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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아 멈춰라 달아 멈춰라 (수 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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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아 멈춰라 달아 멈춰라 (수 10:1-27)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4)

지난 시간에 보았던 대로 기브온 백성은 살길을 찾아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에서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투항이며 비겁한 행위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다릅니다. 기브온은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삶보다 여호와의 문지기가 되는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불안한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브온이 정말 약한 존재인가? 아닙니다. 2절 말씀에 보니까 기브온은 왕의 성처럼 큰 성이요 아이 성 사람들보다 강하다고 말씀합니다. 최소한도 아이처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으킨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합류한 변화의 사람들입니다. 이미 낡고 옛것이 되어 버린 것을 붙잡고 있어 보았자 서서히 죽어가는 것뿐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언어 중 하나가 ‘노마드(Nomad)’라는 단어입니다. 유목민이라는 뜻입니다. 정착민과 달리 유목민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21세기는 변화와 속도의 시대입니다. 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시대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제의 영광이 오늘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영광에 취해 변화를 하지 않다가 도태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노마드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최초의 노마드입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애굽을 떠난 노마드며, 광야를 전전하던 노마드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상체제와 결탁하려는 가나안 정착세력과 유목민적인 삶의 양식을 고수하는 여호와의 신앙의 대결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대부분의 역사를 디아스포라 상태로 열국에 흩어져 살았던 노마드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그네 신앙의 소유자들입니다. 나그네 신앙이야말로 변화의 신앙입니다. 새로운 곳을 향하여 나가는 자만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먹이로 배부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브온 백성은 낡고 생명력이 다한 우상을 섬기는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시는 대 변화의 결단을 한 백성들입니다. 그 변화를 위해서 거지처럼 위장하고 또 물 긷고 나무를 패는 하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새로 시작한 지금은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기브온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성하게 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상의 체계를 고집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변화를 모색하면 반드시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근에 있던 세력들이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헤브론 왕 호함, 야르뭇 왕 비람, 라기스 왕 야비아, 에글론 왕 드빌이 연합하여 기브온을 치려합니다. 자기 편에서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거나,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려고 하거나, 무언가 은혜를 받으려고 결단하면 항상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어둠의 세력들도 자기 편에서 이탈하는 행위를 그대로 지켜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특히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방해공작을 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였을 때 가장 먼저 말렸던 사람은 수석 제자였던 베드로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였다고 표현되어 있지만(막8:32) 이는 꾸짖었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꾸짖음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 하고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이처럼 사단의 방해는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남편이 공연히 심술을 부리든지 아내가 방해를 합니다. 갑작스럽게 다른 일이 생기든지 자녀에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넘어뜨리기도 합니다. 사단의 이런 방해가 당연한 것은 자기편을 잃었기 때문이고 자기 전략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받거나 변화의 시점에서 고난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단호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호하면 사단의 공격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면 사단의 공격이 길어지고 자신도 신앙을 잃기 쉽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기브온은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구조요청을 보냈습니다. 6절입니다.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이런 요청을 받은 여호수아는 군사들을 이끌고 밤새도록 올라와서 이들 연합군을 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우리 인생의 전선에서 위기에 닥치면 하늘로 급보를 보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군대를 보내십니다. 기브온이 혼자 맞서 이들과 싸우려 하였다면 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계약은 ‘폼’으로 맺은 것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에 서로 돕기 위해서 맺은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도 계약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는 고백이고 이런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간구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하고 외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1) 무적 인생,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8)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과 남부 연합군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남부 쪽에 있는 적을 한 번에 싸워 쓸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아이 성 전투 이후 중단되었던 전투가 또 시작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그냥 얻을 수 없습니다. 축복의 땅은 동시에 치열한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싫다고 돌아서면 축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이 되어야 합니다. 공격적이라는 것은 사람과 싸우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기회로 바꾸라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편안합니다. 그러나 발전은 없습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곳으로 가야하고 그곳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합니다. 그 적이 직장이 될 수도 있고,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옮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 바로 그렇습니다. 편안하게 안주할 수도 있지만 더 큰 땅을 찾아 도전을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도전정신으로 충만합니다. 여호수아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기브온의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그날 밤에 군대를 몰아 올라갑니다. 길갈에서 기브온까지의 거리는 약 35km 정도로, 행군하기에 그리 만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용사들을 이끌고 밤새도록 달려갑니다. 마치 먹이를 찾아 달려가는 사자와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8절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무적의 인생이 됩니다.

