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1-39)
본문
성경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처럼 그렇게 친한 관계도 없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정말 친한 친구였습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도 요나단은 과감하게 다윗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사울왕의 창칼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에게 요나단은 활쏘기 표적을 통해 사울의 마음을 알려 줍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죽자 다윗은 요나단을 위해 조가를 부르며 애석해 합니다. “나의 형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한 것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라고 노래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를 생명같이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는 그런 뜨거운 사랑을 만납니다. 바로 십자가 위의 뛰어난 사랑입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구세주의 사랑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확신을 더욱 견고히 해줍니다. 구원의 송가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숨결을 다시 느끼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도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야기 가운데 흠뻑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무조건 적인 사랑입니다. 일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순간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대적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 우주에 있는 그 어떤 것에 견줄 수 없습니다.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아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다 가져와도 잴 수 없는 것이 주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말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가운데 분명하고 똑똑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 값을 그분의 피 값으로 갚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받게 하셨습니다. 내가 죽어야할 자리를 예수님이 대신 차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갚아야할 죄의 대가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이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가르켜 예례미야는 무궁한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헌신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주신 사랑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측량 못할 긍휼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그 무엇을 아끼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큰 것을 주셨는데 그보다 못한 것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놓은 사람은 덜 귀한 것은 쉽게 내어놓는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것 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건만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더 사랑하지 못하는 부족한 믿음이 가슴 아픈 것 입니다.
32절에 보면 나오는 “아끼다”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창 22:12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말씀이 나옵니다. 칼을 들어 이삭을 찌르려고 하는 아브라함을 황급히 저지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드렸듯이 하나님은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옛날 부흥 목사님들은 이런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이 다섯 있는 어떤 분이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애기하는 도중 그 친구가 아들 하나를 달라고 하자 엉겹결에 하나를 줄 테니 양자로 키워 보라고 했답니다. 집에 와서 곤하게 자고 있는 다섯 아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들을 주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첫아들은 장남이라 안 되겠고 둘째는 제일 똑똑하고 지혜로 와서 안 되겠고, 셋째는 제일미남이고 자기를 쏙 빼닮아서 안 되겠고, 넷째는 늘 병약하고 비실한 아들인데 남에게 줄수 없고 다섯째는 막내인데 어떻게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결국 이 아버지는 그 친구에게 한 아들도 주지를 못했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주신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신 사랑입니다. 이 뜨거운 사랑에 생명 바쳐 사랑하시는 종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조립품이 아닙니다. 완성품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확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힘입어 구속받았습니다. 죄사함 받았습니다. 죽음으로 날 사랑하신 그분 앞에 우리는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 무엇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요구하시는 것!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라고 주님 앞에 고백하시는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함으로 주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여호와께 열납 됩니다. 중심으로 주님을 높이는 영혼이 축복을 받습니다.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심령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의 사랑입니다.
33절에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 법정에 정식 고소하다. 죄를 씌우다” 란 뜻입니다. 누군가가 믿는 백성을 고발합니다. 정죄하려 하고 있습니다. 자구 옆구리를 찔러 고통을 주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송사하고 고발하는 이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존재 입니다. 조그만 죄를 지어도 자꾸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이지만 범죄로 인하여 죄책과 두려움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합니다. 죄의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양자됨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지은 죄를 알고 회개 하였습니다. 보혈의 은혜를 입어 깨끗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다가와서 괴롭히고 정죄하고 고발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다가와서 속삭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러고도 구원받았다고 그래? 그런 위선이 어디 있어? 하면서 죄의 문제로 자꾸만 정죄하려 합니다. 그물을 던져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올가미를 가져와 씌웁니다. 교묘한 술책으로 의심의 영을 던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요. 우리는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사탄이 와서 자꾸만 조롱하고 비웃어도 우리는 든든한 망대가 있습니다.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보혈로 정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의의병기가 된 것입니다. 죄가 성도에게 왕 노릇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를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너는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막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다 의롭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들의 특권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결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송사할 수 없고 우리를 끌어 내릴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백성을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늘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벧전2:8 엡 14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 라고 하십니다.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라고 하십니다.
