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라 (왕상18:30-40)
본문
곽노아 목사 [성경본문] 열왕기상 18 : 30-40
( 서 론 )
엘리야 시대에 북 이스라엘은 3년 반 동안 가뭄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세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땅은 흙먼지만 날리고 논과 밭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을 것입니다. 왜 이런 가뭄이 수 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습니까 ?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제단을 훼파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급선무는 어떤 일이었습니까 ? 하나님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하나님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우상을 만들어 세우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1998년부터 학교마다 단군상을 건립해서 한 때 소란을 피웠던 자들이 기독교의 강력한 발발에 조용해진 것 같더니 2005년도 다 가는 요즈음에 다시 고개를 들고 선불교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단군상을 건립하려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이 땅에 거짓 것들이 날 뛰고 있습니까 ? 오늘날 이 땅에 하나님 제단들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하나님 제단이 무너져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즉 850명을 상대로 혼자서 싸웠는데 어떻게 싸워서 이겼습니까 ?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비밀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겼습니까 ? 하나님 제단을 수축해서 이겼습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하나님 제단을 수축했습니까 ? 그리고 수축된 제단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 분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열두 돌로 제단을 수축하라.
(왕상18:30-32)“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
야곱의 아들들은 12명이었는데 하나님은 12명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12지파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스라엘 12지파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상태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에 열 지파, 남 유다에 두 지파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먼 옛날 자기들의 조상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엘리야는 하나님이 이 민족을 12지파로 세우셨다는 약속을 믿고 갈멜산에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열두 돌로 단을 쌓았습니다.
갈멜산은 169m 정도 되는 낮은 산이었는데 그곳에는 하나님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단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 왕과 거짓 선지자들과 백성들을 갈멜산으로 모이게 했습니까 ?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존재가 헛된 존재라는 것을 밝히려 하는데 목적이 있었을까요 ? 물론 우상의 헛됨도 밝히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열두 돌을 취하여 무너진 하나님 제단을 쌓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제단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를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32절에 보면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면 돌로 단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셨던 그 약속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 엘리야는 하나님이 택한 열두 지파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제단을 소중하게 여기는 한 하나님은 절대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야곱처럼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아온 자도 드물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야곱이었지만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약속하신 야곱 자신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엘리야는 그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지금 제단을 수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 제단이 거짓된 세력 때문에 무너지지는 안했습니까 ? 혹시 나 자신의 마음의 성전이 거짓된 세력들 때문에 무너지지는 안했습니까 ? 교회 제단이, 마음의 성전이 무너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엘리야처럼 포기하지 안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하나님의 제단들이 곳곳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의 성전이 무너져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내 마음의 성전을 회복시키기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12:20) 내 마음의 성전이 무너졌습니까 ?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제단을 수축해야만 합니다. 주저 앉아버려서는 안됩니다. 다시 일어나야만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 시대 교회의 제단들이 수없이 무너져 가고 있고 성도들의 마음의 성전도 흑암의 세력들로 인해 무수히 무너져 가고 있는데 이대로 무방비 상태로 멍청히 당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낙심하고 자포자기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엘리야의 모습은 한 선지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엘리야 시대 같은 상황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찾아 올 때 엘리야 같은 신앙으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마28:20) 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 우리에게 무너진 곳의 모습이 있다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무너진 곳을 수축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제단에 물이 흐르게 하라
(왕상18:33-35)“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열두 돌로 제단을 수축한 엘리야는 하나님께 드릴 제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나무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행동을 지시했는데 네 개의 통에 물을 가득 채워 세 번씩이나 제단의 제물에 붓도록 하였습니다. 즉 열두 통의 물을 갖다 부었습니다. 제단에 제물은 물론이고 나무와 제단 주위까지 흠뻑 젖은 상태였습니다. 사람이 불을 붙여도 제물은 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즉 자연적인 상태로는 도저히 불이 붙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제물이 불탈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확신을 고백하는 행위인 동시에 모인 백성들에게 핑계 댈 수 없는 분명한 증거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제의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똑같이 송아지를 제물로 드리고 그 제물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요 하나님이다”는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 엘리야의 제의였습니다.
