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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하게 된 여인의 간증 (요 4: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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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하게 된 여인의 간증 (요 4:25-30)


요즘 자신의 은밀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당황해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될 것이라고 여기고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며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거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은혜를 받으면 다 그렇게 해야 하나? 그렇다면 은혜받는 것이 두렵다.’ 는 생각을 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서도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다 잊어버리신다고 했는데, 그렇게 자신의 숨겨진 은밀한 죄를 드러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운 일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 죄를 다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속죄함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믿은 가장 큰 복입니다.
시편 32편 1절에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고 고백했습니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성공의 복이 다 귀하지만, 죄가 가리워진 복보다 더 귀한 복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해결받은 죄를 왜 다시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까?
죄사함 받은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미 해결받은 자신의 과거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28-29절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정상적이지 않은 세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이 물동이를 내 버려두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엄청난 충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 한 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여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여인을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스스로 찾아간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일을 나에게 말한 사람을 보라” 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다는 것은 자기의 삶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싫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 “나의 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남이 수근거리며 하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조차 거리끼지 않고 사람들에게 드러내게 만든 것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그동안 자신은 잘못 태어난 인생이고 저주받은 자였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여튼 이 동네에서 제일 죄가 많은 사람이 자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워서 자신을 감추고 살았고 사람들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과거의 자신이 본래의 자신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속고 살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본래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 속에 ‘나도 그런 예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생겼지만, 자신이 그런 예배자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는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예배자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예배의 축복을 아시지요? 그동안 석 주에 걸쳐서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늘 예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 그 예배가 그친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좇겨났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인생에는 온갖 불행과 저주가 온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커녕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 자체가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뵈면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도 중에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영적 실재 앞에 섰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본 천상의 예배를 보면, 하나님 앞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도 두 날개로 발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두 날개는 날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조차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예배자를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면 금방이라도 달려갈 순종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그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자매가 미장원에서 긴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귀여워 보여 괜찮았는데, 본인은 너무 속상했던 모양입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태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자랄 동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예배 안내를 서라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안내를 설 것이면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차량 안내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안에서 교인들을 안내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침에 묵상한 말씀이 생각이 났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편 3절)
여호와를 기뻐하라! 엄청난 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가 기뻐하는 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여호와를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니! 예배자가 되는 것이 큰 북임을 깨달았습니다. ‘머리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가 에배하는 일에 소홀해질 수는 없겠지.’ 하고 그녀는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직 여호와만 기뻐하겠습니다! 그녀는 안내를 서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시종 밝게 웃으며 안내를 서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예뻐 보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도 예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리스도란 죄와 저주에서 구원해 주실 분을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참 예배자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자신을 저주받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이 마을에서 가장 타락한 여자라고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보시면서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하시지 않고, ‘네 존재가 내 기쁨이고, 내가 너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자신이 보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왜 그렇게 감격했는가를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생전 처음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도 감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날개로 얼굴을 가려야 되는데 그 앞에 나올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나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딸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감격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은혜를 무리 모두가 다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가장 큰 복 중 하나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말할 수 없는 죄인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바뀝니다,
전에는 자신이 타락할대로 타락한 자요 죄의 종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자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을 감추고 꾸미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왠 일입니까? 예수 안에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타락한 죄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애초에 하나님의 자녀였는데,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우리를 다시 되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원합니다. 부모로부터, 형제로부터, 교인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사랑받기 원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성질이 무서우며 나약한지 자신은 알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가장된 열등감입니다. 모두가 열등감에 짓눌려 지냅니다. 내가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니 남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겉으로만 하는 이야기이고 사실은 나를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대부분 열등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죄로 인하여서 거짓된 옛 사람인 나를 나 자신으로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내가 속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장 17절)
여러분은 이 말씀이 정말 그대로 이 시간에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을 보시고 좋아서 춤을 추시는 하나님이 믿어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네가 어제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너 뻔뻔하다. 어떻게 이렇게 나왔니?“ 하며 노려보실까봐 걱정하지는 않으십니까?