무적 인생 여호수아 앞에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여호수아의 말에 태양이 멈추고 달이 그 자리에 서고 맙니다. 저는 오늘 이 전투과정에 나타난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위대한 능력을 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인식 못하고 너무나도 시시하게 살고 있습니다.

2) 태양아 멈춰라 달아 멈춰라(12)

오늘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밤새도록 길갈에서 기브온으로 올라간 여호수아가 남부연합군들을 갑자기 기습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남부 연합군들과의 싸움에서 파죽지세로 승리합니다. 그들을 벧호른이라는 골짜기로 몰아가는데 큰 덩이 우박이 내려 그 남부 연합군들을 칩니다. 그 죽은 숫자가 칼로 죽은 자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자가 더 많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1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나가는 곳에는 자연도 순응하여 돕습니다. 이곳에는 햇빛이 비치는데 비하여 적이 있는 곳에는 엄청난 우박이 쏟아 붓습니다.

패전하는 적들과 싸워야 하는데 해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승기를 잡았을 때 끝까지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때 나온 여호수아의 말은 정말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엄청난 말이었습니다.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12) ‘태양아 멈추어라 달아 멈추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여호수아가 이렇게 명령하자 실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내려가지 않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어 하며 반신반의합니다. 어떤 분은 이것은 단지 하루가 긴 것처럼 느낀 심리적 현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성경말씀이 정확하다고 믿는 어떤 분들을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태양이 멈춘 것이 아니라 지구 자전이 하루 동안 멈추었다던가. 지구 자전이 멈추었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는 하루 종일 어둠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 기록들을 살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지구 자전 기록을 보면 실제 하루의 오차가 있었다며 현대의 우주과학을 들이대기도 합니다. 또 지구 자전이 멈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의 흐름을 굴절시켜 이 지역만 하루 종일 낮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는 설 등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저는 여호수아의 이 명령이 실제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유인력을 만드시고 해와 달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은 적용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의 의미를 파악한다면 기적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기적에서 키가 6척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한 인간이 태양을 향하여 ‘멈추라’고 명령하는 그 담대함을 봅니다. 감히 인간 중에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태양의 지름은 지구지름 보다 근 100배가 넘습니다. 부피로 따지면 백만 배가 넘지요. 그러니 현대인들 중 누가 그 큰 태양을 보며 감히 멈추라고 명령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대 사회엔 더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태양은 신이었습니다. 태양은 애굽의 신입니다. 애굽은 태양 신 ‘라(Ra)’가 다스리던 곳이고 ‘바로’는 그 태양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 되어도 기후제를 지내고 신이 노했다는 등 미신이 가득했던 그 시대에 작은 한 인간이 이렇게 태양을 향하여 대담한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누가 달을 보고 소원을 빌지 달에게 멈추라고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인간이 그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태산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 보이지만 태산을 움직일만한 기개를 가진 것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향하여 이런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땅에 매여 살고 오래된 나무 밑에서 성황당이라 하여 소원을 빌던 고대인들에게는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대단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작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잠잠케 하심으로 이러한 능력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탄 배가 갈릴리 바다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큰 광풍이 일어나 베에 물이 넘쳐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마침 주무시고 계셨는데 위급하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깨어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 하며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막4:41) 하였습니다.

그 말씀 앞에 자연이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우리는 태산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그저 과장법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오직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중국에 우공이산(愚公移山) 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중국의 태행산과 왕옥산 기슭에 우공(寓公)이라는 나이 90세 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을 위해 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 일은 태행산과 왕옥산이 마을을 가로 막고 있어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그 산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공과 그의 가족이 산에서 흙을 퍼다가 바다에 버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우공을 비웃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저 태산같은 산을 다 옮길 수 있겠느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때 우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못 이루면 내 아들이 이룰 것이요, 아들이 못하면 손자가 이을 것이니 그러다보면 산은 언젠가는 모두 없어질 것이요”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 산의 산신령들이었습니다. 이 산신령들은 곧바로 하늘의 천제에게 가서 우공이 우리 산을 없애기 전에 먼저 옮겨달라고 간청해서 두 산이 옮겨졌다는 고사입니다.

