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즐거운 자 (잠 15:13-15)
본문
[황희 정승]이 은퇴해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오늘이 저희 아버님 제삿날인데 우리 집 소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제사를 지낼 수가 없지요?”라고 묻자 그는“그야 지낼 수 없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내일이 아버님 제사인데 저희 집 돼지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래도 아버님 제사는 모시는 것이 당연하지요?”라고 물으니 이번에는“그야 물론 당연이 모셔야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인이“한 사람은 안 된다 하시고 한 사람은 된다 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황희]는“소가 새끼를 낳든 돼지가 새끼를 낳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요는 제사인데 지내고 싶은 사람은 지내게 하고 지내기 싫은 놈에게는 하지 말도록 하였을 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문제는 마인드입니다.“그러면 안 되겠지요?”라는 마인드와“그래야 되겠지요?”라는 마인드는 천양지차입니다. 늘 부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을 붙들고 아무리 가르치고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자신의 마음가짐이 그 문제의 열쇠인 것입니다. 마음가짐이야기를 자주합니다만 그만큼 중요합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복>이라는 것과<행복>이라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복과 행복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분명히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먹을 만큼 먹고, 입을 만큼 입고, 살만큼 삽니다. 이만하면 복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상당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냐고 물으면 한참을 생각합니다. 자, 복은 누리는데 행복에 대한 지수는 형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여건에서 가장 복스럽지 못한 생을 사는 나라지만,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로는 세계 제일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복되다>하는 것과<행복지수>는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증명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 앞에 풍성한 음식이 놓여져 있으면 복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행복은 무엇입니까? 입맛이 좋아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이 행복에 속합니다. 불행은 복을 앞에 놓고도 누리지 못하는 것, 많은 음식을 상에 그득히 놓고도 입맛이 없어서 손도 대지 못하는 것이 불행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것 중에“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 보면 아무데나 가서 언제든지 눕기만 하면 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이 좋은가, 나쁜가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단잠을 자는 것은 행복입니다. 보세요, 몸이 건강하다고 전부가 잘 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건강은 복이지만, 단잠은 행복에 속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성경에 의하면 자식은 복입니다. 그러나 자식만 있으면 다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자식이 있다는 복이 행복이 되려면 그 자식으로 인해서 기쁨을 얻고 또한 자식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행복에 속합니다. 자식이 있다고 다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 인해 그 마음이 무엇을 누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마음이 즐거운 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말 그대로 마음이 즐거운 자가 곧 행복한 자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히<의무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의무라고 하는 것은 일에서는 매우 유용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매우 불쾌한 것입니다.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밀접한 관계는 부부사이입니다. 그런데 한 남편과 아내가 가정을 이루어 사는 부부라는 사이는 만날 때마다 새롭고 매일같이 사랑을 새롭게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현재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날부터 의무로 바뀌면 문제가 됩니다.‘결혼했으니 살아야지. 애도 있으니 살아야지. 지금까지 살았으니 마저 살아야지.’이렇게 되면 기가 막힌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어떤 사람의 인생이든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환경을 바꾸어서 행복이 오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장도 바꾸어보고, 사람도 바꾸어보고, 부인도 바꾸어보고, 그렇게 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할 때에는 가능할 수 있어도 행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먼저, 소유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 의존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돈이 있어야 행복하고, 더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 하며, 돈에 의존하고 있는 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소유에 의해서 행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끝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과 행복은 다른 것입니다.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여건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마음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충분한 행복 여건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행복할 수 있는 순간에 이상한 생각을 합니다.‘만일 이 행복이 깨지면 어떻게 하는가?’,‘이 여건이 그만 바뀌면 어떻게 하는가!’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이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현재의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아주 예쁜 여자를 만나서 죽도록 쫓아다녀서 사랑을 받아내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고 보고 또 봐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잠자는 아내가 너무 예쁩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습니다.‘이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입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편하지가 않습니다.‘저 여자가 무사한가?’이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까? 이건 복은 얻었지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행복의 표현으로<항상 잔치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잔치란 기쁨의 극치요, 행복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항상 잔치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여러분, 잔치라는 것은 그 본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잔치란 물질의 문제가 아니며 음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보세요, 좋은 사람이 모여야 행복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야 흥겨운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다 좋은 마음으로 모여서 서로 친교하고 사랑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이것이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즐거운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어떤 잔치 집에 가더라도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면 그 시간만은 반갑고 즐거워야합니다. 신랑 신부를 향해서는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 어느 결혼식이든 가서 신랑이 의젓하고 신부가 예쁘다 그래야지 대놓고“신부가 아깝다. 신랑이 꽝 뽑았다.”이러면 안 됩니다. 잔치 집에서는 덕담만 해야 합니다. 서로 칭찬하고 존경하고 사랑은 나누어야 이것이 잔치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사랑만이 있고 덕담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즐거우면 그 즐거움이 얼굴에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13절에 보세요.“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그랬습니다. 잔치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이 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얼굴도 빛이 나야 합니다. 찬송하는 사람의 얼굴도 빛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 합니다. 마음에 은혜가 있으면 얼굴이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잔치입니다. 빛나는 사람들끼리 모여야 잔치지 모여서 시비하고 질투하고 울고 싸우고 그것이 무슨 잔치입니까? 잔치는 이렇게 항상 기쁨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교회에 모인 우리들은 항상 마음이 즐거워 잔치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안나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믿어지지 않는데 지옥은 믿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자기를 생각하며‘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6절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결국 잔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모두가 잔치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마음이 즐거워야합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불평하고 악담하고 원망하고 초상집같이 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즐거운 잔치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매일매일 깊이 깨닫고 간증을 하고 그리고 사랑이 넘칠 때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매일같이 잔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간증이 나와야 할 입에 악담이 가득하고 불평이 열매처럼 달려있고 교만이 고드름처럼 달린다면 그 삶에 무슨 잔치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얼굴이 말합니다. 아주 무섭습니다. 쳐다보기가 싫어요.
옛날 우리 한국사에 나오는 목사님들은 비유로 쉽게 교리를 설명한 것 중에“불교는 마치 초상집과 같다. 유교는 마치 제사 집과 같다. 기독교는 잔치 집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까? 잘 웃는 사람이 잘 믿는 것입니다. 얼굴이 빛이 날 정도로 환하게 잔치 집에 가서 즐기는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즐거운 잔치 집과 같아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누굴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행복한 사람이 믿음이 있는 자요, 늘 그 마음이 초상집처럼 우울하고 슬프고 어둡고 인간관계도 불행한 사람은 믿음 없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새해가 되면 우리는 복에 대해서 말 하고 복을 비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 많은 날들 속에 복을 이야기 했고 복 받을 것을 생각했지만,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행복하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복된 여건만을 생각하지 말고 행복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복만 가진다고 되는 것아 아닙니다.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자의 그 행복의 뜻이 어디 있느냐를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때에 마음이 즐거운 자가 되고 마음이 즐거운 자가 잔치하는 인생으로 한평생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워 늘 잔치하는 인생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