곤고함을 딛고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의 간구는 원수들에게 체포되는 순간까지 계속 되었고, 그분의 중보기도는 보혈로 십자가를 적시면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지금도 당신을 둘러쌌던 것과 같은 육체적 연약함과 환경의 어려움에 허덕이며 기도생활에 실패하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기도생활을 위협해 오는 그 모든 위협과 유혹을 그분도 겪으셨고, 견고한 기도생활에 서지 못하도록 방해해오는 환경의 어려움을 그분도 맛보셨습니다. 실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실패하는 우리들을 도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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