젊은 부부가 그들의 아기를 자리에 눕힙니다. 조그마한 아기는 몸을 움직이며 발길질을 합니다. 부부는 아기의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랑스러워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사실 그 아이는 그다지 예쁜 것 같지 않습니다. 아기가 예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부모 눈에는 정말 어떻게 감당을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그들이 아기를 사랑하는 것은 그 아기가 그들의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이 점에 믿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에 다시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다시 회복케 하시려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꿈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하나님이 없이는 못 살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에게도 우리 없이는 기쁨이 없으신 것입니다. 자식 잃은 부모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는 잃어버린 자식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그 자식을 되찾았을 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식인 우리를 되찾으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능한 하나님이 방법이 없어서 십자가가 아니면 안되셨는가? 를 질문해 보았습니까? 왜 하필이면 예수님이어야 하며, 십자가이어야 했는가? 자녀 잃은 부모의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을 억누르던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32절)

지난 주간 천상병 시인의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는 시 한편을 소개받았습니다.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인생을 소풍 길이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이 시만 읽으면 그는 참 행복한 삶을 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는 억울하게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 평생을 후유증 속에 시달렸습니다. 옥에서 나와 술을 마시고 영양실조로 길에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행려자인 줄 알고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버려졌습니다. 친지들은 행방불명된 그가 죽은 줄 알고 유고집을 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같은 죽음을 주제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그런 시인이 어떻게 인생이 소풍 길이었다고 노래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됨을 생각하니,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억울하고 고통스러웠던 인생 길이 소풍 길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임을 발견한 이 여인은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보는 마을 사람들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전에는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여기는 것이 싫었기에 피했으나, 이제는 상관없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더러운 여자였다고 말할 작정이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오히려 감격이 넘쳐났습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딸, 천상의 공주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없는 고아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온갖 밑바닥 생활을 다 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천덕구러기였던 사람이 본래 자신이 왕자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고아로서의 지난 세월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겠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임한 기가 막힌 복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죄 속에 살았던 지난 날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 속아 살던 자신의 옛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장 6절)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면 과거의 나를 드러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감격입니다.

지난 주 새 가족 한 분이 교회 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주님께 회개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어찌 이리 감사한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나고 동네로 내려가 외친 그 마음이 제 마음이 되었답니다. 그 동안 제 생활을 누가 물어볼까 사람들을 멀리 했던 저는 이제 제 입으로 주님 만난 기쁨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언니들한테도, 전에 만나던 모든 분들한테도 주님을 전도하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화장 안해도 너무 예쁘대요, 얼굴이 너무 밝아보인대요. 그러면 전 그리 대답합니다. "예수님표 화장품을 언니도 발라보라고."

백만 영혼을 구원했다는 무디 목사님이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느 마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기자들이 마을 신문에다가 무디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구두 깁는 사람이었고 무식하고 공부한 바가 없었습니다. 이 신문을 보는 동안 그 지방의 목사님들이 너무 마음이 아팠고 격분했습니다.ꡒ이 나쁜 놈들, 이런 이런…….ꡓ할 때, 무디는 그 신문을 보면서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ꡒ내버려두세요. 신문에 나지 않은 허물이 훨씬 더 많아요. 그러니 너무 그럴 것 없어요.ꡓ저들이 말하고 있는 그것보다 나는 훨씬 더 부족한 사람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죄인보다 더 큰 죄인이다.ꡑ담담하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 무디 목사님은 예수님 안에서 정말 거듭난 사람인 증거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만 더 이상 그것에 매어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된 복을 누리고 나면 사람의 비난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거나, 상처, 죄책감, 열등감에 눌려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열어 주셨던 영적인 눈을 자신에게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시 복음 앞에 진리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결론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이 여러분이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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