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나'가 문젭니다(1): 도망치는 요나 (욘 1:1-16)
본문
<고객과 종업원의 차이>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파트 타임으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한 적도 있었고, 편의점에서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밤마다 빌딩 청소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부동산 매매 계약서를 대행해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종업원'과 '고객'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종업원은 출근 시간이나 퇴근 시간을 자기 맘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일단 일을 시작했으면 자기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고 반드시 매니저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습니다.
전날 테니스를 쳐서 팔다리가 아파서 청소하는 것이 싫어도 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피곤하다고 해서 매니저가 봐주지 않았습니다.
종업원은 월급을 받고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용주의 지시를 따라야만 합니다.
쉬는 것도 맘대로 쉬지 못하고, 식사도 아무렇게나 하지 못하고
반드시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해야만 합니다.
종업원의 생활이 익숙지 못했던 저는 옛날 손님으로서
자유롭게 왕래했던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종업원과 달리 손님은 자기 맘대로 아무 때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맘대로 정할 수가 있습니다.
막상 종업원이 되어서 자유를 구속당했을 때 고객이었을 때의 자유가 그리웠던 것이지요.
오늘 아침 여러분은 예수님의 종업원으로 이 곳에 오셨습니까?
아니면 이 교회의 고객으로 오셨습니까?
고객으로 교회에 들락거리시는 분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입니다.
피곤하면 교회에 안 오고,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있으면 따지고,
맘에 들지 않으면 교회를 확 바꿔버리고, 자기 맘대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의 종업원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뜻에 따라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을 때,
비록 내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 '나'가 문제였던 요나>
우리는 앞으로 4주 동안 요나서를 집중적으로 살펴 볼 것입니다.
요나서는 전체가 4장으로 된 아주 짧은 책이지만 아주 해학이 넘치는 책입니다.
저는 이번 요나서 연속 강해 설교의 제목을 『요 '나'가 문젭니다』로 정해봤습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외부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요 '나'가 문젭니다.
나만 변화되고 새로워지면 세상은 확 달라집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 선포를 위해 특별히 고용하신 종업원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막 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오직 자기를 고용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움직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 멋대로 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종업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고객인 것처럼 착각을 했던 것이지요!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고대 근동 지역 전체를 정복했던 대제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철천지원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적의 심장부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과
민족주의 의식으로 가득 찼던 요나는 즉각적으로 반항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가 폭삭 망해도 시원찮은 판인데
그 원수 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구원을 선포하라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고객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고용된 하나님의 종업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정반대 길로 무작정 도망치고 맙니다.
요나의 반항을 쉽게 풀이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일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애국적 민족주의로 불타 올랐던 젊은 선교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일본의 수도인 도쿄(東京)로 가서 일본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쫄딱 망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구원받도록 메시지를 전하라니요!
그 선교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산에서 도쿄로 가는 배를 타는 대신에
정반대로 중국 가는 배를 타고 도주하기로 했습니다.
요나가 꼭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 사랑하신다고 믿었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와 같은 이방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다고 믿었던 요나였기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욥바'라고 하는 곳에서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는 오늘로 치면 '스페인'인데 앗수르 제국의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 말씀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는 원수 나라인 앗수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좀 피해서 멀리 멀리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을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요나가 탄 다시스로 가는 배에 엄청난 풍파가 몰아닥쳤습니다.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태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부서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울부짖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5절 후반부를 보세요.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깊은 잠, 이것은 영적인 무감각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과 교신하는 영적 안테나가 끊어졌습니다.
자기가 탄 배에 엄청난 풍랑이 몰아닥쳐 배가 파선하기
일보 직전인데도 이것을 모르고 태연히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리의 고집대로 살 때 엄청난
풍파가 몰아닥침에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져서, 영적인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선장이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깨웁니다.
그러면서 요나가 믿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자기들이 구원받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모든 인간적인 수단이 끊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때 뱃사람들이 제비뽑기를 제안합니다.
도대체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가려보자는 것이지요.
제비뽑기를 했더니만 제비가 요나에게 뚝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8절을 보세요.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재앙이 일어났는지?"
