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은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입니다 (요 2:1-11)
본문
1. 오늘은 우리나라 교회역사에서 아주 의미깊은 날입니다. 100년전 1907년 1월14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날입니다. 우리 교단의 남자 평신도 지도자 1,500여명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도사경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하였고, 오후에는 노방전도를 하였고, 저녁에는 불신자를 데려와서 전도특별집회를 가졌습니다. 14일 밤,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2,000여명의 남자 성도들이 저녁 8시부터 말씀을 듣고, 성령임재를 위한 통성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회개의 역사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죄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조기에 끝날 것 같지 않아 원치 않는 자들은 집에 돌아가게 했습니다. 2/3 정도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은 사람들 500-600명은 새벽 5시까지 장장 10시간 동안 찬송, 말씀, 기도, 간증, 회개로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은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몹시 힘든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1895년 일본은 한국을 영구히 식민지로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명성황후를 칼로 살해하고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국모를 살해한 천인공노할 사건, 소위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10년 뒤인, 1905년에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을사조약을 맺고, 1907년에는 우리나라 경찰과 군대를 해산시키고, 그해 7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1910년 급기야 한일합방이 되어 조선왕조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망을 잃은 우리 민족에 성령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겉으로는 나라가 기울어져가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찾아오시기를 원합니다.
100년 전과 같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2. 한계가 있다- 포도주가 모자란다.
오늘 본문이 그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란 것입니다. 유대나라에서 포도주는 잔칫집에서 아주 중요한 용품입니다.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밥먹을 때 반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손님 접대에서 포도주가 빠지면, 앙코 없는 찐빵과 같습니다. 흥이 깨집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이런 부족사태가 발생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이 그러합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란 것처럼, 뭔가 늘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다른 것은 괜찮은데, 건강이 좋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평생 사랑하겠다고 결혼하였지만, 부부간의 사랑에 금이 갑니다. 갓 결혼했을 때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잤지만, 30대 중반쯤 되면 천장을 보고, 40대가 되면 등 돌리고 자고, 50대가 되면 각 방을 쓰는 데까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에로스)의 한계입니다.
연세가 드실수록, 시력과 청력이 떨어집니다. 건강관리를 위하여 그리고, 노년의 편안한 삶을 위하여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돈은 더 없습니다. 돈의 한계입니다.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자녀와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 줘보기도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해보지만, 그 때 뿐입니다. 아이들은 자기들 세계로 점점 더 빠져듭니다. 관계의 한계를 실감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는데, 은퇴후 돌아보니 별로 이뤄놓은 게 없습니다. 부부생활, 자녀양육, 경제적 안정, 사회적 인정, 신앙생활,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자란 현실, 소위 한계에 부딪칩니다. ‘하면 된다’ 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써봅니다. 하지만, 현실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고 갈수록 힘들어져만 갑니다. “긍정의 힘”이란 책을 읽어보고, 새로운 용기를 내지만, 여전히 건강의 한계, 사랑의 한계, 관계의 한계 등에 부딪쳐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 적극적인 사고방식, 이것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살이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상생활에서 때때로 일어납니다. 그것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한계, 이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모자란다는 현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비극이 아니라, 하나의 축복이요 은총의 기회요,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모자람은 우리가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신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인간이기에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딪치는 한계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요, 주님께 기댈 수 있는 기회요, 주님의 은총을 받을 기회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현실,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의 모자람 가운데 계신 주님은 우리의 모자람을 풍성함으로, 한계를 축복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3. 한계를 인정하라- 포도주가 없다
포도주가 다 떨어진 잔칫집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 이 집이 예수님의 어머니의 가까운 친척집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초청받은 것입니다. 포도주가 모자란 사실을 안 마리아는 그의 아들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어떡하면 좋겠니?”
모자란 사실을 인정하였고, 예수님께 부탁드린 것입니다.
한계를 인정하는 것, 이것은 힘듭니다.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단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인정하지 않을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둡니다.
돈이 없어도 내색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육체에 심각한 고통이 와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요?
관계가 깨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시당할 것 같고,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가 훼손당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게 두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주님께 드러내고 고백하는 사람, 그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새로운 은혜를 입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모자란 인생입니다.
아무리 오이 마사지, 머드 맛사지하여 팽팽한 피부를 유지하려고 하나, 그 피부도 때가 되면 노화됩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하여도, 우리의 영적인 나약함과 부끄러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은 병균 하나만 우리의 뇌에 침투해 들어와도 우리는 꼼짝 못하고, 마음이 무너져내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나약함과 부끄러움, 모자람을 주님께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언제부터인가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소서.”
“주님, 제 몸이 너무 약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저는 도덕적으로도 부끄럽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우리의 육체적 한계, 영적 부족함을 주님께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 이것이 변화의 기초작업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변화의 축복을 우리 모두 누리기를 원합니다.
4. 한계 속에서 더 큰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라
“포도주가 없다”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에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의 “여자여(헬.gunai)”란 말은 우리말의 뉘앙스와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자를 존중히 여기며 부르는 말입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사랑하는 여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여자여”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즉각 이루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께 아뢴다고 당장 달라질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거절감의 상처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모자란 상황에서, 기적을 이루실 줄 믿었습니다.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한계에 부딪쳤을 때,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기대하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두 세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채워,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더니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 통은 약 40리터 정도 됩니다. 두 세 통이라 했으니, 항아리 하나에 약 100리터 정도 들어갑니다. 이런 항아리 여섯 개니까, 600리터의 새로운 포도주, 맛있는 포도주가 기적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자람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한계가 선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이루실 큰 일을 기대하며, 순종할 때,
오늘도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계에 부딪쳤습니까? 모자라는 인생입니까?
잠시 절망하고 탄식할 수 있어도, 이제 그 자리를 털고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모자라는 인생에 새로운 것으로 풍족하게 채워주십니다.
한계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로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존 밀턴은 시력을 잃고 난 후, 세계적인 작품 실낙원과 이어 복낙원을 집필하였습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 난 후, 불후의 교향곡 제9번, “장엄미사”를 작곡했습니다.
감각의 상실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 신비한 음악의 세계, 문학의 세계로 인도해주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를 고치려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 째 되던 날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나사로의 무덤에 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왔습니다.
죽음은 한계 중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겪는 최고의 한계입니다.
가장 밑바닥에 내려가면, 이제 올라가는 길만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 몹시 모자람을 경험하며 한계에 부딪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요?
11절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믿음의 세계입니다.
모자람을 인정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세계가 열립니다.
그 믿음은 구체적으로 이런 믿음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자람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자란 자리에 새로운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주신다.
그러므로 셋째, 우리의 모자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축복의 기회이다.
이런 면에서, 모자람은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오재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