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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앞에서 잔치하는 삶 (시 23:)

본문

원수 앞에서 잔치하는 삶 (시 23: ⑨) )


1. 혹시 “원수”가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여 지금도 가슴에 그것을 지니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누군가로부터 일평생 잊혀지지 않을 수치를 당한 일은 없습니까? 누군가에게 돌이키기 어려운 패배를 당해 본 적은 없습니까? 굳이 원수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큰 상처를 입혔거나 그로 인하여 미움이나 원한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아마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것이 있는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궁극적인 원수인 사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2.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1) 원수

본문에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하는데, 여기의 “원수”라는 말을 우리나라 말 사전으로 보면, ‘몸서리가 쳐지도록 싫은 사람이나 무리’를 뜻합니다. 정말 마주치기 싫은 사람, 생각조차 하기 싫고 꿈에라도 볼까봐 치를 떠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 원어로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묶거나, 속박하거나, 적의를 보이는’ 사람이나 세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과거나 현재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힘으로서 그 괴로움이나 그로 인한 좋지 않은 영향이 계속 남도록 만든 사람을 뜻합니다.

시편 23편의 저자인 다윗에게는 정말 ‘원수’가 많았습니다. 그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던 블레셋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적대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 들었던 사울과 사울의 충직한 부하들이었으며, 때로는 다윗의 자녀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아버지인 그를 반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정말 “웬수”죠. 평생을 함께 했던 동지들인 부하들이 그를 배신하여 다윗의 원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에는 장차 다윗을 통하여 나게 될 메시야를 그 뿌리에서부터 없애려는 사탄의 교묘한 술책이 숨어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많은 원수가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여러분에게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여러분을 노리는 원수 사탄이 있습니다. 그가 때로는 여러분을 향하여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 밀면서 공격하고, 여러분의 생활 전체, 그러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이 하는 일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모든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또 때로는 은근히 여러분을 부추겨 실패로 이끌 때도 있습니다.

어릴 때 냇가에서나 바닷가에서 놀 때의 일입니다. 분명히 거리가 멀고 저의 다리가 짧아서 안 될 것 같은데, 꼭 건너편으로 ‘뛰어봐라’고 부추기는 친구들이나 형들이 있었습니다. ‘된다니까’, ‘너라면 할 수 있다니까’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뛰었다가 물에 빠져 본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탄이 성도에게 하는 짓이 꼭 이와 같습니다. ‘해 봐라, 된다’, ‘해 봐라, 괜찮다’…. 그래서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얼마나 많이 잃고 아프고 괴롭습니까?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하면 거기서 일어나는 데에도 수많은 노력과 수고가 듭니다.

뿐만 아닙니다. 살면서 원수지는 일이 없을 수 있습니까?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어디 하나 둘입니까? 분한 감정을 삭히지 못해서, 그 마음을 부여안고 그냥 지나가기가 어려웠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변에는 선해 보이지만 결국 여러분의 것을 빼앗으려 하거나 여러분을 해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해 미움과 증오를 그대로 드러내거나,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거나, 여러분의 선대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갚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업상의 거래에서 여러분을 속여 재산에 손실을 입힌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헛소문이나 악의에 찬 말을 퍼뜨리는 바람에 직장에서 승진의 기회를 잃었거나, 사람들로부터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게 만든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때로는 여러분의 실수와 잘못으로 뜻하지 않은 원수를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에게는 눈에 보이는 원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 여러분의 과거를 꼭꼭 묶거나 붙들고 있는 것들, 그리고 여러분의 현재를 뒤흔들고 있는 것들이 분명 있습니다. 이러한 “원수”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원수 앞에 차려진 잔칫상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에 보면, “내 원수는 남이 갚아주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작가의 어머니가 늘 그에게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씀을 여러분에게 하시는 분이 있으니 그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30절에서도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직접 나서서 원수를 갚으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사탄을 비롯한 대적들의 어떤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아무런 대책 없이 늘 패배하는 삶을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설사 우리가 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해도, 사실은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나아가 궁극적으로 그 일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그 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상을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상”이라는 말은 원래 ‘짐승으로부터 벗겨낸 가죽’에서 유래한 말인데, 후에 이 말은 ‘식탁이나 탁자’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보면, 성막이나 성전의 진설병을 두는 상을 일컫는 말이었고, 왕궁의 식탁을 일컫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시편 69편 22절, 시편 128편 3절, 다니엘 11장 27절 등에서 식탁에 둘러앉은 자들이 나누는 교제를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의 “상”은 후자, 즉 왕궁의 잔치 자리에서 아주 성대하게 잘 차려진 진수성찬이 올려져 있는 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왕궁의 잔치 자리에서 왕과 나누는 즐거운 교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잔치 자리가 왕궁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잔치 자리가 어딥니까? 어디서 잔치를 하고 있습니까? 예, 바로 “원수의 목전”입니다. 즉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의 목전, 즉 원수가 가까이에서 똑 바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에서 성도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옛날, 전쟁에 나갔다가 승리하고 돌아오면, 왕은 승리한 군인들에게 큰 잔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잔치 자리에는 잡혀온 포로들을 참석시켰습니다. 포로들은 묶인 가운데, 이 잔치와 군인들이 상을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해보면 정말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도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반드시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글 성경에 잘 표현되지 아니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라는 말입니다. 이 “내게”는 ‘얼굴’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잔치상을 받아 즐거워하는 얼굴과 그 표정을 원수가 잘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잔치 자리에서 너무나 행복해 하는 성도의 얼굴을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본문의 의미를 생각하면, 즐겁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어떻게 굴복시키실 지 구체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것은 너무나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유혹하거나 위협하거나 조롱하는 원수들, 여러분을 못살게 굴고 패배하게 만들며, 여러분의 갈 길과 할 일을 가로막는 원수들이 장차 여러분이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똑 바로 지켜 볼 날이 있다는 것은 정말 지금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원수 앞에서 잔치한 예

