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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교회를 세우는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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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교회를 세우는 성도
본문 : 사무엘상 6장 10 - 16절 마경훈 목사


류영모 목사님은 「교회의 풍성과 충만」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말했습니다. 첫째, 주님이 그토록 세우시기를 열망하셨던 바로 그 교회는 「두 날개로 나는 독수리」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고 예배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교회 말입니다. 그리고 흩어져서는 가정마다 몇 몇 사람이 모여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소그룹 가정교회의 날개가 힘 있게 바람을 일으키는 교회였습니다. 즉 교회의 세포 날개가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대그룹 날개는 강한데 소그룹 날개가 약합니다. 소그룹 날개가 가정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거의 교회에서 모임을 갖는 셀그룹들이 많습니다. 불편함을 극복하지 않고는 큰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교회는 큰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모이는 것이 힘들어도 가정에서 모여서 셀모임을 하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지상에 있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성자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그러나 치료가 활발히 일어나는 곳 「치료중」「건축중」「공사중」입니다. 지상 교회와 지상교회의 성도들과 목회자에게 완전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공사 중이라면 그 공사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사현장에 망치를 들고 못질을 하는 사람, 무거운 벽돌을 실어 나르는 사람, 톱질을 하는 사람, 철근을 세우며 기둥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으며 또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관심조차 없이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공사중이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현장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교회를 보시며 갖는 안타까움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말은 사랑이 식었다는 말입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는 주님이 어떤 분이지 알았습니다. 주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알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과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제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제 아내의 표정, 말, 행동, 입고 있는 옷, 머리 스타일까지 상관을 합니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무관심해도 제 아내에게는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하기에 아내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은 교회의 모든 일에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치료중인 교회, 공사중인 교회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교회에 무관심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저도, 주님도 믿지 않을 말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공사의 현장인 교회를 세우는 성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던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혔던 나라가 블레셋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사역 말기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인 4천명이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열세에 놓이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법궤를 전쟁터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 패배합니다. 군인은 3만 명이 죽음을 당하고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가지고 가드로 옮겨갔는데 그 때부터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시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법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은 했으나 자기들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이 하신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새 수레 하나를 만들고 젖 나는 소 두 마리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어미 소로부터 떼어내어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만약 젖 나는 어미 소가 끄는 법궤를 실은 수레가 벧세메스라는 지역으로 곧 바로 가면 자기들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이 내린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의 젖 나는 암소는 송아지를 떼어놓고도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까지 가게 됩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수레 위에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벧세메스로 가는 젖 나는 두 마리의 암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때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젖 나는 두 마리의 암소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두 마리의 암소를 주목했고, 그 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도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수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고 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는 젖 나는 소라고 했습니다. 젖 나는 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암소는 사명 때문에 육정을 초월해야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성스러운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 암소는 본능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목적하심에 따라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 이 말씀은 가족을 등한히 하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주의 일을 감당키 위해 인정을 초월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가정 일보다 우선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들을 스스로 진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얼마만큼 자기를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 말씀에 보면 좋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없고 모집한 자만을 기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인정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인간적인 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관계나 생각들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구성원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힘을 모을 때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본문 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암소는 의견 충돌도 없이 협력하여 정해진 코스로만 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중도에서 꾀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제자리걸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푯대를 향하여 묵묵히 힘을 합쳐서 순종의 걸음만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종들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협력을 원하시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협력해야 할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내 생각을 내려놓고 협력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교회가 나옵니다. 안디옥교회는 수많은 교회들의 모델이 되는 교회입니다. 특히 선교지향적인 교회들은 안디옥교회를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를 섬겨 금식하다가 바나바와 사울을 다로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대로 순종하는 것은 안디옥교회가 교회의 담임목회자인 바나바를 포기하는 것이고, 교회에서 가장 유능했던 사울(바울)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뜻 앞에 전적으로 순복했습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협력해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우리교회는 큰 교회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로 채워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협력하는 진짜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무늬만 교회, 무늬만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비전교회 목사로서 계속해서 갈등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교회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기는 좀 힘들어도 강한 교회, 진짜 교회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힘들어도 강하게 사역하자, 힘들어도 강한 성도들이 되도록 설교하자, 힘들어도 강력한 예배가 되도록 힘쓰자입니다. 비록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힘을 쓰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흑백이 분명하셨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중간에 연옥은 없습니다. 선 아니면 악입니다. 중간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아니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색깔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협력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하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교회의 구성원들이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헌신할 때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다.
두 마리 암소에게는 눈물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메어 보지 못한 멍에를 메고, 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을 걷고 있습니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울면서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야 될 그 길을 가면서 울었습니다. 암소들이 새끼 송아지들에게 모성적 본능에 이끌리면서도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될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편 84편 6절에도 성도는 눈물 골짜기를 통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이 터져야 합니다. 또한 그 죄에 대한 사죄 때문에 북받치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키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걷는 이 길은 눈물 없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렇게 우는 성도를 주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7:17).
예수님도 구속의 길을 걸으시면서 울고 가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교회는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눈물, 성도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눈물 병에 담으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십니다(시 56:8).
두 암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정지 명령을 내린 사람도 없었지만, 아니 수레를 이끈 사람도 없었지만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에 섰습니다. 자기들의 할 일을 다한 두 암소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희생이 되어 번제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눅 19:10). 마침내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을 보거나, 교회사를 보면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희생이 아닙니다. 목숨을 거는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조금만 손해가 생겨도 억울해하고 조금만 손해가 생겨도 못 견뎌하는 그런 자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해서 헌신하고서도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한 평생을 십자가만 지고 마지막에는 제단 앞에 모든 것을 불태워 제물로 드리는 순교적인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했으니 어느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보상심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은혜 받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풍성한 사랑과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번 이스라엘 선교는 다른 때보다 많은 대가를 지불한 사역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순종해서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교회에 남으신 분들도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남아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교회 돌아보느라고 힘이 들어서 차라리 이스라엘 갔으면 더 좋았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두 암소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4월 8일 전도 축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 사역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정성으로 다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내립시다. 교회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우선해야 합니다. 우리가 협력해야 할 일도 어떤 인간의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일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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