“내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한다. 네가 불 가운데 지날 때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한다. 라고 하십니다. 사43장
(다니엘의 세 친구는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서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
남북 전쟁 때 링컨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오자 참모가 물었습니다.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다. 적군이 지도록 기도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그게 아니고 어떠하든지 내가 하나님 편에 있기를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으면 승리는 보증수표와 같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승리를 보장 받았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십시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말과 불 병거가 마귀보다. 사탄보다 적군보다 훨씬 강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에 있을 때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행18장 9-10
사도바울을 태우고 로마로 가던 배가 유라굴로 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배는 파선하고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구원의 여망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다 사라졌습니다. 14일 동안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울아 두려워 마라 네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너와 함께 배에 있는 자들을 다 네게 주겠다.“ 고 안심시키십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유라굴로 같은 광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
각양각색의 문제로 힘이 듭니다. 지치고 피곤합니다. 도무지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실패가 없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십니까? 주님께서 평강을 주십니다. 무슨 염려가 그렇게 많습니까? 모든 염려를 다 내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두려워 말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마 라고 하십니다. 질병에 걸리셨습니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돈이 없으십니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가진 자 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을 만나도 주안의 신자는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낮에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도록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아들의 형상까지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주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중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품은 영원한 안전지대 입니다. 오히려 그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가게 하십니다. 요13장1절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35절에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말씀 합니다. 39절에서는 그 대답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덤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를 떼어 낼 수 없습니다.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생명주신 십자가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탄은 송사합니다. 고발합니다. 정죄하려 합니다. 마귀가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막는 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35절 하반 절부터 보시면 그러한 것들이 나옵니다. 첫째 환난입니다. 어려움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입니다. 재난과 시련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막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부활은 승리의 표적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둘째는 곤고입니다. 곤고는 좁은 장소라는 뜻입니다. 새장에 갇힌 것가 같은 것입니다. 곤고할 때 마음과 믿음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 끝에 갇혔을 지라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빼오시는 분이십니다.
셋째는 핍박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노골적으로 미움 받는 것입니다. 공격받는 것입니다. 어려움 당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 전한다는 것 때문에 돌에 맞아 기절도 하고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스데반도 성령 충만하여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순결을 지키다가 권력자로부터 무서운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로마 시대 10대 박해가 있는데 가장 매서운 핍박이 네로 황제에 의해 저질러졌습니다. 말 못할 핍박 속에서 목숨은 잃어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책을 쓴 안이숙 사모님을 아실 것입니다. 이분은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서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믿음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처녀의 몸으로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하다가 출옥하신 분이십니다. 출옥 후에는 모진 고문으로 인해 처녀의 몸으로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게 되어서 가발을 쓰고 다녔습니다. 이분은 출옥 후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하지 못해서 울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가 감옥에서 목격한 것은 이것입니다. 순한 양떼 같은 성도들이 모진 매와 고문에도 아이구 소리 한번 안하는 몸서리 쳐지는 참상을 보면서 자기는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 주여 속히 천사를 보내셔서 이 모든 사실을 사진 찍어 주세요, 속히, 속히 주여 속히” 하면서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답니다. 순교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며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직접 보게 되었고 자신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를 이렇게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되게 하였답니다.
네 번째는 기근입니다. 환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굶주리는 것을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는 적신입니다. 적신은 무엇입니까? 입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헐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 때문에 , 믿음 지키다가 당하는 고통입니다. 여섯째는 위험입니다. 세상에서 정직하고 진리대로 살려면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 위험한 일 당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신앙으로 살려면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일곱째는 칼입니다. 죽음과 전쟁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말씀합니다. 죽음 앞에 우리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환난과 외로움과 칼의 위협이 와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결코 끊을 수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
그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와도 믿는 자는 안전합니다.
세상에서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아도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이 끊어질 것 같아도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37절을 보십시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할렐루야
성도는 승리한 존재 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믿음의 산 정상에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확신하며 외칩니다. 두 팔을 높이 들고 모든 사람을 향해 큰소리로 목청껏 소리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것이 와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할렐루야!!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분명히 승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어떤 인생의 폭풍이 와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고통의 줄보다 예수님의 사랑의 줄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 하십시요, 믿으십시요, 의지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승리의 면류관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고난을 두려워 마십시요, 환난과 역경과 모든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배고픔과 헐벗음과 위험과 칼 앞에 당당하십시요, 생명력 있는 믿음은 온 세상을 이깁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십시오. 약한 것 같은 데 강하며, 죽을 것 같은데 살며, 없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을 다 가지며, 불가능한 것 같은데 가능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요? 그것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에 파묻혀 날마다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