성경에는 오늘 본문이 그대로 적용된 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주전 475년 전후, 당시 아시아와 중동의 맹주인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을 페르시아 제국의 2인자로 승진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하만은 아말렉 왕족의 후손이었습니다. 아말렉은 출애굽 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께 도전하여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던 족속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 기록된 설교를 통해 아말렉인들이 지쳐있는 이스라엘을 뒤에서 공격하여 괴롭힌 것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온 천하에서 도말 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신25:17~19).”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불순종도 끼어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백경을 가진 아말렉 출신 하만이 페르시아의 최고 권력자로 출세를 했습니다. 왕의 모든 신복과 백성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하만에게 꿇어 절해야 했습니다. ‘꿇어 절한다’는 의미는 ‘코가 땅에 닿을 만큼 납작하게 엎드려서 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페르시아에서 신에 대한 종교적인 경배의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하만을 그만큼 존경하라고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이러한 왕의 명을 알고도 하만 앞에서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하만이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아말렉 족속이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하만을 향해 신에게 하듯 경배하라는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는 산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것을 알자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안 그래도 미운 사람이 더 미운 짓을 하는 바람에 그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유대인의 원수인 아말렉 사람의 본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유대인들도 모르드개와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온 나라에 있는 유대 민족을 다 없애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일을 제대로 성사시키기 위해 하만은 페르시아의 연간 세금 수입의 2/3에 해당하는 “은 일만 달란트”를 왕에게 뇌물로 주겠다는 제안을 하여 왕의 선심을 샀고, 왕은 이 제안이 들어오자 하만이 없애려는 민족이 어느 민족인지 구체적인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하만에게 “너는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3:10~11)”고 하면서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 이스라엘 민족이 대학살을 당하게 되었고, 그 날짜도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심으로 기도한 왕후 에스더의 헌신과 믿음으로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극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게다가 더 극적인 것은 에스더가 베푼 잔치 자리에 왕과 함께 참여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했던 형틀에 자신이 달려 죽은 일이었습니다. 하만으로서는 승리를 눈 앞에 둔 잔치 자리가 죽음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상황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왕의 명에 따라 자신들을 죽이려든 대적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원수 앞에서 잔칫상을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장차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날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에 대해, 여러분의 원수에 대해, 최고의 원수인 사탄에 대해, 이와 같은 날이 올 것을 믿고 그들로 인하여 흔들리거나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화에 휩싸이거나 울분을 터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이와 같은 승리의 순간이 남아있습니다.

4. 우리도 원수 앞에서 잔치를 …

지난 2005년도 제 26회 청룡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한테도 이런 좋은 상이 오는군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전 항상 사람들에게 그래요. 일개배우 나부랭이라구. 왜냐면 60여명이 되는 스텝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럼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거거든요. 근데 스포트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제가 한 거는 이 여자(수상 트로피를 말 하는 듯) 발꼬락 몇 개만 떼어 가면 제 거 같아요. 스텝들한테 감독님한테 너무너무 감사드리구요. … ”

이 배우의 수상 소감은 오늘 본문과 너무나 일치하는 면이 많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별로 없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성대하게 차려진 승리의 잔칫상을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셨고, 곧 그 자리에 우리로 앉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배우의 수상 소감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승리의 날에 이대로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족한 성도 나부랭이에 불과한데, 하나님이 차려놓으신 멋진 밥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너무 죄송스럽고 감사하고 그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위한 승리 축하연,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차려주시는 성대한 잔칫상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잔치는 여러분의 원수 앞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이 땅의 원수들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원수인 사탄 앞에서 여러분의 승리의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한을 가슴에 쌓아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수하기 위하여 벼르고 벼르다가 도리어 그것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여러분이 다치는 일도 없으시기 바랍니다. 또 직접 원수를 갚으려 들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갚아주실 날과, 그 원수가 보는 앞에서 승리의 잔치를 벌일 날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날을 사모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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