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목의 줄을 풀지어다 (사 52:1~2)
본문
오늘 본문은 그 바로 앞에 있고 또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는 51:17-23의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상태에서 해방되며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이 회복될 일을 예언하는 말씀의 일부입니다.
이 희망과 위로의 예언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가난과 학대와 고통과 수치와 울분 속에서 어디로 나아갈지 알지 못하고 소망도 비전도 없이 회한과 슬픔과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져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살고 있을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위로할 자가 없고 누구도 같이 슬퍼해주지 않을 것이며 게다가 백성을 이끌 지도자가 없을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사51:17). 오늘 본문은 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와 약속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그 나라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이 노예에서 여왕으로 변화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첫머리에 보면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하는 명령을 한 번 더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힘을 낼지어다” 합니다. 비탄과 술취함과 자포자기와 무기력상태로부터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합니다.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라는 말은 예루살렘이 옷을 벗어버려 보기에 민망한 상태에 있거나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네 자신 본래의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은 다름 아니라 거룩함의 옷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한 것은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답게 그에게 마땅한 거룩함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뒤따르는 말도 그 옷이 바로 거룩함의 옷을 말하고 있음을 뒷받침해줍니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란 이방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며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이미 거룩함을 잊어버렸지만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고 짓밟혀서는 더더욱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예루살렘을 드나들 수 없게 만들 것이니 예루살렘은 이제 다시 거룩한 성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아름다움은 다른 것 아닌 거룩함에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거룩함이 곧 아름다움임을 보게 됩니다.
예언자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티끌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치욕과 회한과 비통함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욥기 2장에 보면 욥이 그가 누리던 모든 행복과 소유를 갑자기 다 빼앗기고, 심지어 그의 몸에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그 아내로부터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7-9절).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는 욥을 방문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하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욥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아볼 수 없는 몰골을 한 욥을 보고는 일제히 소리 내어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아있었다고 합니다(욥2:11-13). 이렇게 티끌을 뒤집어쓰는 것은 치욕과 회한과 비통함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던 예루살렘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명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여기서 일어나 앉으라는 것은 그저 일어났다 앉았다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땅바닥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앉아있던 상태에서 티끌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보좌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이방 바벨론에 의해 빼앗겼던 주인의 자리, 왕좌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다 잃어버린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자리에 다시 앉으라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라졌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그들을 지배하며 억압하고 괴롭히던 바벨론을 징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회복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보복의 말씀을 바벨론을 향해 같은 예언자를 통해 앞서 하셨음을 봅니다. 사47:1-3을 봅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바벨론을 가리켜 “처녀 딸”이라 한 것은 한 번도 외국의 점령을 당해보지 않았던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그 바벨론에게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한 것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빼앗고 다스리던 권좌에서 내려와 치욕의 자리로 떨어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의 자리와 바벨론의 자리를 각각 티끌에서 보좌, 보좌에서 티끌로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득세로 인해 바벨론의 노예상태로부터 풀려나며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역사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본문에서의 마지막 명령은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명백한 해방의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는 이런 해방을 이룰 힘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을 조르고 있던 줄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하신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적 응답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악한 권세와 그 폭정을 자초한 원인으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하던 죄를 벗어던지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목을 조르던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주전 8세기 옛 유다 백성에게 주어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향해 여전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들립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일어나 앉을지어다,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하신 말씀이 그대로 다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히 택하심을 받아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을 잊어버리고 영적으로 잠들어있었으며,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이 나라와 사회 구석구석과 국민의 심령에 가라지가 뿌려졌고 그 가라지가 무섭게 퍼져 반기독교세력과 반교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며, 급기야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억압하는 권력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힘을 잃었고 정부가 교회를 옥죄는 온갖 법령과 조치들을 쏟아내도 속절없이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세상권력은 교회 위에 올라타고 교회를 마음대로 두들기려고 합니다. 교회를 발가벗겨 티끌에 내동댕이치고 싶어 합니다.
지금 사립학교법 문제로 교회가 일어나 총력을 기울여 개정된 사학법을 재개정하게 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개정사학법의 심각한 위헌성과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개정사학법은 교회의 목을 조르려는 법입니다. 선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교육의 자율권을 훼손하며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국가의 정체성과 안보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게 될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개정사립학교법은 사립학교 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서 필요한 법인데 왜 반대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립학교 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일은 굳이 사학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정부의 단호한 의지만으로 얼마든지 가능함을 정부 스스로가 증명한 바 있습니다. 사립학교 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명분에 불과하고 속셈은 딴 데 있음을 교회는 알고 있습니다.