비록 고사이긴 하지만 단순하고 우직한 사람이 일을 내고 기적을 만듭니다. 우리가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는 명령을 예수님의 약속대로 단순히 믿고 따른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이런 약속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저는 이와 같은 성경의 약속들을 보며 주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주신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자기를 작다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말에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축복하면 그 축복이 하늘나라에 그대로 성취됩니다. 여러분이 저주하면 그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풀립니다. 여러분이 귀신을 향하여 명령하면 귀신이 듣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향하여 담대히 명령하던 기도를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하니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며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지만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습니다(약5:17-18). 성경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자연과 운명 앞에 왜곡되고 위축되어 사는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실제 인류는 조금씩 전진하여 자연을 정복해 왔고 이제는 우주를 향하여 그렇게 나아갈 것입니다.

3) 혀를 놀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가 없더라(21)

또한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존재인지 잘 드러내는 말씀은 21절 말씀입니다.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21) 왜 혀를 놀려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자들이 없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고, 가나안 남부 연합군의 주력을 무찔렀는데 누가 감히 비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들은 비웃음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비웃음을 당할 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낮아지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웃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자존심을 먹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이 비난받거나 비웃음을 받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이 비웃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말씀들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형통케 하시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보고 압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주변 사람들이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창26:29, 39:3) 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강성하니 사람들이 그를 함부로 할 수 없고 존귀하게 대접하며 이들과 계약을 맺으려 합니다.

이는 단지 물질적인 부요함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난해도 존귀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포로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지만 그는 우뚝 선 존재로 빛납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 난파하게 되자 바울의 지도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배 안에서 탄 모든 사람들이 선장이나 호송 대장을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중보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세상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소금같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비웃음을 당할 수 없습니다.

만약 비웃음을 당하고, 혀를 놀려 우리를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귀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데 세상이 주는 방식을 좇아 살며 자기 힘으로 이기려 할 때는 우리는 부끄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린 사자가 엄마 사자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는 왜 이처럼 용감하게 생겼어요?”
“우리는 밀림을 정복하는 밀림의 왕이니까!”하고 엄마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엄마, 우리의 발톱은 왜 이처럼 사납게 생겼어요?”
“넓고 넓은 밀림을 달리며 먹잇감을 잡아야 하니까!”
“엄마, 엄마, 우리 이빨은 왜 이처럼 날카롭게 생겼어요?”
“먹잇감을 한 번 물면 놓치지 말아야 하니까!”
그러자 새끼 사자가 말합니다. “엄마, 그런데 왜 우리는 동물원에서 놀고만 있어요?”

아무리 용맹함과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동물원에 갇혀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으면 모욕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4) 정복자들,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24)

우리는 또한 정복자들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24) 전쟁에 패한 다섯 왕들이 막게다 굴에 숨었다는 말을 여호수아가 들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큰 돌을 굴려 그 어귀를 막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합니다. 그리고 잔당 소탕작업을 먼저 벌입니다. 대적들의 뒤를 좇아가 후군들을 다 진멸시킵니다. 모든 것을 진압한 후 굴속에 갇힌 다섯 왕을 끌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무릎 꿇립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대장들인 군장들로 하여금 다섯 왕들의 목을 발로 밟게 합니다.

이는 고대의 전쟁의식으로 승자가 패자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의식입니다. 왕들이 발 받침상을 발등상이라고 부르는데 이 발등상에는 자기들이 정복했던 왕들의 얼굴을 새겨 넣습니다. 내가 이들을 발로 밟듯 정복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윤리의식으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전쟁의 방식입니다. 고대사회는 고대사회의 눈으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에게 밟히는 존재가 아니라 원수의 목을 밟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대를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은 권세를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여러분 문제들에 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문제를 밟고 정복하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정복자들입니다. 우리 운명의 정복자들입니다.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손에는 철장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시2:9) 우리 앞을 가로막는 세력들에 대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저들은 질그릇 부서지듯이 산산이 흩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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