"요나의 직업이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길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민족에 속해 있는지?"
요나의 신분을 확인하려는 뱃사람들의 물음에 대해서 요나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9-10절을 보세요.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자신의 신분에 관하여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을 받은 요나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자신은 히브리 사람인데,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제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고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고용된 종업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기를 다그치는 이방 뱃사람들을 향하여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러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털어놓았습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이 엄청난 소동이 일어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뱃사람들이 요나를 심문하는 사이에 파도는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절에 보니까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이 엄청난 태풍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불어닥친 것을 시인합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위기가 일어난 것을 솔직히 자인하고
그 책임을 달게 지겠다는 의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뱃사람들이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더니
무섭게 폭풍이 일던 바다가 금새 잔잔해졌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잔잔해진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이방인들이었던 뱃사람들의 변화였습니다.
16절을 보세요.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서 회개하니 니느웨로 가기 전에
벌써 이방 뱃사람들부터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고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약속까지 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이 변화되니 주변 사람들이 변화된 것이지요!
요나 한 사람이 회개하니 요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요 '나'가 변화되니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살아나네>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요나서의 연속 강해설교의 제목은 『요 '나'가 문젭니다』.
여러분, 요 '나'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생활을 하니 가정이 어렵게 됩니다.
나만 아니라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풍파가 불어닥칩니다.
요 '나'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제 고집을 피우니 하는 일마다 막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 '나'가 깨닫고 변화되어야지만 요 '나'도 살 수 있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다함께 살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서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사랑입니다.
철저한 선민주의자요 국수주의자였던 요나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나에게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기 원하십니다.
영토에 대한 포기를 종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에서도 역사하십니다.
황우석씨가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르치시려는 진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국경이 없으며 선교사에게도 국경이 없다."
요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 니느웨로 가기가 싫어서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이 길이 아님에도 그 길을 고집하고 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길로 가다가는 반드시 탈이 납니다.
자기만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어렵게 합니다.
저와 함께 신학교를 졸업한 친구들 중에 목회를 하지 않고
다른 길로 접어든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동창회 모임 때 가끔 그런 친구들과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목회하는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제법 사업에 성공해서 생활은 괜찮아 보이지만 영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배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피아노 판매를 하는 사업을 해서
꽤 돈도 벌었지만 결국 그 사업을 다 포기하고 목회를 새로 시작한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할 때 기꺼이 그 뜻에 따라야 하는데 내 좁은 생각이 문젭니다.
내 욕심이 문젭니다.
내 편견과 고집이 문젭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철학과 내 견해와 내 영토를 고집하는 것이 문젭니다.
결국 요 '나'가 문제인 것이지요!
요 '나'가 문제였던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바다에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잔잔했던 바다가 미친 듯이 뛰놀기 시작했습니다.
뱃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각자 자기들이 믿는 신들에게 부르짖었지만 여전했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짐들을 바다에 내던졌지만 풍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뱃길에 익숙했고 해양 기상에 능통했던 뱃사람들은
아무리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보아도 그 원인을 통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인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려는 요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인을 제공한 요나가 책임을 지기 전까지는 풍랑이 멈출 수 없습니다.
요나는 노한 풍랑을 일으키시고 또 잠잠케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입니다.
요나는 즉각적으로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바다 속에 내 던졌더니 노한 풍랑이 멈추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업원이라는
신분을 회복했더니만 다른 사람들이 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요 '나'가 문젭니다.
요 '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널리 퍼지지 못합니다.
요 '나'의 좁은 생각, 짧은 안목, 무모한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요 '나'가 죽어야 합니다.
요 '나'가 요나와 함께 수장(水葬)되어야 합니다.
요 '나'의 불신앙과 고집과 편견이 물에 빠져 죽게 될 때,
요 '나'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요 '나'가 죽음으로 주변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낯을 피하여 정처 없이 도망치던 요 '나'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우리가 "주님에게서 돌아설 때 넘어지게 되고,
주님을 향해 되돌아설 때 일어나게 되며, 주님 안에 머물 때 든든히 서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김흥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