개정사학법은 이사의 4분의 1 이상을 외부에서 영입해야 한다는 강제조항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건립이념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들어와야 학교운영이 투명해진다는 논리는 어떻게 성립되는 것입니까? 또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내부의 사람보다 정직하고 청렴하다는 보장은 누가 할 것입니까? 이것은 개방형이사가 아닌 이사들은 다 불의하고 불투명한 사람들이라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악의적인 예단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정부와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관선이사로 들어와 학교를 정상화시키기는커녕 학교를 타고앉아 학교의 발전기금까지 다 거덜 내는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개정사학법을 찬성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4분의 1밖에 안 되는 외부이사들이 어떻게 전체이사회를 좌지우지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직하지 않은 말입니다. 불순한 세력들이 추천하고 그들과 항시 내통하는 이사는 4분의 1 아니라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이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음은 현장에서 뼈저리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개정된 사학법은 관할청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얼마든지 이사의 취임승인을 취소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하며 더 나아가서는 불순세력들이 학교를 통째로 탈취하기 쉽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이 대한민국의 학교교육을 어떤 특정 이념집단의 교사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은 사실상 공개된 비밀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학교들의 신앙교육은 더 이상 불가능해질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립학교들이 들고 일어났고 교회가 순교적 각오로 투쟁에 나선 것입니다. 기독교학교들이 자유롭게 신앙교육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교회의 선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개정사학법을 반대하면 의례히 나오는 소리가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무조건 기득권을 죄악시 하는 것입니까? 부정한 방법으로 차지한 기득권이라면 당연히 도로 내놓게 해야 하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노력하여 정당하게 이루어놓은 것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사회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회입니다. 자신의 성취나 소유를 스스로 남에게 양도하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개인의 정당한 기득권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범죄시하거나 탈취하려 하는 법이나 국가권력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립학교들이 깨끗하고 투명한 학교가 되도록 자정노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기를 촉구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사학들이 교회를 방패삼아 비리를 은폐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정부는 모든 사학이 깨끗하고 투명해지도록 강력한 감독과 지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또 교육당국과 사법당국은 정말 비리가 있는 사학들은 모두 적법하게 조치해야 합니다. 반면 정부는 사립학교들이 반국가적인 교육을 하지 않는 한 그 고유한 설립이념에 따라 자유롭게 교육할 수 있는 권리를 완전히 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국가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적어도 교육에 관한 한 무서운 독재국가입니다. 교육의 권리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가 심하게 침해되어있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종교교육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교육의 자유가 없으면 진정한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학교들이 학교설립의 목적에 따라 학생선발권을 갖고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교육할 수 있어야 진정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주는 보조금을 가지고 특정종교의 교육을 억압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대한민국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자유민주주의국가라면 당연히 국가가 어떤 형태의 학교이든 반국가적인 교육을 하지 않는 한 꼭 같이 재정지원을 하며 보호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이것은 국민의 기본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제는 교육의 권리를 되찾고 신앙의 자유를 확립하며 이 나라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교회가 일어나 싸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 기독교학교에서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성경 가르치며 신앙지도 하는 일은 이미 금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를 가르치려면 타 종교도 다 가르치라고 강요합니다. 기독교학교마다 수시로 장학관을 내보내 감시하며 말 안 들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합니다. 학교뿐 아닙니다. 군대에서는 군목의 수를 대폭 줄여버렸습니다. 군종감의 자리를 없애고 일반 인사부처에서 군종장교들의 인사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회복지분야에서도 개정사립학교법처럼 민간사회복지기관에 관에서 임명하는 이사를 들여보내도록 하는 새 법을 입법예고하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도 공립학교화 하고 교회가 세운 복지기관도 다 접수하겠다는 심사입니다. 북한 공산집단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정권입니다. 최근 수년간 교회는 보기 민망한 옷차림으로 교회 본래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져 티끌 가운데 앉아 목에 사슬이 매인 채 무기력하게 있었다고 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일어나 앉을지어다,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하시는 명령을 들을 수 있다면 이제 교회는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힘을 내고 티끌을 털어 버리고 제 자리를 되찾고 교회의 목을 조이는 사슬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거룩함의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범한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티끌로 끌어내리시고 멸망시키신 것 같이 주의 몸 된 교회를 억압하고 목 조르던 권력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일어나 하나님께서 곧 무너뜨리실 이 권력이 우리의 목에 매었던 줄을 풀어버립시다.
(이수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