26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도 송아지를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똑같은 송아지 제물을 드렸지만 33절에 엘리야가 드린 제물은 번제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번제물 제사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불이 사람의 힘으로 일으키는 불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지는 불로 제물을 태워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처음부터 번제 제사를 드리므로 반드시 번제물에 불이 임할 것을 믿고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물을 번제 제물에 붓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를 증거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우상 앞에 절하고 거짓의 가르침에 순종하였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제단에 물을 붓는 엘리야의 행동은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서도 하나님께 제사는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에는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에서 제사가 드려져야 하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제사만 드렸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잘못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제단에 물을 부으면서 깨닫게 하고 있었습니다.
물은 곧 말씀을 의미합니다.(엡5:26)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단에는 말씀의 순종함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말씀의 순종함이 없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형식과 외식적인 제사는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비밀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충만한 제단만이 하나님의 불의 역사가 임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번제물이 휼륭하다 할지라도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말씀이 없는 번제물이라면 그 번제 제물을 하나님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번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 말씀의 순종의 삶 자체였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 성전에 나올 때 형식과 외식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나올 때 하나님의 불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의 행동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깨닫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 제단에 물을 붓는 엘리야의 행동을 보고 깊이 깨닫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불의 역사는 반드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올바른 기도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왕상18:36-37)“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하나님 제단을 수축한 엘리야는 말씀에 의지하여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엘리야가 제단을 수축하는 것도 무조건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택한 12지파를 생각하면서 수축하였고 제사 역시도 가장 기본적인 제사 번제 제사를 드렸고 번제물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송아지 각을 뜨고 하늘의 불을 기다리는 번제 제사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기다리면 번제 제물에 불이 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다리지 않고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 역시도 무조건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고 구체적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저녁 소제 드릴 때”였는데 이 때는 해지기 세 시간 전으로 대력 오후 3시경입니다. 엘리야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시간에 맞추어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 부르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곧 언약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엘리야의 간구는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옵소서”즉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을 드러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보다는 내가 드러나기를 원하는 기도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는“내가 주의 종이 됨을 알게 하옵소서”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는 자임을 드러내 주실 것을 구한 것입니다. 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셋째는“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이 엘리야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행하는 일임을 드러내 주실 것을 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엘리야 자신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임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모든 간구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도였습니다. 우리들의 기도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내 자신을 위한 기도가 많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까롤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쓴“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함을 깨우쳐 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분명히“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그의 나라보다 그의 의보다 내 자신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간구하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기도와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지만 바알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
성경은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를 할 때 우리의 기도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부르짖는 기도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왜 우리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는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하늘 문을 열게 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기적인 기도를 버려야할 것이고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를 버리고 올바른 기도 제단을 쌓아가야 할 때입니다.“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 결 론 )
엘리야가 왜 능력 있는 선지자였습니까 ? 그는 무너진 제단을 발견 했고 그 무너진 제단을 어떻게 수축해야 하는지 알았고 수축된 제단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아는 자였고 수축된 제단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선지자였다. 오늘날 이 땅에 교회의 제단들은 어떻습니까 ? 성도들의 마음의 제단들은 어떻습니까 ?
교회도 성도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아 나아가야 할 것이고 교회의 강단마다 하나님 말씀이 강하게 역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 또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마다 부르짖는 기도가 울려 퍼져야 할 것이고 성도들 또한 부르짖는 기도가 생활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한고 살아있는 말씀이 되지 못하고 영적인 기도가 되지 못한다면 그 곳은 곧 무너진 제단임을 깨닫고 엘리야처럼 제단을 수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곳곳에 무너진 제단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성도들의 마음의 성전이 무너진 곳이 허다합니다. 반드시 다시 수축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이 땅에 임하고 있는 영적 가뭄이 끝날 것입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라”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내가 섬기는 제단은 나의 마음의 성전은 어떠한지 살펴보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충만한 제단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