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안고 사는 사람들 (눅 2:25-33 36-38)
본문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으므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대체로 미래 지향적인 대망에 관계합니다. 오늘 당장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 보다 내일 어떻게 사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다릴 것이 있느냐, 약속이 있느냐, 즉 미래에 대한 보증이 있느냐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이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의 정치적 억압이 있었습니다.
정부의 과도한 세금부과로 인하여 가난한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그리고 세리의 토색과 횡포는 극에 달해서 서민들이 결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는 세속화 되어 지치고 곤고한 백성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십계명을 613개의 세부조항 (하라 365개, 하지 마라 248개) 으로 나누어 놓고 지키도록 강요하여 율법이 그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율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수없는 세부 조항으로 쇠사슬처럼 옭아매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사람들은 계층별로 귀족 계층, 일반 서민 계층, 소외계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당시 유대교는 서민의 종교가 아니었고 귀족을 위한 종교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으로 불려지는 엘리트 계층을 위한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당시에 죄인으로 불려 졌던 세리와 창녀,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대하여 끊임없는 미움과 정죄만 했을 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나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교제하자 비난하였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분별력을 잃고 함께 비난하였습니다. 종교가 귀족화 되면 안 됩니다. 종교가 귀족화 되면 종교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특권층을 비호하고 그들의 사욕을 위한 도구가 되어 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 살던 대 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정치적 억압과 가난 가운데서 해방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기로 하신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기다림은 위대한 정치적 메시야입니다.
사람들의 기대가 높은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여 스스로 메시야 임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드다” 라 하는 사람이 400여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로마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얼마 못가 스스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행 5:36)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약대 털옷을 입고 요단강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개를 전파하며 세례를 베풀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당신이 오시리라 한 그 메시야 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당시 대중의 기대가 반영된 질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헤롯왕에게 잡혀 순교하자 사람들은 실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 빠져있는 즉 영육간에 메시야가 와야 한다고 하는 간절한 목마름이 있을 때 오셨습니다. 이런 기다림을 안고 살던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의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과 안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성령이 함께하여 계시를 받은 사람” 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던 늙은 여 선지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두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둘 다 아기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 즉 그들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신앙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습니까?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2006년의 성탄을 앞두고 성탄을 기다림을 안고 살았던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기다림으로 주님을 기다려야 할지에 관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 신앙의 순수성
시므온에 대하여 25절에서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라고 햇습니다. 그리고 안나에 관해서는 37절에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고 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의 “의롭고 경건하여...” 라는 말이나 안나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순수성입니다.
신앙의 순수성이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속화되면 안 되고 성화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세상과는 멀어지지만 성화되어 속된 세상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계 14:4절에 보면 성도들은 성결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여자라는 것은 영적으로 세속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지켜야 할 믿음을 버리고 세상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정절을 버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도가 순수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올바른 메시아관
대부분의 당시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배척하고 못 박은 것은 그들의 메시야 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메시야 관은 무엇입니까?
현실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구세주는 단지 육신적인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할 구세주였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이었습니다. 오직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 통치로 인한 억압에서 해방을 가져다 줄 메시야 즉 정치적 지도자를 기다렸습니다.
즉 육신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는 그러한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문제를 당장에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메시야 였습니다.
인간의 질병이나 가난 억눌림과 핍박 이런 불합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안되고 정치적으로도 안 됩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진정한 메시야는 죄에 대한 해결책을 주는 분이 진정한 메시야입니다.
히 9:22절을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죄 사함을 주는 분이 진정한 메시야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감히 인간이 죄를 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가?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고전 1:18-24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연약함 그리고 범죄를 함을 인정하고 메시야 되신 주님을 영접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메시야를 만날 때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인내심
시므온이나 안나 둘 모두 성전에서 아기예수를 만났고 알아보았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렸습니까? 아기 예수를 만날 때 까지 입니다. 그들의 인내심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구체적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에서 들어납니다. 시간도 예약도 없는 기다림을 혼자서 항상 기다린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내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안나와 시므온 처럼 성전을 떠나지 않는데 있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거기 거주하며 기다렸다는 의미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장소적인 의미입니다.
성전은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 출석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기에 거룩하고 또 그 일을 위해 모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믿음이 약해지고 결국 탈선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오는 휫수와 신앙의 성장은 정비례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령이 거하는 집이 되었기 “자신이 곧 성전” 이라는 것입니다. 고전 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했고 그리고 고전 6:19절에서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해서 성전을 떠나지 않는 믿음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고 부지런히 예배당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교회와 멀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 나오는 휫수를 늘리시고 머무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내 손길 가는 일들을 만드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금년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박재신 목사)